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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외곽주의자’ 검사가 바라본 진실 너머의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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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람을 의심하고 판단하는 데
인간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이 얼마나 들어가 있을까”

피해자·민원인·피고인·증인…
이름만 달리하여 출몰하는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에게
생의 한 귀퉁이를 내어주는 어느 검사의 이야기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은 현재 대구지방검찰청 서부지청 부부장으로 재직 중인 16년 차 여성 검사 정명원이 쓴 첫 책이다. 저자는 검사라는 직업이 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차갑고 공격적이고 조직 논리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실상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는 검사들은 특수부·공안부 검사 들일 뿐이며 이들은 대한민국 전체 검사 중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나머지 90%인 형사부·공판부 소속의, 야근 많고 재판 도중 울기도 하고 민원인과 좌충우돌하기도 하는 ‘비주류’이자 ‘회사원’ 검사들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세상이 지향해야 할 완전무결함이나, 거악 척결 등 거대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늘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검찰청 한 귀퉁이에 기록으로 실려 오는 수많은 인간 군상과, 때론 ‘웃프고’ 때론 애잔하게 저자를 심적으로 괴롭히고 보람을 느끼게 했던 사연들을 이 책에 담았다. 저자가 직접 만난 사람들에게는 유죄·무죄를 넘어 회색지대가 존재했으며, 공소장에는 다 담지 못하는 이야기가 그득하게 남았다. 재판 도중 사라진 피고인, 상복을 입고 검찰청을 방문한 사기 피해자들, 법정에서 갑자기 자신의 범행을 고백한 증인 등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의 못다 한 이야기가 여러 편의 드라마를 보듯 전개된다. 저자는 정량의 범죄 너머 부정량까지 이 책에 모두 담고자 했다.

“살고, 사랑하고, 속이고, 일하고, 다투고, 찌르고, 외면하고, 울고, 탓하고, 쾌락하고, 절망하고, 그러고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밀려왔지. 기록으로 인쇄되어 오는 삶들을 가르고 계량해서 그에 적합한 이름표를 붙여주는 일은 언제나 버거운 것이었어. 하물며 그것을 직업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일이란 늘 고단하고도 두려운 것일 수밖에.”_8쪽

출판사 서평

“내가 내어놓은 법률 서비스가
간혹 누군가에게 한 그릇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소보다 불기소를 잘하는
‘외곽주의자’ 검사의 기쁨과 슬픔

저자는 뜨겁고 뭉클한 삶의 결들을 세상에서 가장 간결한 문체로 공소장에 옮기는 것이 검사의 일이지만, 아무리 무심하고 ‘시크한’ 명조체로 쓴다 하더라도 검사의 삶이란 늘 어느 정도 울렁거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소보다 불기소를 잘하는 검사’가 되었다. 불기소장을 쓰는 일은 기소장을 쓰는 일만큼 검사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이지만, 검사로서의 실적을 평가받는 데는 불리했다. 또한 특수부나 공안부를 지향하지 않는 검사는 의욕이 없는 자, 검사 일에 대한 애착이 없는 자로 평가될 뿐이었다. 이로 인해 저자는 ‘이런 내가 검사여도 괜찮은 걸까’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한 방황과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10년 차 검사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세상이 설정한 중심으로 모두가 달려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루저’라고 부른다 하더라도, 저자는 조금 축축하고 그늘진 외곽의 자리에 ‘이끼’와 같은 존재가 되기로 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작은 생물들의 그늘이 되어주는 이끼처럼, 형사 법정에서 펼쳐내는 생의 비극적 단면에 함께 공감하고 진동하는 누군가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의 외곽 형태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외곽주의자에게 이제 그런 류의 이름 붙이기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중심의 질서가 우리를 루저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별 상관없다. 외곽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 어떤 취향에 가깝다. 중심을 거부하겠다는 높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체질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복잡한 곳, 핫한 곳, 관심이 집중되는 곳, 가장 높고 가장 비싼 곳이 좀 불편할 뿐이다. 그 불편함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겠다는 다소간의 고집이 외곽주의의 실체다._272~273쪽

“울보검사·엄마검사·지방검사·비주류검사…”

