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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이후를 살아가는 칸트의 운명을 그린 <포스트모던 칸트>. 모던 칸트에서 포스트모던 칸트로의 변신에 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책이다. 현대 철학의 가장 대담하고 새로운 시도들이 칸트가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나가는 다양한 방식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한국칸트학회 기관지『칸트연구』의 특별호로, 16집 2호에 해당한다.

제1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철학적 실험 속에 숨겨진 칸트적 영감을 밝히고 있다. 제2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철학자들이 어떻게 나름의 방식으로 칸트와 연관되어 있는지 알아본다. 각 장을 소개하는 짧은 설명들을 각 장의 앞에 수록하였다.

칸트는 잊혀진 철학자 혹은 감탄할 만하지만 더 이상 현안이 되는 문제에 유효하지는 못한 철학자가 아니라, 어느 시대건 그 시대 사상의 쟁점들에 관해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동반자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 철학의 쟁점들과 칸트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는 작업은 늘 의미심장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국내에서 그간 고전 철학을 연구하는 전문 학자 집단은 현재적인 새로운 사상적 동향을 연구하고 평가하는 데 다소 소극적인 면이 있었다. 그 결과 ‘전문 학자 집단의 고전 연구’와 ‘대중적인 관심의 중심에 있는 현대 철학’은 서로 소통할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했다. 두 철학 사이에 만남이 있었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지 못한 채 서로간의 대립을 확인하는 데 그치고 말 뿐이었다.



이 책의 의의는 칸트라는 고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대표집단인 ‘한국칸트학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칸트의 적대자라 일컫는 포스트모던 철학과 마주쳤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마주침은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현대 철학에 대한 칸트의 우위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칸트는 시기 만료되었으며 현대의 포스트모던적 모험이 이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식으로 경솔하게 전개되지도 않았다. 이 마주침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사이의 표면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얼마나 칸트를 성실히 공부하고 창조적으로 소화해서 나름의 독창적인 이론으로 발전시켰는지를 발견하는 작업이었다. 또 이 마주침은 칸트라는 고전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하며 현대 철학의 다양한 입장들 모두를 포용할 만큼 품이 넓은지를 감탄 속에서 깨닫는 작업이었다.



고전의 골방에 유아독존 식으로 틀어박히지도 않고, 유행하는 사상의 급류에 경박하게 몸을 싣지도 않으면서, 칸트라는 고전과 현대 사상 사이에 오고간 수많은 거래의 실타래를 찬찬히 풀어보자는 것이 애초에 이 책의 기획 단계부터 품어온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획은, 칸트 철학에 대한 탄탄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칸트와 비교되는 현대철학자에 대한 전문가이기도 한 필자들이 없었다면 실현 불가능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두 칸트의 제자들?



푸코, 들뢰즈, 리오타르, 레비나스, 라캉……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철학자들이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는 이 철학자들이 실은, 모더니즘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칸트의 제자들이라면 어떨까? 흔한 철학사적 구획 짓기에 따르자면, 칸트야말로 포스트모던 철학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하는 천적이다. 이 책은 이러한 속견에 도전한다.



지금껏 표면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은 칸트를 스승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사실 많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칸트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하며 학자로서의 기량을 닦아나갔다. 몇 가지 저작들만 예로 들어보자.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20세기 버전이라 할, 푸코의 또 다른 「계몽이란 무엇인가?」는 유명하다. 그런데 이 유명한 글을 쓰기 훨씬 이전부터 푸코는 칸트 학자였다. 그의 박사 학위 부논문은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의 프랑스어 번역과 그에 대한 해설이었다. 이 해설은 뒤에 그의 주저 『말과 사물』에 포함된다. 들뢰즈 또한 칸트의 삼비판(『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의 체계적 연관성을 해명한 『칸트의 비판철학』을 써냈으며, 칸트로부터 자신의 ‘생산으로서의 욕망’ 개념과 ‘분열증’ 개념의 선구적 모습을 발견한다. 리오타르의 연구 목록에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떠난 적이 없는데, 이 연구는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와 『분쟁』이라는 책으로 표현되었다.



통일성, 체계성, 이성과 진보에 대한 낙관적 비전 등등 모더니즘의 이념에 대한 불신을 특성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여전히 칸트의 서가를 뒤지며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모던 칸트’의 시대가 아니라, ‘포스트모던 칸트’의 시대?



