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 "

-  앙드레 모루아  

" 한 인간 삶의 가장 완벽한 재현" - 알랭 드 보통

 

언제, 어디서, 어떻게 촉발된 것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어느날 문득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과연 어떤 작품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이 지닌 가치와 명성으로부터 지금껏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으므로 저자와 책 제목 외에는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말이다. 작품에 대한 이 호기심이 일시적인 충동으로 그치고 말지, 정말 진지하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의 편'에 서게 될만큼의 애정으로 바뀔 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우선 도서관으로 가서 <한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빌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낡고 오래된 책이라 페이지 사이가 벌어져 떨어져 나갈 듯한 앞부분들을 정성껏 테이프로 붙인 후 읽었다. 그러다 이 책이 제목 그대로 방대한 양의 전권을 한권으로 추려 놓은 축약본 일뿐 아니라 오래전에 번역되어 매우 가독성이 떨어지는 판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이해하기 힘든 번역 어투와 씨름하면서 몇번을 다시 거슬러 읽어야 했던, 그 악명높은 잠자리 장면을 읽는 동안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끝까지 읽어 보고 싶다는 열정이 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른 판본을 검색하였고 민음사에서 새로 출간한 1,2권을 구입하고 알랭드 보통의 이 책도 함께 구입했다.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과 구판본 <프루스트를 좋아하시나요?>가 같은 책인 줄도 모르고 중고로 두 권을 다 주문했었는데 구입하기 전에 원제목을 확인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어처구니가 없는 실수여서 혼자 웃고 말았다. 

사실 몇 년 전에도 알랭 드 보통이라는 작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하 상태에서 <철학의 위안>을 구입하면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엉뚱한 제목의 책과 같은 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황당해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또 있을 줄이야.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읽게 된 알랭 드 보통의 이 책은 그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프루스트 사용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왜 책을 읽는가>의 저자 샤를 리치는 오래 전부터 여름휴가 때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조금씩 다시 읽는다고 한다. 그는 "훌륭한 작가란 사고하는 작가다. 프루스트처럼 유달리 밀도 있게 글을 쓰는 작가들의 글에 논평과 주해가 끝없이 이어지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이런 글만이 독자들의 너무나도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 라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알랭 드 보통의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읽는 프루스트 주해서이며 입문서인 셈이다.

 

알랭 드 보통이 소개하는 프루스트를 우리의 삶 속에서 활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

 

지구가 멸망한다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프루스트의 답변  "제 생각에는, 귀하가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죽음의 위협에 놓인다면, 삶이란 갑자기 우리에게 너무 훌륭해 보일 것 같습니다. ...... 그러나 우리가 오늘의 삶을 사랑하기위해 굳이 파국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당장 오늘밤에도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러기에 충분하리라고 봅니다. "

 

2.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

 

"현실에서 모든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 자신이 독자이다. 저자의 작품은 만약 그 책이 아니었으면 독자가 결코 혼자서는 경험하지 못했을 어떤 것을 스스로 식별하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시력보조 장치에 불과하다."

 

3.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

 

너무 빠르게 지나감으로써 놓치는 많은 것들을 찬찬히 시간여유를 두고 숙고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인식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이 세계는 휠씬 더 의미있고 흥미로워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점에서.

 

4.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프루스트가 겪었던 온갖 종류의 고통으로부터 그가 배운 것은 사람이 지혜를 얻는 방법 중, 선생님을 통해 고통 없이 얻는 것보다 삶을 통해 고통스럽게 얻는 것이 더 우월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혜는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 대신 수행해주지 않는 여행을 통해,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 면제해주지 않는 노력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고통을 피할 수는 없어도 다소 참을만한 현실로 인식하는데는 도움이 될 수도. 

 

5.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클리셰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자기만의 생각이 지닌 독특한 음색으로.

 

6.  좋은 친구가 되는 방법

 

진실과 애정 모두를 호전적으로 추구하는 대신, 양립불가능한 것을 식별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고 얻을 수 없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최대한 겸손하고 너그러워지라. 

 

7.  눈을 뜨는 방법

 

아름다움이란 수동적으로 마주치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능동적으로 발견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사물을 보다 완전하게 음미하려는 주의깊은 노력과 수고 없이는 우리자신의 세계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들을 영영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8.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완전한 음미, 바라보는 모든 것들을 다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깊이 숙고해 볼 것.

 

9.  책을 내려놓는 방법

    

독서는 우리를 정신생활에 소개시켜 준다. 그러나 독서 자체가 정신생활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프루스트가 우리를 이끌어 준대로 우리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아름다운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여행의 끝에 우린 우리만의 새로운 여행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 각자의 새로운 출발이 없다면 그저 프루스트의 우상숭배자로 헛되이 남을 뿐이다. 

