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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장면 : 김엄지 소설[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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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김엄지
  • 출판사 : 작가정신
  • 발행 : 2021년 01월 25일
  • 쪽수 : 176
  • ISBN : 9791160262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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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기억과 망각 사이를 유영하는
R, 그리고 R, 그리고……… 우리, 수많은 R

중첩되는 장면들 속에서 어느 곳에도 발붙이지 못한 채
그저 부유하는 김엄지식 인간들의 세계

의식과 무의식,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포착됨을 거부하는 문체와 평면적이고 반복적인 서사로 특유의 작품 세계를 이어온 작가 김엄지. 김엄지의 신간 소설 『겨울장면』이 출간되었다. 욕망이나 사건, 내면의 사고思考가 결여된 인물들을 통해 더 이상 미래를 도모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평면적인 일상의 극단적인 반복을 내보인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삶에서의 변화, 미래로의 이동, 타인을 통한 낙관을 차단당한 ‘산송장’과도 같은 인간 존재를 그린 『폭죽무덤』까지, 김엄지는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래 출간되는 소설마다 본인의 스타일을 굳건히 해왔다.
이번 『겨울장면』은 기억을 잃었으나 어떤 기억을 잃었는지조차 모르는, 그저 그 상태로“멈춰 있는 것이 최선”인 ‘R’이라는 인물을 통해 진행된다. 기억과 망각 사이 어느 한 곳에 발붙이지 못한 채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R’. 김엄지의 소설에서 유구히 존재해온, ‘그저 있는’ 김엄지식의 인간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한 ‘R’을 통해 김엄지는 우리의 모습을 작품 위에 겹쳐놓는다.
『겨울장면』에는 김엄지 작가의 에세이 ‘몇 하루’가 수록되어 있다. 작품을 집필하며 일상에서 길어 올린 장면들을 작가 특유의 산문체로 써 내려간 것으로, 건조하고 단조로운 생활 사이사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툭 튀어나오는 작가의 예리한 현실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출판사 서평

그는 생각보다 더 그를 모른다. 그는 매순간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영영 답을 알 수 없다. 그는, 그저 멈춰 있는 것이 최선이다.

‘R’은 지금 천장의 윤곽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그는 “아직 내일에 대한 생각이 가능”하고,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발음해볼 수 있을 정도로 미래에 대한 생각이 가능하다. 8개월 전 R은 5미터 밑의 바닥으로 추락하는 경험을 했고 그에 대해 생각 중이다. 하지만 R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많기에 어떤 기억을 잃었는지 모르고, 그저 여러 장면들이 중첩되어 떠오를 뿐이다. R은 8개월 전 자신이 어떻게 추락하게 되었는지를 잊었고, 직장 동료였던 L의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상사의 성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며, 아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잊었다. 하지만 R은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묻지 않거나,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R에게 기억이 선명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아내와 함께 여행지 ‘제인’에 갔다가 그곳에서 아내가 우연히 동창을 만났고, 다음 날 눈을 떠보니 R이 혼자였던 기억. 그리고 상사의 성은 ‘정’도 ‘박’도 아닌, ‘개같은’이라는 기억. R은 동시에 기억해낸다. 아내와 아내 동창의 관계에 의구심을 가졌으나 묻지 않았음을, 상사의 비인간성과 추접함을 견뎠음을. R에게 최선은 그저 “멈춰 있는 것”이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일요일은 반복을 암시하는 속임수다.”

R은 그런 상태에서도 여전히 허기를 느낀다. 흉통을 느끼고 후회를 느낀다. 스스로 ‘왜’라고 자문하지만 이 질문은 느끼는 바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서보다는 느낀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이는 곧 R이 허기와 통증과 후회를 느낄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과도 같다. 매번 다를 바 없는 일주일을 반복하며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잊는 R은 어디로든 뚝 떨어지고 싶다. 의사는 R에게 통증을 줄이는 방법 중 하나로 ‘현실 직시’를 제안하지만 R에게 현실이란 단어는 듣자마자 웃음이 나올 정도로 무의미하다.
차라리 낚싯대를 드리운 얼음호수의 차가운 물 구멍 속으로 아내가 자신을 밀어주기로 원하는 R을 아내는 비난한다. 하지만 스스로도 그리고 타인에 의해서도 R은 차가운 얼음호수 속으로 빠져들 수 없고, 착란의 상태로 허공에 붕 뜬 채, ‘그저 있을’ 뿐이다.