평범한 직장인들의 리얼하고, 슬기로운 검사생활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에서는 대한민국 검사의 90%인 평범한 ‘직장인’ 검사들의 리얼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피해자의 사연에 감정이입되어 재판 때마다 우는 검사의 이야기, 곱창집에서 회식을 하다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논하는 검사들만의 진지한 농담, 재판장에서 ‘딥 블루 레이디(새파랗게 젊은 X)’ 소리를 들은 젊은 여성 검사의 에피소드 등 검찰청에서의 평범하지만 색다른 하루하루를 엿볼 수 있다.
2부에서는 저자를 찾아온 수많은 피해자·민원인·피고인·증인 등 이름만 바뀌어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의 사연들이 등장한다. 주거침입죄로 잡혀온 남자가 ‘장 트러블’로 화장실을 가려고 한 것이라 주장하며 혐의를 부인한 사연, 매주 검사를 찾아와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으라고 민원을 하는 어느 영감님의 이야기, 사랑하는 연인이 어느 사건의 피고인과 증인으로 함께 법정에 섰다가, 갑자기 증인이 자기가 범죄를 저질렀다며 재판을 뒤엎은 사건 등 저자는 자신을 찾아오는 상처 입은 이들에게 한 그릇의 위로를 건넨다.
3부에서는 슬기로운 검사생활을 위한 검사들의 필수 아이템인 보자기·캐비닛에 관한 소개부터 검사들의 ‘석순 문화’에서 비롯된 일상 속 코믹한 일화들이 등장한다. 저자가 정의하는 ‘검사의 적성’, 여성검사·엄마검사로서의 삶, 조금은 폐쇄적인 검사 세계에서 ‘소심한 자유주의자’를 꿈꾸며 만들어놓은 저자만의 법칙, ‘그냥 인간’이 ‘검사 인간’으로 변이하기까지의 과정 등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4부에서는 ‘외곽주의자’로 살아왔던 저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유쾌하고도 진중한 방식으로 담아낸다. 사법고시생 시절 노량진 학원가의 발 잘린 비둘기를 보며 느꼈던 소회, ‘위로받는 사람들의 국숫집’이라는 이름의 국숫집 사장이 되고 싶다는 오랜 꿈, 스위스에 가족여행을 떠나 휴대폰을 잃어버린 뒤, 검사 가족답게(?) 금속 탐지기로 휴대폰을 추적했던 일화 등을 읽다보면 키득키득 웃다가도 때론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의 민원인들은 끊임없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하며 나와 함께했다. 어떤 날은 화를 내고 어떤 날 은 그들을 달래면서 실은 나도 위로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상의 모든 요구에 답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답이 아니라 다만 관계로서만 존재하는 요구도 어딘가에는 있다는 사실, 우리는 서로 답답하고 복장 터지는 관계였지만 어쩌면 그 시절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유일한 벗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15년쯤 지난 어느 날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사님과 영감님은 안녕들 하실까._124쪽

“혹시 모를 단 한 사람의 억울함도 빚어내지 않기 위해”

법의 논리에 포획되지도,
입증되지도 않는 진실 너머의 풍경들

얼마 전, 모 방송국 TV 프로그램에서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실제 주인공인 ‘정원섭 씨 살인 누명 사건’에 관해 다룬 적이 있다. 이는 경찰과 검찰을 넘어 국가가 주도적으로 고문하고, 거짓 자백을 받아내 한 사람의 인생을 ‘말살해버린’ 사건이었다. 그는 누명을 벗기 위해 30년간을 국가와 싸워 죄를 벗었지만, 사라진 인생에 대한 손해배상은 끝내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요즘은 과거와는 다르게 디지털화된 사회에서 좀 더 명확한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고, 범죄 사건을 밝히는 데 오차 범위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CCTV·휴대폰 통화내역·카드결제 내역 등 때로는 모든 증거가 피고인을 지목하는 명백한 사건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증거가 여실할수록 혹시 모를 한 사람의 인생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더 조바심 내며 사건에 임한다. 법정에서 인간에 대한 빈약한 상상력과 경험으로 사람을 의심하고 판단하는 자들에 의해 진실의 실체가 가려지는 것을 보며 마른 침을 삼키기도 한다. 저자는 법조인의 시선으로 이 책을 썼지만, 그 밖에 법의 논리에 포획되지 않는 세상살이·사람살이를 마치 한 편의 검사 드라마를 보듯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어느 경우든 검사의 수사력이 비웃음거리가 되는 위험보다 한 사람의 억울함을 빚어낼 위험이 더 크고 중하다. 그것은 신이 아닌 우리가 감히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정한 원칙이다. 입증해내지 못하는 진실은 사법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것은 때로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한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다가갈 수 있는 진실의 가까운 지점이 되는 것이다._108쪽

