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보기에 동화책처럼 보이는 표지그림과 왼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그려진 의자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미소짓고 말았다. 그림 속에 보이는 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쿠션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귀여운 할머니를 자세히 보면 왕관을 쓰고 있다. 목이 긴 장갑을 끼고 빛나는 보석으로 치장한 이 할머니는 누구일까? 바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다.

 

현존하는 여왕을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 중 '책을 읽으려면 왕관을 벗으시오!'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샤를 단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썩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 샤를 단치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고 내가 아는 것이라곤 오직 <왜 책을 읽는가>를 통해 알게 된 것이 전부이지만 솔직히 별로 호감이 가는 작가는 아니었다. 그의 글은 전혀 친절하지 않았고 성격이 무척 괴팍한 구석이 있을 것 같은데다 심지어 그의 어떤 글들에서는 사람의 약을 올리는 듯 모호하고 빈정대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독자라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를 읽은 후에, '책을 읽으려면 왕관을 벗으시오!'라는 글을 찾아 다시 읽어 보고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책을 읽으려면 왕관을 벗으시오!'라는 그의 글을 읽어보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아닌 실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정말로 프루스트를 좋아해서 공식행렬 동안에도 무릎에 프루스트를 펴고 읽은 일이 진짜로 있었는 줄 착각하기가 쉽다. 비슷한 부분이 책에 나오지만 그때 여왕이 읽고 있던 책은 다른 책이었으며 프루스트를 인용한 부분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이런 착각과 오해는 나뿐이 아니었다. 나보다 먼저 샤를 단치의 책을 읽은 지인도 내가 프루스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글을 근거로 엘리자베스2세 여왕도 프루스트를 좋아한다고 내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샤를 단치가 읽은 엘렌 베넷의 이 소설<일반적이지 않은 독자>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었다. 그것도 엉터리로!

아무튼 샤를 리치의 글에서 인용한 내용과 실제 이 책의 내용이 맞지 않는 부분이 꽤 있긴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가 '문학에 관한 책이며 책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발견해 가는' 한 사람의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형용사 (uncommon)를 사용한 것은 말 그대로 주인공인 여왕이 우리처럼 평범하고 일반적이지 않는 독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독서에 대해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는 수많은 일반 독자들에 상대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읽기는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을 때 하면 좋은 취미이지만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유익하지만 그렇다고 다 가질 수 없는 수많은 취미활동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쩌다가 한 번씩 책을 읽어도 아쉬울 것이 없고 대신 잡지나 신문을 읽는 것으로도 만족하는 그런 '일반적인 독자'들과 구별하는 의미에서 독서가 매우 특별할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책에서 여왕도 원래는 그런 일반적인 독자들 중의 하나였다. 책을 읽는 데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예의상 책을 한 권 골라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이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일반적인 독자들처럼 여왕 역시 독서는 배타적이며 실천적이지 않은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번도 독서를, 책을 특별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지못해 고른 책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고른 책은 여왕의 마음에 들었다. 아니, 여왕은 그 책을 통해 책읽기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게 된다. 한 발 한 발 서투르게 옮긴 발걸음이 점차 확신에 가득 찬 당당한 발걸음으로 변하며 책 속의 세상으로 깊이 빠져 들어간다. 그렇게 책을 읽느라 여왕 역시 '현실의 부스럭거림'으로부터 조금씩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이 길잡이가 되어 여왕을 또 다른 책으로 이끌고, 여왕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문들이 계속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바라는 만큼 책을 읽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체험하기에 이르게 된다.

 

손바닥만한 크기에 138 페이지의 얇은 양장본의 이 귀여운 책-표지를 벗겨내면 살구빛 양장본 표지가 무척 사랑스럽다-은 매우 쉽게 읽히고 심각하거나 어려운 내용은 하나도 없지만 이 작은 책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특별한 위치에 있으며 특별한 삶을 살아 온 여왕이 왜 책 읽기에 사로잡혔을까? 

 

비록 특별한 점은 하나도 없고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 온 나이지만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답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별한 삶을 살아 왔던, 평범하거나 비루한 삶을 살아 왔던 사람은 누구나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말이다.

책이란 특별하지 않다. 책은 그저 책일뿐이고 책은 그 누구에게도 경의를 표하지 않고 독자는 누구나 평등하다. 그리고 책은 읽는 이의 삶과 경험을 넘지 못하다는 사실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책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우리의 본질을 찾기 위해 바로 우리 자신과 직접 대화하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  자신의 삶으로부터 정작 자기 자신이 소외되어 있음을, 자신이 자신의 삶 속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잉여'로 떠돌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성찰하고 비평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비록 실제의 여왕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소설 속에서의 여왕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책읽기를 통해 더이상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팔순 생일을 맞이해서 여왕은 "짐은 그것들이-여왕의 삶과 경험들-이 낭비되는 게 싫습니다." 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단언한다.

