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라는 의식이 생길수록 좋고 싫고가 분명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늘 똑같은 커피나 색깔, 심지어 책마저도 자신이 좋아하는 책 종류만 읽고 그것과 다른 것들은 책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싫어하는 것과는 분명한 선을 그어두고 자신이 좋아하는 기호속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가장 크게 느낀 게 있다면 바로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어놓은 선이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좋아하는 책들의 종류가 분명히 있을테고 그 속에서 기쁨과 자기만족을 무의식중에 반복하며 행하고 있었다면, 번역가 김석희님이 20년동안 번역한 책들-여기서는 약 99편의 책이야기가 요약되어 번역가의 소개글로 나온다-에 대한 소개를 찬찬히 받아보며 그 한계를 분명히 알게된다.

1.사상의 모험

2.인간의 초상

3.역사와 문명

4.사랑과 예술

5.환상과 몽상

6.쥘 베른 컬렉션

7.인간과 동물

8.종교와 그 너머

9.일본 속의 한국인

 

이렇게 9가지의 주제하에 각각 99편의 소설과 역사서, 사회과학서, 미술가(고야), 종교서적, 인물론, 동물론 등등 저자가 번역의 대상으로 삼은 글들은 그 한계선이 무엇인지, 특별히 싫어하는 분야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방대하다.

 

특히 팔레스타인의 시각으로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얘기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년), 번역가가 저자의 치열한 정신과 그 심대한 사상과 감정 앞에서 연신 옷깃을 여미며 존경의 마음으로 번역에 힘했다는 훗타 요시에의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고야>라는 작품은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번역자로 하여금 이런 마음을 생기게 했는지 궁금함을 한껏 일으키게 한 작품으로 이들은 나중에 꼭 읽어봐야할 목록중 하나로 들어오게 되었다.

 

사실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면 특별한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생각이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편견이나 익숙함 혹은 개인적인 약간의 경험에 의지해 얼마나 왜곡되고 편향된 시선을 가지기 쉬운가.

 

굳이 베이컨의 종족의 우상이나 동굴의 우상이란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무런 검증없이 그냥 무심히 믿고 있던 고착화된 생각들은, 그것들을 다른 시선으로 봐야 될 사건이나 필요성을 특별히 느끼지 못하는 한 그냥 계속 끌고 가는 법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 둘씩 쌓여갈수록 자아라는 괴물은 점점 제 주위에 담장을 높이 쌓고 고여있는 물은 필연적으로 썩을 수 밖에 없듯이 점차점차 혼탁해질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요체는 비좁은 정신주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지 않은 대담한 영혼과 냉철한 합리적 정신에 있다. 여기에 입각한 정신과 육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조화,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르네상스의 여인들>-시오노 나나미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한동안 멈칫했었다. 언제가 지금 이 시대-21세기-를 중세의 암흑시대와 비슷하다고 한 회사원 철학자 강유원님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화폐의 가치로 전환되고 그 어느 시대보다도 하나의 이념이나  주의로 획일화 되어버린 메이저들을 위한 사회-솔직히 아직 강유원님의 글을 읽지 못한 내가 여기서 그분의 말씀을 옮긴다는 것은 꽤 위험스러운 일이지만, 21세기가 속칭 사상의 암흑기라고 얘기되어지는 중세시대로 바꾸어 볼수 있다는 말씀은 나도 줄곧 느끼고 있던 부분이라 조심스럽게 인용한다-속에서 우리들이 다시 한번 우상들을 걷어치우고 비좁은 껍데기 속에서 환한 밖의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의심하고 지우는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하고싶게 만든 책이 바로 이 책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