추천사

박주영(판사·《어떤 양형 이유》 저자)
판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검사가 쓴 글은 긴장하며 읽게 된다. 스토리텔링이 강한 검사는 특히 위험하다. 판사의 심증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어디 한번’ 하는 마음으로 중심을 바짝 낮췄으나, 프롤로그부터 이끼를 밟고 미끄덩하다 첫 꼭지가 끝나기 전에 머리털이 쭈뼛 서며 중심이 무너졌다. 그 뒤론 뭐, 저자가 가자는 대로 정신없이 달릴 수밖에. 꼭 차안대를 쓴 말 같았다고 할까. 한 순간도 딴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대단한 문장의 흡인력이다. 군말이 필요 없다. 심각하게 재밌다. 피해자로, 피의자로, 민원인으로, 혹은 피고인과 증인으로 이름만 달리하여 출몰하는 상처투성이 사람들에게, 생의 한 귀퉁이를 정성스레 내어 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 얘기를 들려준 사람의 직업이 마침 검사여서 마음 놓였다. 개혁이라는 게 뭐 그리 거창할 게 있을까 싶다. 죄를 묻기 전에 먼저 밥 먹었냐 안부를 묻고, 정량의 범죄 너머 있을 부정량의 그 무엇을 궁금해하며, 조직의 단단한 외곽에서 끊임없이 균열을 꿈꾸는 사람, 삶의 모서리에 마음 다치고 지친 사람들과 국수 한 그릇 같이 먹고 싶다 말하는 사람, 이런 내가 검사여도 괜찮을까 자문하는 사람, 바로 저자 같은 검사가 자주 눈에 띄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바라는 진짜 개혁 아닐까.

이다혜(《씨네21》 기자·작가)
재판 도중 피고인이 사라진다. 사기 피해자들이 상복을 입고 검찰청을 방문한다. 방화사건의 증인이 법정에서 갑자기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고백한다. 검찰 공판부 검사로 오래 일한 저자의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의 복잡함에 대한 기록이다. 사람들이 법정에 서기까지의 사연은 뉴스에서처럼 한 줄로 요약되기 어렵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고하는 사람의 자기성찰은 이 책의 장점이다. “단호함과 성실함을 탑재한 법조인들이 무언가에 대해 확고한 기준을 갖는다는 것”에 대한 첫 글을 읽고 나면, 책의 나머지 부분도 읽고 싶어질 것이다. 검찰이라는 조직, 동료 검사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끝에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도 놓치지 마시길. 원의 중심이 명백한 한국사회, 그것도 검찰이라는 조직에서 중심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워킹맘의 목소리. 그 누구도 세상살이의 고단함에 지지 않기를 응원하며 읽게 된다.

목차

추천의 말
프롤로그-낭만주의 이끼 씨의 검찰 생존기

1부 검찰청 외곽의 기쁨과 슬픔
털 있는 것들의 비극
인간과 곱창에 대한 이해
유쾌한 방구 씨의 검사생활
여실하게 잔인한
이런 ‘나’라도 괜찮을까요
울보 검사
딥 블루 레이디를 위하여
너무 쉬운 오타
넌 법복 입을 때가 젤 멋져

2부 진실 너머의 풍경들
피고인이 사라졌다
딱 보면 압니까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그 남자의 속사정
소년의 얼굴
PW 불출석
범죄의 평준화
증인이 된다는 것
불꽃이 꺼진 자리
낭만에 대하여
어떤 질문

3부 슬기로운 검사생활
검사 적성
검사의 보자기
검사의 캐비닛
검사의 게시판
검사의 사직인사
검사, 자유를 꿈꾸다
검사 엄마

4부 다정한 외곽주의자
외곽주의자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만
아는 비둘기가 있다는 것
위로받는 사람들의 국숫집
내 친구 조급증, 그 옆에 불안증
나의 하이마트
구간 단속 구간에서 아우토반을 꿈꾼다
그리고 금속 탐지기가 남았다

본문중에서

기록으로 인쇄되어 오는 삶들을 가르고 계량해서 그에 적합한 이름표를 붙여주는 일은 언제나 버거운 것이었어. 하물며 그것을 직업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일이란 늘 고단하고도 두려운 것일 수밖에. 뜨겁고 뭉클한 삶의 결들을 세상에서 가장 간결한 문체로 공소장에 옮기는 것이 검사의 일이라는 걸, 하여 아무리 무심하고 시크한 글씨체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검사의 삶이란 늘 어느 정도 울렁거릴 수밖에 없다는 걸 이끼는 명실상부한 이끼가 된 다음에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_8쪽

