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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구체관절인형 제작자인 정양희가 이끄는 창작인형집단 Pandora 그룹의 창작인형집이다. Pandora 그룹의 37인이 제작한 다양한 구체관절인형 작품들의 사진들을 수록하였다. 또한 정양희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문예비평가 이찬규의 글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작가 정양희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구체관절인형’ 제작자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피그말리온 인형학교에 수학하여 구체관절인형 제작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배우기도 한 작가는 ‘국내 최초의 창작인형집 작품집’인 (다빈치기프트 펴냄)을 펴낸 바 있다. 정양희가 이끄는 창작인형집단 Pandora 그룹이 창작인형집 를 펴냈다. - <정양희의 작품 세계> 이찬규(문예비평가) “인형처럼 예쁘구나! 깨물어줄까?”라는 관습적 표현은 인간과 비인간이 교차하는 정양희의 구체관절인형들 앞에서 와해된다. 그녀가 만든 10살 남짓의 소녀 인형은 이상한 약들을 오랫동안 복용했을 눈빛으로 다리까지 한껏 벌리고 있기에 우리의 살아있는 소녀들이 그것을 품에 안고 거리를 활보하기에는 꽤나 거북살스러울 것 같다. 성년으로 자란 160 센티미터 가량의 여자 인형도 마찬가지여서, 한번 품에 품어 시멘트 바닥에서라도 짐짓 함께 누워보고 싶지만, 만삭으로 부풀어 오른 배가 그런 짓을 방해한다. 더구나 그 모습 속에 황달기가 만연해서 임신중독증과 같은 질병이 매우 심각해 보이는 임산부 인형이다. 수많은 여자 인형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남자 인형은 목과 손목이 밧줄로 칭칭 감겨져 공중에서 사형수처럼 흔들거리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정양희의 작품들은 쓸데가 없다. 왜냐하면 품에 안고 거리를 활보 할 수도, 으슥한 방 안에서 같이 뒹굴 수도, 거실에 손님들 보라고 걸어 놓을 수도 없는 것들이다. 요컨대 작가의 몇몇 구체관절 인형들은 인간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따라서 한없이 낯설다. 사실 그런 목적 없는 물건을 본 것이 언제였던가? 매년 천연기념물도 수 십 종씩 멸종되어가고 있듯이 자연 조차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면 끝내 사라지는 시대에, 너무도 인간을 닮았으나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그녀의 작품들은 가히 포스트모던적이거나 그 보다 더 수상쩍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의 작품 하나를 슬며시 ‘입양’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방금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으나 인간을 위한 목적 아닌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컴퓨터, 불빛, 꽃, 책상....... 그 위에 인간에게 낯선 것 하나 문득 올려놓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한 사람의 엑스터시가 다른 한 사람의 희생을 딛고 생겨난다면, 정양희의 작품 속에서도 일종의 위반적 에로티시즘이 발견되는데 그것 또한 인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온전히 ‘인형의 것’으로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렇게 정양희의 인형들은 ‘실재’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가공可恐할 작품들 속에서 감지되는 정신적 외상인 트라우마나 프로이트의 언캐니the uncanny 같은 것을 개떼같이 물고 늘어지며 거대 담론 쪽으로 기우는 것이 해설적 도리이기는 하나, 정양희의 작품들 앞에서는 오래 전부터 애송해 왔던 시 한편이 먼저 입 속에서 달싹거린다. 젊은 나이로 아깝게 요절한 이연주의 <얕은 무의식의 꿈>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 으으, 어머니, 유리창에, 내, 얼굴이, 눈이, 무서워요, 내 손이, 웬일인지, 조금씩, 움직여요, 아, 나는 가만있는데, 손이, 움직여요, 문고리를, 열잖아요, 개떼가, 아, 몰려오는, 구둣발 소리, 그들은, 겁탈할거예요, 그들은 짓이길 거예요, 어디, 먼데로, 도망쳐요, 어머니, 어디 계세요, 나도 모르게, 그들과, 내가, 아, 난 싫어요, 뭐라구요, 이제는, 살아 있는게, 죄라니요, 도망칠 수, 없다니요, 그럼, 나는, 아으!”...... 정양희의 구체관절인형들은 “자신은 가만있는데도 손이 조금씩 움직여지는” 그 악랄한 경험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성적 주체성이 억압하거나 밀어낸 여성적 신체들과 그 모성적 힘을 다시 갈무리하고 (특히 <인연>이라는 작품을 보라), 죽음을 담보로 해서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혼융하는 그 인류적 경험까지도 일깨운다. 구체관절인형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초현실주의 작가 한스 벨머Hans Bellmer의 작품들을 들여다보자면 구체관절인형의 태생적 특성이 끊임없는 괴기스러움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형이란 대상 자체가 “거세와 죽음에 대한 유아기의 불안”을 은닉하고 있다고 하였지만, 그러한 괴기스런 성향은 무엇보다도 극단적인 대립물들을 억지로 함께 붙여 놓으면서 나타난다. 일테면 벨머의 작품 중 하나는 상체가 없고 두 개의 벌거벗은 여성의 하체들만이 맞붙어 있음으로서, 가부장적 문명사 속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여성에 대한 욕망과 공포라는 심리적 이중의식을 투사한다. 정양희의 작품 세계도 일단 그와 같은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는 않는다. 가령 그녀의 <에고이스트>라는 인형은 성욕을 자극시키는 풍만한 가슴과 절단된 다리를 지닌 불구적 하체를 대립적으로 붙여 놓은 작품이다. 아니면 G. 바타이유의 역설대로 절단된 신체 앞에서 느끼는 공포감은 성욕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에로틱한 환희”를 가동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인가? 작가가 이러한 자신의 작품들을 마치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듯이 우리나라에서 그리 흔치 않은 지하地下 갤러리를 전시장으로 계속 선호하는 것도 재미있다. 하지만 그녀의 구체관절인형들은 초현실주의에서 표방하고 있는 환상이나 무의식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그 어디에선가 필경 한번은 만난 듯한 모습들을 내장하고 있다. 눈빛이 풀린 10살 남짓의 소녀도, 배가 부풀어 오른 누런 여인도, 그리고 “서커스단의 어린 여자 광대” 인형들까지, 마치 어느 먼 곳에서 간신히 돌아온 누이와 이모처럼 통절한 인연의 느낌을 우리에게 안겨주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채 목에 밧줄이 걸려있는 남성 인형 (“아레스”)도 여성의 불행과 핍박에 대한 단죄를 받는 듯도 하지만, 그런 통절한 느낌에서 예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얼굴의 표정이 한 식솔들을 겨우 이끌고 가면서 조로해가는 가장家長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자 한스 벨머의 작품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기괴함이라면, 그리고 좀 더 좋게 말해서 기괴함이 뿜어내는 어떤 숭고함이라면, 벨머나 1980년대 일본의 인형작가 요츠야 시몬의 작품 속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통절함이다. 따라서 인형의 구체관절들마다 깃들여 있는 이 통절함은 정양희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