 

자, 그럼 여왕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특별한 삶과 경험을 낭비하지 않도록 할 것인가?

 

이야기 결말에서 드러난 여왕의 결심은 어떤 굉장한 사건은 하나도 없이, 그저 특별한 것 없는 동네 이웃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듯 이어진 이 책에서 유일한 반전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반전 덕분에 처음에 난 여왕이 말하는 본뜻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사실 이야기를 읽는 동안 독서가 여왕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주의깊에 살펴 보았다면

이미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결론이었는데도 말이다.  

비록 특별한 지위의 여왕이 아니지만 책을 읽고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우리의 삶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들' , 그리고 일반적인 독자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은 누구라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런데 그냥 우연이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이 책이 내게 준 감동과 즐거움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지금은 이 책을 만난 것이 내게는 무척 행운이었으며 운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직접 추천을 받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끼리 나누던 대화 중에 들려 온 책 제목을 기억하게 된 것은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끼리도 헷갈려할만큼 희한한 책 제목 때문이었다.

그때는 지구상에 건지섬이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기 때문에 건지라는 낯선 단어에다가 감자껍질 그리고 파이, 게다가 이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같은 북클럽이라는 단어까지 합쳐진, 정말 우스꽝스런 조합의 책제목이 정말 '이상하게' 들렸다. 그런데 이 이상한 제목 덕분에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책을 쉽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내겐 무척 다행한 일이긴 했다.

 

늘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이 넘치기 때문에 어느날 책을 주문하려고 컴퓨터앞에 앉아 있다가 그날 들었던 책 제목이 문득 생각났을 때만 해도 굳이 책을 주문해서 읽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무슨 내용의 책인지 궁금했을 뿐이어서 검색을 하고 출판사 서평을 읽어 보면서도 특별히 관심을 끌만한 내용은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특별한 기대는 없었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 골랐던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에서 예상치못했던 즐거움을 찾았던 후라 별 기대없이 즐겁고 부담없이 고른 책이, 또다시 기대하지못했던 놀라움을 선사할지 누가 알겠나 싶어서 구매목록에 추가를 했다.

 

책의 표지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데 몇장을 채 읽기도 전에 이 책만이 지닌 아주 특별한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고는 다시 흥분하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는 잠시라도 이 책을 손에서 놓는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을 읽는 동안 헌책방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책 속의 세계에서 난 정말 행복했다. 책안의 세계로 빠져 들면 빠져 들수록 내 주변의 현실세계는 점점 희미하게 멀어지고 책 속에서 펼쳐지는 세상이 마치 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하게 나를 휘감아 버렸었다. 비슷한 일이 이 책을 읽으면서도 벌어졌다. 다른 점은 상상 속에서 펼쳐진 이 가공의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인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 만큼이나 현실감있고 공감이 가는, 그러면서도 휠씬 더 매력적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 줄리엣을 따라 런던에서 아름다운 건지섬으로 함께 건너 갔고 건지섬의 자연 풍광과 소박한 사람들의 삶에 나도 그녀처럼 반하고 말았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폐허 속에서 상처를 치유하며 전쟁으로 잃어버렸던 삶을 되찾으려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과 그 마음도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순전히 등장인물들간에 오갔던 편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어떤 작품보다도 생생하게 그들 사이의 이야기가, 행간에 담긴 그들의 마음과 성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줄리엣과 엘리자베스는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 베넷이나 <작은 아씨들>의 조세핀, 그리고 <빨간 머리 앤>의 앤을 연상시키는 무척 매력적이고 총명한 인물들이었다.

 

전쟁 중에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이 건지섬과 그곳 주민들을 매개로 운명적인 인연을 갖게 되는 이야기의 주된 줄거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신중하고 사려깊은 남자 주인공 도시,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지만 다정다감하고 엉뚱한 이솔라, 따뜻한 마음의 모저리 부인, 애주가이며 낙천적인 존 부커, 줄리엣의 다소 냉소적이지만 이성적인 후원자 겸 친오빠와도 같은 시드니,이들을 포함한 모든 등장 인물들이- 천박하거나 못돼먹은 인물일지라도- 단지 편지글만으로도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감탄을 자아냈다.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들려 주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 주고 받는 편지글을 통해서도 부족함없이 그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충분히 머리속에 그려 보면서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즐거웠다.

 

책을 읽기 시작한 후로 어서 빨리 이야기 전체를 알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끝까지 읽은 후, 건지섬에서의 모두의 나름 행복한 삶을 확인한 후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나서 조금 더 세밀하게 이야기를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책을 읽었다. 물론 내가 특히 편애하는 인물들이 쓴 편지에 더 집중해서 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주는 감동과 즐거움이 처음에 비해 전혀 줄어 들지는 않았다.