오래된 검찰청 건물에는 창마다 방범창이 있어. 그야말로 검찰청 창살 쇠창살인 셈이야. 보통 방범창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데, 검찰청의 창살은 그 반대의 용도, 그러니까 안으로부터 누군가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용도로도 설치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일터를 한결 더 서늘하게 하지. 쇠창살이 총총히 쳐진 창을 등지고 세상으로부터 실려온 기록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세상이 갇힌 것일까, 내가 갇힌 것일까, 아득한 생각이 밀려오기도 해._9쪽

애초에 이 풀도 요 풀도 아니었던 제3의 풀, 그 무고한 희생은 얼마도 되는지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다만, 초여름의 햇살 아래서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왠지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단호함과 성실함을 탑재한 법조인들이 무언가에 대해 확고한 기준을 갖는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새 어떤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은 무서운 일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말끔하게 정리된 잔디밭을 돌아보았던 생각이 난다. 어찌 되었든 잔디밭은 모두 정리되었다._23쪽

매일의 공판정에서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소환장을 받아 들고 공판정에 들어와 그들이 쏟아놓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들 앞에 우리는 종종 어떤 벽에 부딪치곤 한다. 천 갈래 만 갈래의 세상사 앞에 법조인 나부랭이가 품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이란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 소주 한 병이 주량인데 그날은 기분이 좋아 혼자서 소주 다섯 병을 마셨고 그다음부터 기억이 안 난다는 준 강간 피해자의 진술을 듣고 “혼자서 다섯 병을 마셨다고요?” 놀라고 황당해하던 우배석 판사의 표정을 기억한다._30~31쪽

더 정확히 지나간 시간을 재현해내고 가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실한 증거들 앞에서 주저하게 되는 날들이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실한 증거에 의해 명명백백히 재구성된 듯 보이는 사실 앞에서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위화감을 느낀다. 그것은 희미한 증거를 더듬을 때와는 다른 모종의 주저함이다. 멀고 희뿌연 것을 더듬어 진실에 가장 가까운 곳에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써오던 자의 오랜 관성 같은 것일까. 상상력이 배제된 사실확정의 지점에서 꼭 한 번은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_50~51쪽

젊음이란 그 자체로 어떤 비난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데, 유독 그것이 여성과 결합하여 모멸과 얕잡음의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젊은 남자 검사가 주로 섣부르기는 하더라도 패기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나 역시 젊은 여성 검사이던 시절이 있었다. 누가 봐도 새파랗게 보이는 나에게 선배 여성 검사가 한 충고는 ‘어린 여성 검사처럼 보이지 않게 하라. 말도, 옷차림도, 행동도…’였다. 내가 가진 젊음과 여성성이 나의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흠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프게 공감되는 현실이었다._72쪽

공판검사는 피해자의 이름으로, 혹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국민의 이름으로 공판정에 나아가지만, 대부분 검사를 적대시하는 사람만 가득한 곳이 법정이다. 검사의 부당 기소를 주장하며 절절히 억울함을 토로하는 인상이 선량해 보이는 피고인과 그를 호위하는 변호인들, 피고인을 응원하며 공판검사에게 적의 가득한 눈빛을 쏘는 가족과 지인으로 방청석이 가득 찬 법정에 홀로 앉은 검사에게 법복만이 방패막이 되어준다. 법복을 입고 그 자리에 있는 한 검사는 외로운 개인이 아니고 흔들리면 안 되는 공익의 대변자가 된다._88~89쪽

그동안 수없이 많은 재판을 해왔지만 재판 도중에 사라지는 피고인은 없었다. 처음부터 안 나오는 피고인은 종종 있었지만, 나왔다가 사라지는 경우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불구속 상태인 피고인이 재판 중간에 주어진 점심시간에 국밥 한 그릇을 먹다가, ‘이 집은 깍두기가 좀 약하네…’ 생각하다가 ‘에잇, 오후 재판은 들어가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해버리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판사, 검사, 변호사 모두 말이다)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_95쪽

