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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향원 시인의 작품은 맑고 투명하다.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이미지들이 맑은 영혼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이런 맑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신향원 시인의 삶의 행로를 알고 있는 분은 쉽게 짐작 가는 답은 정해져 있다. 오랜 시간 꽃꽂이를 해왔고 드디어 명장의 반열에 들기까지 오로지 꽃을 보고 꽃만 생각하고 꽃과 더불어 살아왔기에 그런 것같다. 신향원 시인의 작품은 편편이 모두 한 송이 꽃과 같다. 수반에 여러 가지 꽃을 조화롭게 꽂듯 시 속에 맑은 영혼을 이입시킨다. 꽃이 뿜어내는 아우라와 향기 속에서 사악한 기운은 함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찰 행사에 꽃꽂이 공양을 다니면서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고 믿음도 돈독해 보인다. 신향원 시인에게 꽃은 자식과 같은 소중한 대상이다. 평생 꽃꽂이 활동을 통해 꽃에 대한 신뢰와 꽃이 지닌 의미들을 다듬어 왔다. 꽃은 아름다움으로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기쁨과 행복을 전한다. 꽃의 아름다움을 통해 사랑을 전하고 기쁨을 주는 것과 같이 시를 통해서도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 줄 줄 안다. 꽃을 보듯 시를 대하면 신향원 시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시집 명이 『꽃길을 간다』로 정해졌을 때 시인이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꽃도 꽃이지만 진리의 꽃을 찾아가는 마음이 늘 간절합니다’라는 짧은 내용이었다. 이 메시지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우선 작품을 자신이 행하고 있는 꽃꽂이의 꽃으로만 보지 말고 자신의 구도자적 삶에 대한 의미도 함께 읽어 달라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 메시지를 받기 전에 신향원 시인의 작품을 맑고 투명하다는 인상을 받았기에 신향원 시인의 작품에서 발견한 테제가 꽃과 사찰이었다. 이 글은 이런 두 테제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위 작품도 구도자의 길을 가는 화자의 고된 수행의 길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화자는 제 3자가 아닌 시인 자신으로 보는 것이 옳다. 목련꽃향기는 바로 부처님의 설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속내를 짐작만 할 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목련꽃일 수 있다.

내 지나온 봄은
여름날 핀 꽃과 같아
문득 시들고

하늘에
가슴을 대고
바위에 등을 붙이면

내 가진 노을은
번지는 불길 같아
순간 목전에 와있다

헛된 몸짓
매달리는 티끌
지나간 바람의 얼룩

그 토굴에서
홀연히 벗어나고파

-「그 토굴에서」전문

토굴은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는 작은 암자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을 토굴에서 수행하는 수행자쯤으로 드러낸다. 지나온 과거를 회상해 보니 젊은 날이 시들어 떨어진 꽃과 같고 바위에 등 붙이고 하늘을 바라보니 내 가진 노을은 번지는 불길 같이 눈앞에 와있다. 지금껏 네가 매달려 왔던 것은 티끌이었으며 세상을 혹은 나를 알기 위해 했던 여러 몸짓들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지나간 것은 바람이 남긴 얼룩과 같은 허무한 것들뿐이다. 그런 허무에서 홀연히 벗어나고 싶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 작품은 불교가 지닌 허무주의에 기대고 있다. 공空의 사상, 혹은 무無의 사상과 접속되어 반야경에 설해진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며 얽매이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닿아있다. 신향원 시인은 이처럼 불교적 소재를 차용하여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시로 형상화 시킨다. 시에 등장하는사찰로는 본해암, 금어사, 향일암, 봉정암, 적멸보궁, 불암사, 통도사, 노전암, 미명의 산사, 청정도량 등이 있고그 외 불교적 소재로는 목탁소리, 풍경소리, 독경, 정토, 염화실 등이 보인다. 그러나 이들 재료들은 지접적으로 불교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무대 배경쯤으로 이해 된다. 불교를 말하고 있지만 종교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두고 향불 향기만 내보내며 ‘불교가 여기 있소’ 하며 독자들의 구미를 끌어 당긴다. 그러기에 거부감 없이 불교가 지닌 정서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게 된다. 그런 점을 신향원 시인은 염두에 두지는 않겠지만 가랑비에 젖는 옷처럼 독자들의 영혼에 스며들고 있다. 그것은 시가 정서로 말하는 경전이 된다는 의미다

목차 4
자서 3

제 1 부

붉게 솟아오른 상사화…11
백도라지…12
아침밥 그릇에는…13
노을진 바다…14
우편배달부 가방…15
내안의 나를 개운다…16
낮달…17
서포 초옥…18
붉은 행렬의 빈자리…19
나를 보다…20
길 찾는 소녀…22
길 위에 내린 갈잎들…23
아침 산책…24
꽃길을 간다…25
구월이 온다…26
구름 한 입 베어 물고…27
고독한 석등…28
아침은 달다…29
거꾸로 매달린 능소화…30

제 2 부

개똥밭에 민들레…33
간절한 눈빛…34
거리 두기…35
흔적에 빠지다…36
마음의 향기…37
횟집에서…38
바람 속으로…39
벼 익는 들녘…40
물안개 다리…41
태풍이 남긴 여운…42
몰운대 솔밭에 앉아…43
무궁화꽃…44
봉정암 가는 길…45
이끼…46
이슬 안개 속에서…47
영축산 노을 앞에서…48
영시에 떠난 강물…49
밤새 다문 입술…50
바람이 남긴 편지…52
소원 담은 꽃…53
엽록에 물든 동백섬…54

