<내 이름은 빨강 1,2>를 읽은 후 선택한 이 책은  247 페이지의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 때문에 심리적으로 두 배 이상의 장편을 읽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 책의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납득하지 못하는 이야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그대로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작가 오르한 파묵에 대한 애정과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든 알고 싶다는 열망때문이었다. 참 이상하고 낯선 이야기였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다시 이 책을 읽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가 썩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처음 읽었을 때 나를 몹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낯설음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도 그 사이에 <순수박물관>과 <검은 책>, 그리고 <이스탄불>을 읽으면서 오르한 파묵의 세계에 좀 더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하얀성은 마치 우리가 꿈 속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는 없는 무언가를 의미한다. 곧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 있는 듯 보이지만 꿈 속에서 우리는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은' 그곳에 아무리 애를 써도 도달할 수가 없다. 발은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고 곧 끝날 것 같은 길들은 발을 내딛을 때마다 비틀리고 왜곡되거나 난데없는 장애물에 가로막히곤 한다. 움직여 주지 않는 몸으로 헛되게 힘을 쓰다가 꿈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우리가 갈망했던 대상이 밝게 빛나던 모습만을 안타깝게 떠 올리게 된다.  '하얀성'은 두 주인공인 이탈리아 출신 노예와 터키인 호자가 각자 갈망하던 그 무엇을 상징하고 있다.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몇 년 동안 우연하게 경험했던 많은 것이 지금은 필연이라는 것을, 우리 군대가 성의 하양 탑에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호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

 

이탈리아 출신인 노예는 터키함대의 공격으로 자신이 타고 있던 배에서 노예가 되고 만다. 하지만 자신이 지닌 지식 덕분에 비참한 노예 상황에서 벗어나 터키인이며 서양학문에 관심이 매우 많은 지식인 호자의 노예가 되어 그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서로 외모가 비슷했다. 터키인이면서 같은 터키인들과 자신을 구분하며 서양인의 지식과 학문, 그들의 삶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호자는 이탈리아 출신 노예로부터 서양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고 싶어한다. 반면 다시 자신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갈 날만을 고대하며 자신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면서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하는 호자를 경멸하던 노예는 오히려 호자를 통해 알게 된 터키 문화와 삶의 방식, 사람들에 대해 만족해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각자의 삶보다는 상대방의 삶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그들은 어느날 서로의삶을 바꾸게 된다. 이제 노예였던 사람은 호자가 되어 파디샤의 곁에 남아 호자의 삶을 살아가고 원래 호자였던 터키인은 이탈리아로 도망쳐 노예 대신 그의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서로 삶을 바꾼 그 사람들은 각자가 새롭게 맞이 한 인생에서 행복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작가는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우리 각자의 해석에 맡기고 있다.

 

처음 노예와 호자가 서로에 대해 자신만큼 이해하게 되기 전에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가? 내가 나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오래 매달렸었다. 그런 두사람이 이야기 후반, 서로 바뀐 삶을 살기 시작한 후 호자가 된 노예는 이 사실을 알아차린 파디샤에게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이지요." 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가 원래 누구였는지보다는 지금 내가 누군인지가 자신의 정체를 말해 준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피디샤는 '모든 삶은 서로 닮은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 말미에서 호자가 된 노예는 자신이 나름 만족스런 삶을 살았지만 자기의 삶을 대신 살고 있는 이탈리아의 호자가 그리웠다고 말한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자기 정체를 아는 사람 - 파디샤도 그가 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털어 놓을 수 없었다 - 인 '그' 를 만나고 싶어한다. 그리고 어느날 이탈리아에서 노예의 삶을 대신살았던 '그'- 호자이며 터키인이던 -가 찾아 온다.

그리고 그는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이야기 해 준다. 그리고 호자로 살았던 노예는 자신이 쓴 그와 자신에 대한 책을 그에게 보여 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 두사람은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 것의 분명한 이유를 찾았을까? 각자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서로의 인생을 살아 온 두 사람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마주 앉아 자신의 삶을 살아 온 상대를 바라보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

서로 바꾸어 살았던 새로운 인생에 대해 만족해 하면서도 그들은 왜 각자의 삶을 바꾸어 살기 전의 삶에 대해 똑같이 책을 썼을까? 왜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했으며 결국 다시 만나 상대의 모습을 거울 속의 자신을 보듯 오래도록 바라 보았을까?