여자는 그 이후에도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을 것이다. 어쩌면 매일 한결같았던 출근 시간과, 이용하던 지하 철 칸을 바꿨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나 얼굴을 달리하는 손가락들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안심할 수 없다. 평준 화된 범죄자들과 평준화된 피해자들이 함께 흔들리며 이동하 는 오늘의 지하철에서, ‘범죄의 기원은 사람을 대상화하는 것 에서부터 시작되는구나’ ‘범죄의 피해는 엉덩이에 손을 스치는 그 순간에 머물지 않는구나’ 같은 생각을 멀리 해볼 때마다, 잔뜩 움츠러든 그녀의 어깨가 떠오른다._166쪽

그날, 여자가 말한 것이 ‘사랑’이었다면, 나는 끝내 여자의 말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사랑의 존재를 믿는가 아닌가의 문제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날 여자가 나에게 말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이었다. 꺼짐으로, 비어버림으로, 떠남으로만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있다. 사랑보다는 ‘사랑이 떠나고 텅 비어버린 자리에 남은 것’이 훨씬 더 미덥다. 불꽃이 꺼진 자리에 하얗게 남은 그것으로부터, 안쓰럽고도 굳건히 내 눈을 응시하던 여자의 마음을 나는 의심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_189쪽

그러나 가끔, 그러한 일의 한구석에서 낭만을 꿈꾸는 날이 있다. 그것이 사람의 일인 이상, 우리가 길이를 재고 무게를 달고 부피를 가늠하는 그 범죄에도 어떤 질감 같은 것이 있어서, 아니면 어떤 향이라거나 미묘한 진동 같은 것이 있어서 죄의 정량과는 상관없는 부정량의 무엇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들은 주로는 검사라는 직업인들의 업무 수행 과정에서 잘 감지되지 않지만, 어느 햇살 좋은 오후, 유난히 필체가 좋은 어느 탄원서에 의해,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미묘하지만 명확하게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_201쪽

보자기의 색깔은 빨강, 파랑, 골드, 핑크까지 다양하다. 어쩌다 보니 ○○청과의 로고가 박힌, 아마도 어느 명절 과일 선물 세트 같은 것을 날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자기도 있다. 언젠가 공판검사들끼리 모여 이야기해본 결과 각자 선호하는 보자기의 색깔이 달랐다. 누구는 역시 검찰은 파랑이라고 했고, 골드의 럭셔리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이도 있었다. 다양한 취향 중에도 유독 선고가 있는 날은 빨강색을 고집하는 검사가 있어 그 이유를 물으니 답은 간명했다. ‘승리의 레드!’_225쪽

비둘기를 알지 못하였듯이 아직도 내가 모르는 생은 얼마나 많은가. 법조인들이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더듬고 재고 자르는 세상에는 우리의 인식 밖에 머무는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가. 매일 화장실 입구에서 마주치는 청소 노동자도, 현관문을 반쯤만 열고 맞이하는 배달 라이더도, 태풍에 쓰러진 볏단을 일으키는 TV 속 늙은 농부의 삶도, 우리는 개별자로서의 그들을 알기 전에 제대로 그들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날개가 아닌 발가락을, 발가락을 잃을 수밖에 없는 삶터의 위험들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_283쪽

다만 그 와중에도 꿈이 있다면, 내가 국수 대신 세상에 내어놓기로 마음먹은 법률 서비스가 간혹 누군가에게 한 그릇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힘들고 지친 인생을 한방에 일으킬 수 있는 보양식은 아닐지라도, 힘을 내기 위해 무언가를 찾아 나설 힘조차 없는 어느 허기진 저녁에 한 그릇 끼니는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이지 않고도 후루룩, 입과 빈 위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그 잠시의 위로를 딛고 또 다른 무언가를 위해 나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원인 그 무언가가, 매번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되기도 했으면 좋겠다._289쪽

저자소개

정명원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저자 정명원은 2006년부터 지금까지 16년째 검사로 일하고 있다. 대구에 살고, 대구 인근 지역 근무를 줄기차게 희망한 결과 ‘신라검사’라고 불린다. 줄곧 형사부에서 금융·조세·환경·식품·소년 등 다양한 분야의 전담을 아우르며 ‘통상 업무를 안정적으로 수행하나 특출한 실적 없음’ 검사로 일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자신 안에 있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고 국민참여재판 전문 검사로 활약하고 있다. 특수부, 공안부만이 중심인 것처럼 보이는 대한민국 검찰에서 행복한 형사부, 공판부 검사를 꿈꾸며 지금도 2006년식 법복을 걸치고 법정에 나간다.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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