제 3 부

눈물 멍든 바람…57
호수의 노래방…58
조막손 사랑…60
첫눈에 젖으며…61
월요일 아침이 오면…62
이슬에 몸을 씻고…64
시계를 보며 거울을 안다…65
숲속 다홍치마…66
붉은 토마토…67
연심 소국…68
소리없이 왔다 가는 길…69
다시 등불을 켜다…70
세월을 엮은 산자락…71
날아간 새…72
하얀 눈물…74
홀연히 벗어나고파…75
꽃잎 베어 물고…76
통점이 남긴 길…77
앵무새 가는 길…78

제 4 부

낙서를 하다…81
들차를 마시며…82
푸른 선혈 흰 발자국…84
여름 소낙비…85
내 안의 다른 너…86
붉은 가사…88
그대 이름 옆지기라…89
구멍난 나뭇잎 사이로…90
그늘에 누워…91
그 토굴에서…92
침묵이 피운 꽃…93
산도랑 물고기…94
담쟁이…96
휴일 잔상…97
불음佛音폭포…98
젖은 바닥에 서서…100
호수가에 앉아 부르는 노래…101
봄은 다시 오리라…102
흐드러진 벌판에…104
푸른 낙엽의 상처…105
태초의 저 푸른 향기를…106
해설/꽃과 함께 화엄…112

붉게 솟아오른 상사화


붉은 옷을 입고
서쪽을 향해 목을 길게
빼 올린 여신

가을빛에 말 잃은
신부가 되어
꽃길을 행진하는데

심술바람 시샘하여
흔들리는 마음 갈피 못 잡아
야위어 가는 꽃

산 아래 비탈길
붉게 물들이며
오랜 길 한눈 팔지않고
가슴에 불지핀 꽃이여

허공 속 높이
붉은 깃발 올린 탑이어라


백 도라지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하늘을 보니
비늘구름이 장막을 친다

흩어진 비늘 한조각
산정에 노닐고 쉬지 못한
목소리는 울음을 가둔다

목 길게 뺀 얼굴은
젖은 바람결에도
곱게 다문 미소로 답하고

백중 참회의
하얀 별이 되어 눈물이
벌거숭이로 풀밭을 거닌다


아침밥 그릇에는


하얀 억새 바람에
수만 년 불꽃을 문질러
새별오름을 오른다

산정에 올라
펄럭이는 억새 등에 기대어
불꽃을 누르는 소리
산까치 날개를 펴고

셋 다섯 모인
연인들의 볼에는
엷은 볼우물 패이고
하얀 치아에 은빛억새 수를 놓는다

해 저문 오름을 담은
본해암에는 달이 뜨고
밥그릇에는 오채를 구부린 덕이 담긴다


노을진 바다


목마름에
울고 있는 갈매기
백사장을 두리번거려

지난 여름 찍어 놓은
발자국에 눈물은 얼음되고
생각은 모래톱에 눕는다

화려한 석양
여운이 가시지 않은 노을
아직 상처로 남아

출렁이는 물결
하얀 파도 펄럭이며
단색의 허물을 벗긴다


우편배달부 가방


차가운 어둠을 지나
숲속에 숨어 핀 생강나무
언땅에 불을 지피고 몸을 사른다

싸락눈 덮여도
바람에 미소지으며
산기슭에 불을 옮기고

꿈틀대는 흙속에서
뿌리로 몸을 달궈
노란 밀어를 토한다

봄길 넘어오는 골짜기에
꽃가루 흩뿌리는
우편배달부 가방은 연꽃이다


내 안의 나를 깨운다


산정 햇살이
수줍게 다가와
이마에 꽃을 그리고

그리움은
창가에 기대
등을 토닥인다

낮은 곳에서
흔들리는 풀꽃들
분홍 미소를 적시고

물빛 하늘
구름 뒤 숨은 햇살
내 안의 나를 깨운다


낮달


하늘 더듬다가 만 영혼
햇살 파헤치다 만 살점

가는 길마다 서성이다
상처 난 흉터
정수리로 스며드는 갈증

고요한 바다로
해를 찾으러 간 낮달은
바다가 게워내는 물살에

동공만 일렁이다
집 없는 몸
바다 깊이 수장하고 만다


서포 초옥


해풍에 떠밀리는 백파
부서지며 노도를 떠도는
늘 푸른 남해바다

선홍빛 동백꽃 이파리
노을빛에 떨어져 침묵하고
물비늘 광대한 수를 놓는다

물가에 흐르는 유배
어머님에 몸부림치던
서포는 눈물로 먹을 갈아
한숨의 붓끝으로 획을 녹여낸다

허물어진 담벼락에
손금을 그려가는 담쟁이
전설 위 검푸른 갈잎
노을에 누운 초옥 옛터에
아침 햇살이 걸어온다


붉은 행렬의 빈자리


기억 저편에 폐궁이있다
서라벌 발자취를 따라가면
하얀 눈썹이 다리를 걷는다

즐비하게 늘어선
붉은 행렬의 빈자리
다시 못 올 흔적 흙담에 기대고

만상에 법향 입히며 지나던
원효대사 옛길 월정교
사바하 차향 용머리를 휘감는다

속 패인 분홍 연꽃
요석궁 상차림 앞에
한마음 한 생각이 일어나니

물그림자 밟고
한갓지게 노니는 물오리
텅 빈 연못에 날개를 적신다


나를 보다


너를 보며 나를 본다
풀잎에 구르는 이슬
꽃잎에 피어나는 향기

살 맞대고 오는
청 메아리 소리
들어주고 지켜보는 알맹이여

수시로 드나들고
거듭나는 껍질이여
수연을 돌아온 윤회의 뒤안길에서

무르익어 술이 되고
잔이 되어 함께한 날들
비틀거리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너를 볼 때
그림자 없는 손으로 너를 붙잡고

하얀 눈길에
다시 백련으로
피어나는 너는 진정 나의
무슨 그림자였는지를 알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