 

이 책을 읽은 후 복잡하기만 한 질문들이 온통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내가 나인 이유, 내가 누군인지를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만약 내가 누군가와 인생을 바꾸어 살게 된다면 나는 나를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풀지 못할 질문들만 가득 넘치게 만드는 이 책을 속시원하게 이해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기 위해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한다. "

                                                        - 웬디 웰치 -

 

 

 

이 책을 발견하고 가장 흥미를 느꼈던 점은 모든 책벌레들의 꿈인 '나만의 책방'을, 그것도 헌책방을 차리겠다는 무모한 도전에 나선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미국이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촉발된 경기침체에 빠져 들고 전자책의 활성화로 크고 작은 서점들이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는 시기에, 대도시도 아닌 쇠락한 탄광촌, 텃세높은 주민들이 팔짱을 끼고 쳐다보는 시골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그것이 정말 가능했다면, 어떻게 이들이 해낼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프롤로그에서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이란 아이디어가 즉흥적인 것이었으며 저자 부부가 번번한 사업자금이나 계획도 없이 뛰어 들어 명색이 서점인데 책꽂이를 다 채울 수도 없는 책들 - 이들 부부가 소장한 책들을 추려서- 을 가지고 에드워드 풍의 이층저택을 직접 헌책방으로 개조하며 애쓰는 내용을 읽고는 '아이고~ 이런 대책없는 사람들 좀 보게~'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3천여 권의 재고서적을 갖추고 어엿한 서점으로 개업하기까지 이들의 고군분투 과정을 읽어가다 보면 이들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매우 비범한' 사람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꼭 이루고 싶은 꿈을 가진 사람들만이 지닌 비범함이 이들에게도 있었다.

그렇게 작고 폐쇄적인 시골마을 사람들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도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았던 웬디와 잭은 헌책방과는 전혀 어울리 않을 것 같은 시골마을의 고풍스런 저택에 자리를 잡고 '낯선 이방인'에서 빅스톤에 꼭 필요한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지기까지 또 크고 작은 소동들을 겪어내야 했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은 낙관적이고 유쾌한 작가의 노력 덕분에 독자 입장에서는 재미와 감동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유쾌한 이야기거리였지만 웬디와 잭의 경우에는 정말 힘들고 고된 경험들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시종일관 웬디와 잭의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 그리고 유머 덕분에 부담없이 책을 읽었지만 '책'이라는 독특한 상품을 사고 파는 소비자와 공급자 사이, 그리고 한 지역의 주민들이 갖는 폐쇄성과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다는 소외감에서 빚어진 지나친 경계심이 지역사회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작가가 완곡하지만 정확하게 지적할 때는 마음이 무거웠다.

도시에서의 치열한 삶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고 싶어 농촌으로 떠난 사람들이 제일 먼저 겪게 되는 것이 자연의 벽이 아니라 사람의 벽이 더 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웬디와 잭이 만났던 사람들의 잊지 못할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그 지역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주민들 사이에 깊이 스며들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각자의 사연을 지닌 채 책방을 찾아 온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어주며 차 한 잔을 권하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그 비결이었다.

웬디와 잭이 강조하듯 결국 그들이 파는 것은 책이지만 그들은 책을 매개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며 책방은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믿음처럼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이 누구에게나 열린 장소였기에 그곳에 찾아 온 사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곳에서 숨을 돌리고 쉬어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이야기하는 사람과 이야기가 된 삶, 이야기를 읽는 독자 사이의 관계를 살아 있도록 유지해주기 위해 판다." .p. 271

 

 

웬디와 잭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가까운 곳에 이런 작은 책방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별 소용도 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처에 온라인 서점에서 운영하는 중고서점 지점이 있으나 그곳에서 나는 사람도, 사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 없다. 현대식 카페와도 같은 분위기의 책방을 채우고 있는 책들 중 나는 그 책에 대한 누군가의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책들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저 자신이 읽지도 않고 계속 소장할만큼 애정도 없는 책들, 그래서 새책은 아니나 읽은 이의 흔적도 전혀 배어 있지 않은, 어쩌면 한번도 누군가의 손에 소중히 들려 페이지가 넘어가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는 책들만이 꽂혀 있는 삭막한 풍경만 발견했을 뿐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혹은 '독사굴'같은 삭막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사람다운 삶, 온기가 있는 삶을 살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 놓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신들이 소장했던 책들 중 1500여권의 책들로 '맨바닥에 맨손으로 거침없이 뛰어든' 웬디와 잭의 이야기를 통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번쯤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며 생각할 거리도 무겁지 않게 담아 놓은 웬디와 잭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기를...

오르한 파묵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소설과 소설가>라는 그의 책 소개를 통해서였다.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의 하버드대 강연록이라는 소개에 먼저 이끌렸다. 노벨문학상에 대한 동경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가 말하는 문학론은 무엇일까? 하버드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현존하는 작가라는 것도 그렇고 그가 유럽의 변방국가인 터키 출신이라는 것도 그렇고 책 표지를 장식한 작가의 유쾌한 모습도 모두 오르한 파묵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새록새록 불러 일으켰다. 

