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감상하는 일에 정답은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내 느낌을 말하고 전달하는 것에서 어떤 주류의 형식을 따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 편하게 소통하기보다는 불편한 침묵을 선택할 때가 있다. 그래서 유독 관련 서적으로 유명 화가의 작품을 앞에 두고 거기에 담긴 이야기들을 파헤치고 알려주는 책들이 많다. 거기서 조금 나아가 저자가 직접 작가를 만나 작품 의도에 대해 묻거나 어떤 식의 영감을 얻었는지 인터뷰하는 형식은 그림을 보는데 큰 이해를 돕는다. 그리고 이번 책은 앞선 책들처럼 그림을 말하지만‘이해’를 떠나서 화가가 그리게 된 생각들이 어떻게 발전하고 완성되는지 그 과정을 발자국 따르듯 풀어낸 책이다. 그림에 대해 말하지만, 그림을 보고 말하는 생각이 아니라 생각이 그림이 되는 과정을 듣고 상상해보는 것이 흥미롭게 구성된 책이다.

책의 저자인 전현선이라는 화가는 분명 자기만의 색깔이 확고한 사람이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은 아니다. 아마 작가의 나이를 봐도 아직은 발전할 가능성과 그려나갈 작품이 더 많은 잠재력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저자는 그림일기 같은 책을 써내며 자신 안에 잠재한 여러 기억과 생각들이 같은 사물을 앞에 두고 어떻게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사물에 대해 개인적인 기억과 생각들을 풀어낸 저자의 개성이 ‘화가’로서의 남다른 시각이 아니라,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갖고 사는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다가오는 점이 좋았다. 흔히 자신의 전문 분야를 얘기할 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반인과 전문인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작가가 내 또래라서 그런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와 같은 진정성이 느껴져 나와는 다른 생각과 취향이 재미있게 다가온다. 

 

그림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따뜻한 색감을 사용한 것과는 다르게 묘하게 다가오는 그림이 많다. 짙은 녹색을 위주로 정원이나 숲처럼 자연을 배경으로 그린 작품들이 많은데, 그 안에 등장하는 피사체들의 몸짓과 표정이 무표정인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른 데서 오는 느낌이 몽환적이다. 작가가 말하는 그림이 되기 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는데, 다음 장을 넘겨 작가의 그림을 마주하게 되면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왜 이런 형태와 색을 썼는지 궁금한 마음에 앞서 얘기한 의미와 느낌을 그림 속에서 찾으려고 노력해보지만, 그러기엔 누군가의 꿈속 장면을 보는 듯 전체적인 느낌과 이미지로서 더 강렬하게 다가와 그림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그림이 말하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작가가 한 사물로부터 영감을 받아 캔버스에 옮겨가는 과정 속에서도 처음 의도한 대로 모든 과정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순간순간에도 끊임없이 그것과 얘기하고 소통하며 그림이 스스로 모습을 바꿔가는 듯한 과정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화가에게 그림은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치 그림이 살아있는 듯 시시각각 변화하며 화가의 의도를 끌어낸 형태들이 긴장과 균형 속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나와 다른 생각이 이렇게 재미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표현한 생각들을 마주하니 조금 이상하고 엉뚱해 보여도 내 이야기 또한 누군가에게 즐겁게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나씩은 꼭 가지고 있으면 삶이 훨씬 풍성하고 다채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강하게 들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과정과 결과를 놓고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질문을 던지며 때로는 심각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그 둘을 구분 짓는 것보다

그 둘을 포함한 전체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가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과정이 곧 결과가 되고 결과가 하나의 과정이 되는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고 싶다. (155쪽)

 

 

저자에게 작업을 한다는 것은 ‘무심히 흘러가는 현재의 순간을 기록하고 담아두려는 시도’라고 한다. 하지만 그 현재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게 만드는 이유는 그 안에 강렬한 느낌과 기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나 이미지에 기분 좋은 느낌과 작은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분명 전에 경험했었던 것 같은데 마치 처음 상황을 마주하듯 생생한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최대한 구체적인 기억까지 적어가며 표현하려고 하지만 다음날 읽어보면 이게 내가 느낀 행복의 순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 느낌은 이미 잃어버리고 난 뒤다. 사진엔 내 감정이 배제되어 있고, 글 또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언어에 갇혀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현재의 생각을 현재의 방식으로 기록할 무언가로서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 정말 와 닿는 부분이었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 하지만 거기에 어떤 상징이나 은유, 시대성 같은 거창한 의미는 없다. 현재를 현재의 방식으로 표현한 그림은 의도하지 않아도 많은 부분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화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말을 해줄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자들도 알고자 하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그 시대의 화가가 그린 그림에서 얻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계절과 별을 바라본 사람들이 느끼는 미묘한 특징은 오직 동시대의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싶다.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명작도 좋지만, 이제는 이름은 몰라도 동시대를 살며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들의 그림을 보고 느낀 생각들을 내 이야기로 전환시켜보는 것도 그림을 마주하는 아주 즐거운 방법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