 

전쟁의 고통과 참혹함을 말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게 쓰여진 이야기라 즐겁게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과 다소 동떨어지게 너무 낭만적이고 환상적으로 그려진 것 같다는, 그래서 한 편의 멋진 동화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 각자의 삶이 지닌 모든 면을 한 작품안에 다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 작품을 낳게 된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세상을 통해 감동을 받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작가과 작품에게 충분히 경의와 감사를 표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가 지닌 매력 중에서도 으뜸은 이 책이 책과 책을 읽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책을 매개로 한 이야기라는 점에 있었다. 출발은 위기를 벗어나려는 한 사람의 용기와 순발력있고 재치있는 대응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책을 읽느라 세상의 부스럭거림을 등질 수 있었다'고 한 <올드걸의 시집>의 작가의 말처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북클럽을 함께 한 사람들도 독일 점령 하의 불행한 시기를 그들 각자가 좋아하는 책들을 통해,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해 버텨낼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통해 독서에서 기쁨을 찾고 그 기쁨을 공유하고픈 그 마음 그대로 이 책을 좋아하는 누구와도 자신이 느낀 기쁨과 감동을 나우고 싶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 누구에게라도 '놀랍도록 감동적인 보기드문'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서 책이 지닌 마법의 힘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이 조금씩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느날 우연히 한 연극연출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연극계에서는 꽤 이름이 난 사람인 모양인데 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가 페르귄트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이 내겐 꽤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여러 번 페르귄트를 무대에 올렸는데 매번 그는 매우 현대적이며 독특한 무대 연출과 해석, 그리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늘 관객들의 눈을 사로 잡았다고 했다.

그리그의 음악곡 페르귄트가 입센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만든 작품이며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자 그 중 몇 곡을 추려 <페르귄트 모음곡>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입센이 쓴 희곡을 읽어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무엇이 그토록 이들을 매료시켰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그런데 정작 책을 읽으면서 내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희곡만이 지닌 특성이 생각보다 읽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소설과 달리 희곡은 말 그대로 연극을 전제로 한 작품이라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문이 있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지문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장면을 제시할 뿐  장면과 장면의 전환 사이에 있을법한 개연성있고 설득력있는 서술이나 묘사는 없었고 대부분 길고 환상적이며 장황하고 비현실적인 대사들분이었다. 이렇게 대사들만을 통해 이야기를 이해해야 했기때문에 나는 읽는 동안 매우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따라서 그 연출가가 감동했다는 장면이나 문장들이 내게는 그처럼 다가 오지 않았다. 기괴하고 난해하기만 했다. 다만 이처럼 작가가 말해 준 것이 거의 없으므로 순전히 연출가의 해석과 상상력으로 여백을 마음껏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이 연극 연출의 또다른 매력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배경을 어느 시기의 어디로 정하느냐, 배우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무대 장치를 하느냐에 따라 같은 작품을 얼마든지 다른 느낌, 다른 분위기로 만들어 낼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같은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친절한 도움없이' 순전히 내 경험과 상상력만으로 많은 부분을 채워가며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프루스트는 신문 단신 몇 줄로도 작품 하나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하는데 난 이 작품을 읽고 그 안에 담긴 미래지향적 요소를 찾아 내기는 커녕 별다른 감동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한 남자가 환상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 곳곳을 방랑하며 때로는 부와 명예에 ,때로는 쾌락에 자신을 던지다가 한 때는 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하면서 떠돌다가 결국은 늙고 병든 몸으로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 와 오랜 세월 동안 그를 기다려 온 여인 솔베이지에게서 비로소 구원과 안식을 얻는다는 이야기였다.

이 작품을 위대하고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 작품 안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이론적 논거를 반증하는 에피소드들이 많이 담겨 있고 상징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특성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페르귄트의 광기는 인간 삶이 계속되는 한 얼마든지 달리 해석될 수 있는 흥미진진한 테마라고 말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다양성들 중 페르귄트가 지닌 자기 분열적이고 모순된 면모, 공상과 기이한 사고에 이끌리는 어두운 면들이 분명 존재하는 한다는 점을 전제로 이런 인간의 모습을 입센이 탁월한 문체와 상상력으로 페르 귄트라는 인물로 형상화했다는 점을 나 역시 충분히 높게 평가한다.   

인간이 선악이나 옳고 그름, 쓸모있음과 쓸모없음과 같은 이분법적이고 편협한 사고로 재단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입센이 페르 귄트라는 인물을 통해 흥미롭게 우리 안의 어떤 모습을 포착해 내었다는 평가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아직 난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내게 무엇을 말해 주는지 종잡을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이 작품이 지닌 매력과 위대함을 나도 경험해 보고 싶다. 나만의 방식으로 입센이 창조해낸 페르귄트를 이해하고 싶다. 시간을 두고 조금 더 곱씹으며  이 책을 다시 읽어 본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