 

철학자로서 알랭 드 보통은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소소한 고민거리들을 비롯해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현대인으로 하여금 점점 더 좋은 삶으로부타 멀어지게 만드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이르기까지 삶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고민해 오며 글을 쓰는 작가이다.

나는 <여행의 기술>과 <철학의 위안> 두 권의 책을 통해 무척 섬세하면서도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그의 통찰력과 사유, 세련되면서 현학적이고 정교한 문장들, 그리고 핵심을 명확하게 짚어 내는 설득력있는 그의 논리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 책에서도 그는 프루스트의 전기와 저술들을 폭넓게 인용하며 다각도에서 프루스트의 개인적인 삶과 작품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세련되고 깊이있게 풀어 놓았다. 덕분에 프루스트에 대해 알지 못했던 많은 부분들을 이 책을 읽는 것외에는 별다른 수고없이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나는 알랭 드 보통에게 빚을 진 셈이 되었다.

알랭 드 보통을 통해 만난 프루스트와 직접 그의 작품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될 프루스트, 그리고 그를 통해 내가 새롭게 눈 뜨게 될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거는 기대가 크다.

앙드레 모루아의 말처럼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 것 같다.

프루스트의 눈으로 본 나의 세계에서 지금보다는 삶을 좀 더 밀도있게, 음미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모든 것들을 제대로 인식하는 법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자신을 나름 독서가라고 생각해 온 사람이라면 이 책 제목에 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간혹 자칭 경험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은근하게 아니면 노골적으로 독서에 대한 편견이나 반감을 느껴 보았다면 더욱 이 책 제목에 대해 호기심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직접 부딪쳐 경험해 보지 않고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을 책 속의 세상에 숨어 진짜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소통이나 성취를 얻는데 실패한 어딘지 모르게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리곤 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신념이나 경험에 대해 단호하고 확고한 입장일수록, 사람들 앞에 나서서 시선의 중심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일수록 그들의 화려한 언변과 경험 앞에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할 말이 많지 않다. 사람들과 어울려 쇼핑하고 수다떨거나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기 보다는 혼자 조용히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손에 들 때야 비로소 쉼과 채움을 느낀다는 사실 외에는 내세울 것도 별로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난 왜 책을 읽는 것인가?

독서와 관련된 일련의 책들을 주욱 읽으면서 독서의 위대함과 놀라운 효능, 당위성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다. 사실 스스로에게 물어도 그때마다 답은 달라지고 모호해진다.

 

이 책의 저자, 샤를 단치는 프랑스의 작가이며 이름난 애서가이자 독서광이라고 한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알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이 작가에 대해 처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책 앞날개에 있던 저자에 대한 소개글 때문이었다. 저자는 적성에 맞지 않는 법대시절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법대는 내게 최고의 학과였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수 있었으므로" 라고.

여기서부터 그가 내 상식의 범위 내에서는 단번에 이해하기 쉽지 않을 꽤 괴짜에다가 신랄한 독설가이며 냉소가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각 장별 제목부터가 무척 도발적이다.

 

1. 낯선 사유로 단조로운 세상을 읽는다.

2. 독자는 벌거벗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작가들의 공모자다.

3. 책에서 조언을 구하지 말고 책 속의 보물을 훔치라

4. 독서는 죽음과 벌이는 결연한 전투다.

 

그리고 각 장마다 길면 대여섯 페이지, 아니면 1,2 페이지의 짤막한 글들이 대략 십여 편씩 묶여 있는데 대부분의 글들이 낯설고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읽고 나서도 좀처럼 무슨 이야기인지 감을 잘 잡을 수가 없았다. 두 번째 다시 읽으면서 그의 글들을 곱씹고 되짚어 본 후에야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그의 문체에 익숙해지기 시작해지고 그때부터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그의 글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독서란 그 범위가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기개발서이던 인문, 철학이던, 시나 소설, 에세이 등 구분이 없다. 그때 그때 독서의 흐름에 따라 앞서 읽은 책을 통해 다음 읽을 책이 정해졌고 그 흐름은 주제별이나 영역별 구분없이 나름의 개연성을 갖고 이 책에서 저 책으로, 한권의 책이 다시 여러 권의 책들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래서 저자에게 있어 '왜 읽는가?라는 질문은 '왜 문학을 읽는가?'에 갈음하며, 그가 구하고자 하는 답은 이 질문에 해당한다는 단서 조항을 별다른 의문없이 흘려 보내고 읽을 때는 이 책의 전체 맥락이 잘 와닿지 않았었다.