지금껏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달린 책을 즐겁게 읽은 기억이 없다는 사실도 자극이 되었다. 어린 시절 호기롭게 읽기를 시작했다가 중도에서 나가 떨어진 작품들이 꽤 있었다. 대개 지루하고 난해했으며 내가 읽기에 불편한 내용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설과 소설가>를 읽은 후 이 작가와의 만남이 내겐 운명적으로 여겨졌다. 오랜만에 이토록 마음에 쏙 드는 작가를 발견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읽기 전까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그의 작품 역시 그의 생각처럼 매력적일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작품 중 처음 이 책을 읽기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제목만으로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16세기 오스만 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추리물이며 음모와 배반, 한 여자를 둘러싼 세 남자의 사랑이라는 소개글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이스탄불, 세밀화가, 문명과 문명의 충돌이라는 단서들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첫 장 '나는 죽은 몸' 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난 이 작가를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버려진 마을의 우물 속에 머리가 깨진 채 처박힌 시체가 제 1장의 화자였다.

2장의 제목은 '내 이름 카라' 그리고 3장은 '나는 개입니다' 였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나는 차례로 돌아가 각 장의 제목을 끝까지 꼼꼼히 읽었다. 4장은 '나를 살인자로 부를 것이다.' 5장 '나는 여러분의 에니시테요' 6장 '나는 오르한' 7장 '내 이름은 카라' 이런 식으로 1장에서 마지막 59장까지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개별등장인물의 입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라니 놀라웠다.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것이다' 라는 제목의 장에 이를 때마다 나는 꿈을 꾸듯 살인자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의 관정에 따라 재구성되는 이야기를 들으며 온몸의 전율을 느꼈다. 그의 눈을 바라보지만 살인자는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추리하는데 단서가 될만한 것들을 감춘다. 그리고는 독자들을 조롱하는 듯 내가 누군인지 알아맞춰 보라고 도발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과연 나비, 황새, 올리브라는 예명으로 불리우는 세밀화가들 중에서 1장에서 시체로 등장했던 엘레강스을 죽인 살인자가 누군인지를 찾기 위해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으며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단서가 될만한 것을 찾아 다시 읽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몇 개의 장들을 건너 뛰고 살인자의 정체를 알기 위해 결말을 읽고 싶은 유혹을 참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였다.

그렇게 화자를 달리하며 이어지는 이야기를 쉴 새없이 따라가는 동안 나는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모습을 마치 스크린에 옮겨 놓은듯 세밀하게 묘사하는 작가를 따라 지저분하고 비좁은 골목길을 누비며 추위로 얼어붙은 사람들의 입김이나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중요하지 않거나 섬세하게 표현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이 작품 속에서는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제목처럼 문자 그대로 빨강색 물감을 말하는 빨강조차 독립적인 개체로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낯설지 않듯 종이에 그려진 개와 말, 나무 그리고 빨강물감이 들려주는 이야기들도 너무나 매혹적이고 생생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화원장 오스만이다' 라는 제목으로 등장한 술탄의 화원을 책임지는 화원장 오스만의 이야기는 단지 2장에 불과하지만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눈앞에서 서서히 몰락해 가는 문명을 바라 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를 충분히 전달해 주었다.

너무나 슬픈 것은 그들 모두에게 닥친 그 운명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욕망을 충실히 대변하는 서구의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인간적인 욕망- 신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이야기를 장식하는 부속품에 불과한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위한 그림이 되고 싶어하는 -을 품고 있는 에니시테와 오스만 화원장을 서로 대척점에 서 있었다. 

에니시테는 베네치아에서 경험한 예술, 즉 신을 위해 봉사하는 예술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오직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예술에 대한 욕망을 멈출 수 없었다. 비록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만큼 대범하지 못했기 때문에 술탄을 통해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었던 에니시테와 달리 오스만 화원은 신 중심의 세계를 대변하는 예술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온 사람이었다. 그에게 그림은 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이야기 속의 일부일 뿐이고 예술가 자신의 스타일은 위대한 예술가로서 반드시 피해야 할 결격사유였다. 그에게 있어서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대리자로서의 인간, 신을 향한 헌사인 이야기와 그림이 아닌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닌 그림, 즉 인간의 정체성, 스타일을 향한 추구는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죄였다. 그러나 세상을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가 평생 지켜왔던 화풍을 헛된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의 변화를 막을 힘은 그에게 없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기억하는 그 세계에 영원히 침잠하는 것뿐이었다.

자신만의 세상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카라와 네 명의 세밀화가는 그 변화의 시대에 중심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갔고 그 안에서 각자의 선택과 결단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스타일의 문제는 예술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였으며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선택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들 각자의 선택의 결과는 어떤 것이었을까? 과연 그들의 선택이 시대의 변화가 이끌어가는 운명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었을까? 

 

이 작품에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 읽은 후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 많이 담겨 있었다. 한 문명이 지켜오고 이룩해 온 것들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어서 섣부르게 어느 하나를 내세워 말하기가 쉽지 않은 깊이있는 이야기였다.

오르한 파묵, 이 작가를 알게 된 것이 무척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