이러한 칸트에 대한 연구 활동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라 불리는 일군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칸트에 대한 창조적인 독해를 시도했으며, 그로부터 얻은 영감으로부터 자기 철학을 일구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한다. 가령 타자성과 환대의 발견자로서, 데리다와 블랑쇼 철학의 영감의 원천인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로부터 칸트의 정언명법을 듣는다(1부 3장, 강영안). 푸코는 칸트의 ‘계몽’과 ‘비판’ 개념을 숙고하며, 지식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비판을 기획한다(1부 6장, 양운덕). 『판단력 비판』으로부터 태어난 두 아들인 리오타르와 들뢰즈는 각각 칸트의 숭고 이론에 뿌리를 두는 ‘분쟁’ 개념을 통해 모더니즘 이후의 세계를 그려나가고(1부 4장, 최소인), 또 숭고로부터 새로운 감성론, 즉 ‘선험적 종합’을 ‘경험적 종합’으로 대체하는 ‘초월적 경험론’을 꾸며나간다(1부 5장, 서동욱). 라캉은 칸트와 사드를 함께 읽으며, 정언명법에 대한 성찰로부터 정신분석의 윤리를 해명하려 한다(1부 2장, 맹정현). 한마디로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한 포스트모던 철학은, 만일 칸트가 20세기까지 살면서 자기 사상을 전개시켰다면 도달했을지도 모를 형태, 칸트의 20세기적 변신인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칸트’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두 항의 관계만을 고려하는 제한된 시계(視界) 안에 머물지는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에 있는 철학자, 포스트모더니즘과 논쟁을 벌이며 맞서고 있는 철학자, 포스트모더니즘의 바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에 양분을 공급해 온 철학자 등등의 그룹과 칸트와의 관계 또한 규명하고 있다. 푸코와 데리다의 스승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적 기원에 자리한 철학자는 바로 하이데거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칸트의 상상력에 관한 논의에 자신의 존재 사유의 한편을 갖다대고 있다. 이 책은 포스트모던 철학의 진원지로서 하이데거가 어떤 의미에서 칸트적 자장(磁場) 속에 들어 있는지 해명한다(1부 1장, 피터 하). 아울러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가 포스트모던 철학과 논쟁을 벌일 때 어떻게 칸트의 영감을 사용하는지(2부 9장, 박구용), 아도르노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아니나 포스트모던과 여러 친근성을 보이며 간접적으로 포스트모던 철학에 영향을 준 사상가의 핵심에는 어떤 모습의 칸트가 들어있는지(2부 1장, 노성숙), 아렌트(2부 8장, 김석수)나 로티(2부 10장, 김영건)처럼 포스트모던의 주변에서 독자적인 지분을 가지게 된 철학은 칸트와 어떤 긴장 관계 속에 있는지를 밝힌다. 요컨대 포스트모던 철학 및 그를 둘러싸고 만들어진 주요 철학적 담론들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칸트의 모습을 가능한 한 폭넓게 조망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서문: 그레고어 칸트와 그의 벌레 변신
일러두기

[제1부] 칸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
제1장 칸트, 하이데거, 포스트모더니즘: '바깥의 사유에 대한 고찰_ 피터 하
제2장 칸트와 라캉: 칸트와 정신분석의 윤리_ 맹정현
제3장 칸트와 레비나스: '포스트모던 칸트'로서의 레비나스_ 강영안
제4장 칸트와 리오타르: 칸트적인, 그러나 너무나 비칸트적인_ 최소인
제5장 칸트와 들뢰즈: 선험적 종합에서 경험적 종합을_ 서동욱
제6장 칸트와 푸코: 푸코의 칸트 읽기_ 양운덕

[제2부] 칸트,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변
제7장 칸트와 아도르노: 아도르노의 모더니티 극복과 칸트의 유산_ 노성숙
제8장 칸트와 아렌트: 칸트와 아렌트,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_ 김석수
제9장 칸트와 하버마스: 이성의 기획과 다원주의_박구용
제10장 칸트와 로티: 중후한 소여와 경박한 구성_ 김영건

찾아보기_ 용어ㆍ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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