 

그에게 있어 지식이나 유용한 정보를 얻기 위한 독서는 논외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독서를 한다고 교양인이 되지는 않는다' 거나 '독서는 실용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라는 식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장들을 앞 뒤 맥락을 무시하고 따로 떼어내서 본다면, 한쪽으로 치우친 무척 편협한 주장으로 오해될 소지가 많다. 

저자의 대부분의 글이 이런 식의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실제로 처음에는 이런 식의 문장들 때문에 저자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무척 혼란스러웠다. 

'독서의 영향이란 어리석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제목의 글을 보면 저자는 읽었던 책을 다시 읽다가 전에 적어 놓았던 메모들을 보며 마음이 놓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고 말한다.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같은 문장에 줄을 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하면서 '독서는 우리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 어쩌면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겠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원래 비열한 인간은 라신을 읽는다 해도 비열한 인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가 교양이 없다면 교양을 두른 비열한 인간으로 바뀔지는 모르겠다. " 

 

하지만 그는 독서의 무용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신랄함은 문학을 도덕적 혹은 비도덕적이라는 잣대로 재단하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우리가 흔히 독서찬양론을 펼칠 때 쓰는 '삶을 변화시키는 독서의 위대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효율성의 잣대로 따지는 세상에서 책이 살아남기 위해, 문학 역시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이라는 굴레에 갇혀버린 현실에 대해 비판할 뿐이었다. 

 

마지막 장의 제목이 말해주듯, 샤를 단치에게 있어 독서란 비이성적인 행위이며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일이다. 많은 중요한 인물들이 독서보다 휠씬 더 중요한 일이 많다는 말을 한다해도 그는 그 말에 기꺼이 동의를 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명예나 돈과는 상관없이 계속 책을 읽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책읽기를 대체할 만한 그 무엇도 그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있어서 책은 결코 삶과 대립하지도 않고 위로하지도 않는다. 책은 그저 인생이다.

 

 "진지하고 난폭하지 않은 삶, 경박하지 않고 견고한 삶, 자긍심은 있되 자만하지 않는 삶, 최소한의 긍지와 소심함과 침묵과 후퇴로 어우러진 그런 삶이다. 그리고 책은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초연히 사유의 편에 선다."

 

저자는 독서가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독서의 본질적인 동기이자 유일한 이유는 바로 죽음과 당당히 결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전이 고전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바로 그 작품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곧 죽음인 망각을 넘어서서 지금까지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삼천 년 전 고대 이탈리아인 에트루리아의 문학을 예로 들며 책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고 모든 문학이 다 그럴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책은 위대한 것이고, 그 책을 읽는 더 위대한 독자들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음을 내비친다. 

 

 "독서는 아주 짧은 한순간이지만 죽음을 이긴다. 그리고 작가의 작품, 즉 책은 그보다 좀 더 오래 죽음을 이긴다."     

 

때로는 난해하고 신랄하게, 평범하고 순진한 독자들의 지적 허영과 환상, 자만심을 흔들어 깨우는 저자의 글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불친절하고 삐딱한 저자의 글에 불쾌해져서 책을 덮어 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 읽을 때와 달리 두 번째로 이 책을 읽을 때는 처음과도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가끔씩 내키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펴서 그의 길지 않는 글들을 읽다보면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관점에서 기존 사고의 틀을 뒤집어 엎는 그의 글들이 주는 유쾌함과 통쾌함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다.

저자의 지적처럼 지적 허영심이나 혼자만의 자부심도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책을 읽는 시간 자체가 주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도 명예도, 그 외 어떤 생산적인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데도 독서 그 자체의 즐거움 때문에 읽는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실용주의 사회에서 그 어떤 유용성이나 목적없이 그저 좋아서 책을 읽는다는 자체가 어쩐지 당당하기 보다는 현실감이 떨어진 소심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어떤 징표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스스로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저자가 말하듯 독서 자체의 위대함과 즐거움에 동참하는 '위대한 독자'의 대열에 기꺼이 합류하리라.

끝으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소개한다.

 

 

"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좀더 너그러운 사람이라면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독서는 가장 위대한 독서가만이 할 수 있을 뿐더러, 일단 세상과 자기자신에 대한 이해라는 기본적인 목적이 충족된 이후에야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

우리가 진짜 독서를 하는 진짜 이유는 책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위해서다. 책을 읽는다는 것만큼 이기적인 행위는 없을 것이다. " p.27

거대한 고독. 우선 책 제목에 이끌렸다. 게다가 표지의 그림이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다. 코가 유독 강조된, 각기 자신을 꼭 닮은 가면과도 같은 머리통을 두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토리노 하늘 아래의 두 고아 니체와 파베세" 라는 작은 글씨가 보였다.

니체, 내가 알고 있는 그 니체 말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그 니체, '신은 죽었다'의 그  니체?

호기심에 책을 펼치니 프랑스의 화가이자 작가인 프레데릭 파작이 그린 음울한 분위기의 그림들이 가득하다.  니체가 완전히 미쳐 버렸고 파베세가 죽음을 맞이한 도시 토리노에서 4년간 지내며 작가가 그린 300 장이 넘는 그림들이다. 책의 각 페이지의 대부분을 차지한 그림 아래에는 시처럼 간결하고 함축적인 글로 쓰여진, 매우 낯설고 이상한 책을 들고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니체, 파베세, 파작,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이름들 사이의 연관성을 알게 되고 작가가 말하는 어느날 우연히 그에게 다가 온 '신비한 끈'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끈이 이 낯설고 수상한 작가의 그림과 글을 읽는 동안 어느새 독자인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서문에서 '긴 몽상에 잠기듯' 이 책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작가의 그림과 글에 담긴 니체의 삶과 이탈리아의 이름난 작가 파베세의 삶은 쉽게 헤어나오기 힘든 암울한 몽상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이 니체와 파베세라는 인물의 공통점인 '우울과 고독, 나른하고 환락적이며 혹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불길한, 극단적인 고독주의자들'의 치유할 길없는 아픔에 대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완전히 그 암울하고 어두운 몽상에만 빠져들게 만들지는 않는다.

상실감에서 비롯된 우울이 우리 삶이 처한 실체를 거짓이나 환상에 가려지는 일 없이 환히 밝혀 준다는 점에서 불확실한 내일의 희망에 기대어 헛되이 하루를 버티어 가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똑바로 바라 볼 줄 아는 우울이 때론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저자는 이 우울이 드리운 어두움 속에 우리가 너무 깊게 빠져 드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그림과 글들은 번역자의 말처럼 잉크 대신 진한 커피의 진액으로 쓰여진 것처럼 뒷맛이 몹시 쓰고 우울하지만 모든 인물들의 모습은 기괴하고 우습다.   그림 속의 모든 인물들의 코가 길고 과장되게 그려져 있어 그가 표현하는 '거대한 고독'의 깊고 어두운 그림자에 침잠하려는 독자들을 어느 순간 어김없이 낚아채어 버린다.     

 

저자가 그러했듯이 독자들이 그의 책을 통해 니체와 파베세의 세계로 가는 길을 찾아가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의 삶을 탐험하기를 바라면서도 그들의 거대한 고독의 세계에 함몰되어 각자 자신만의 삶에서 길을 잃게 되는 것을 경계했는지도, 아니면 우리가 매우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이나 각자의 개성도 어느 면에서 보면 과장된 코처럼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저자의 그런 배려(?) 덕에 위대한 천재 철학가와 뛰어난 작가의 삶의 이면에 드리워져 있던 슬픔과 고독, 그리고 불행한 죽음이 주는 침울함에 너무 깊게 빠져 들지 않고도 그의 몽상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도시 토리노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삶이 교차하고 저자가 읽어낸 그 두사람의 공통점들을 알아가며 또한 저자가 사랑한 화가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 역시 저자처럼 니체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고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많은 작품들을 그렸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  저자가 '우연'이라고 말한 고리들이 저자를 포함한 네 사람들 사이를 교차하며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이 그저 단순한 몽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게 된다. 신비하고도 운명적인 끈!

책을 다 읽은 후 문득 우리에게도 우리가 아직 알아채지 못했지만 우리를 둘러싼 '신비한 끈'들이 이리저리 이어지고 돌아가며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우리는 우울한 몽상에 빠질만큼 충분히 여유있는 삶을 갖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든다.

 

저자는 이들 사이의 신비한 끈을 '스스로 짠 것도 아니고 팽팽하게 잡아 당신 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니체가 거닐고 파베세가 소설을 쓰던 토리노의 인적없는 어느 거리, 둥그런 언덕배기에서 우울에 몸을 맡기고 몽상에 잠겨 있다가 돌연 떠 오른 장엄한 문장, 단정한 시 한 구절, 흐느낌, 웃음 소리에서 비롯된 생각의 끈을 따라가며 그 어떤 주제나 방향도 없이 몽상에 잠기었고 그 몽상이 이 책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꾸었던 몽상에 함께 빠져 들었던 나도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하지만 니체가 궁금해 진다. 오래 전 '차라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지만 포기하고 말았었다. 이제 다시 시도를 한다면 니체의 사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생의 본능', '모든 가치의 첫 번째 전복', 디오니소스의 '보편적 조화의 복음', 그 어느 쪽의 '정치화'에도 잡히지 않았던 니체의 자유의 비밀에 대해 알 수 있을 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