그는 알지 못했다.
얼음호수의 끝을. 겨울의 시작과 끝을.
제인해변에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다음 날 아침 제인호수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마음을. 그 누구의 것, 자기의 것도 그는 알지 못했다. _본문 중에서


무력함과 불확실성만이 확실하며
의미와 현실이 말장난에 불과한 김엄지의 세계

『겨울장면』에는 기억과 망각, 삶과 죽음의 이미지들이 시간의 연속성 없이 배열되어 있다. R은 끊임없이 이 사이를 떠돌며, R에게 확실한 것은 자신이 그저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 그 자체다. 그는 시간의 이동, 미래로의 나아감 없이 누운 그 자리에서 중첩되는 기억들을 견딘다. 인물이 지니고 있는 무력함과 불확실성이 한 장면 한 장면으로 치환되어 『겨울장면』을 이룬다.
R에게는 아내와 미래를 이야기하던 시절도 있었으며 아내에게 선물 상자를 건네면서 긴장하는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R은 아내가 자신을 떠난 건지 혹은 그 반대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며, 아내가 남긴 편지에는 R이 모르는 R의 모습이 적혀 있다. 이런 상황에서 R, 혹은 『겨울장면』을 읽는 우리는 “현실” “리얼” “팩트”가 무엇인지 찾아 헤매나, 김엄지의 대답은 이렇다. “현실은 현실이죠. 리얼이즈저스트리얼. 리얼이즈팩트 아니겠습니까? 팩트이즈팩트는 아니고요? 그렇게 되면 말장난에 불과하죠. …… 차라리 현실은 선생님 웃음소리 같습니다. 많이 비틀어진 것 같고.”
무언가를 잊었으나 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추락하고 싶으나 불가능하며, 그저 맨정신으로 “반복을 암시하는 속임수”에 불과한 일주일을 살아가는 R, 혹은 우리에게 “현실” “리얼” “팩트”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김엄지는 다시 한번 김엄지식의 ‘현실 고증’을 『겨울장면』에서 선보이며 우리를 일깨운다.

“정말로 쓰고 싶은 말들은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하면서 혼자 재미있었다.”
_에세이-몇 하루, 「밖」

작가정신 〈소설, 향〉소설, 향香을 담다 : 소설, 반향響을 일으키다 : 소설, 향向하다작가정신 〈소설, 향〉은 1998년 “소설의 향기, 소설의 본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첫선을 보인 ‘소설향’을 리뉴얼해 선보이는 중편소설 시리즈로, “소설의 본향, 소설의 영향, 소설의 방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한다. ‘향’이 가진 다양한 의미처럼 소설 한 편 한 편이 누군가에는 즐거움이자 위로로, 때로는 성찰이자 반성으로 서술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목차

겨울장면 7
에세이-몇 하루 147

본문중에서

저 어두운 윤곽이 네모는 아니라고, R은 생각한다.
천장 안에 뭐가 가득할 것 같다.
천장 안에 빛이 있다면.
빛이 없을 리는 없다.
빛 없고, 보는 눈 없이,
허공에 붕 떠 있는 오로지 혼자인 색.
R은 붉거나 푸른 것을 떠올리고.
R의 입안에 아직 침이 돈다. _9쪽

사람들이 제인호수에 몸을 던지는 이유는, 그게 하나의 유행이기 때문이라고, R은 생각했다.
충분히 깊고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끌리고, 아름다움을 참지 못한다. 그저 삼켜지는 아름다움은 없다. 기어이 감탄을 뱉는다. 회자되고 회자되어 누군가의 귀까지 들려오는 소문이 된다. 유행이 된다. 오 나도 꼭 거기서 죽어야지. 누구나 한 번쯤 결심하는 날이 있다.
R은 죽을 생각이 없었고, 낚시가 취미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쯤 오고 싶었다. _23쪽

R이 진료실의 유리 밖을 내다볼 때, 의사는 직시, 라는 말을 했다.

뭘요?
현실을요.

R은 현실이라는 말이 웃겨서 웃었다.
때와 장소에 맞춰 웃어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R은 그게 잘 안 됐다. _61쪽

천장은 무너지지 않는다.
바닥이 가라앉는 일도 없다.
R은 사라지지 못한다.
R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어두움이 눈앞에 있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일주일은 반복을 암시하는 속임수다. _79쪽

R은 눈을 감고, 감은 눈 안에 자기를 떠올린다.
그는 R과 같은 수많은 R을 상상한다.
그는 그와 아주 똑같은 R을 상상할 수는 없다.
언제나 R은 R에게서 이미 지나쳐 너무나 먼 것이었다.
카페는 계속 밝았다.
밖은 어떠한가.
아직 계속 겨울인가.
바람이 불고 있는가.
R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려다본다. 파란 하늘.
유리 밖 공중에서 만국기에 달린 은박지가 반짝거렸다.
R은 이미 다 본 장면 같다. _94쪽

가슴이 아파 왜.
R은 걸었다.
흉통이란 게 마음이 꼭 거기에 있어서 시작되는 건 아닐 테고.
누구에게나 마음이 있다는 것은 큰 착각.
R은 고개를 젓는다.
R의 가슴팍에서 손톱 조각같이 작은 살점이 뚝뚝 떨어진다. 114~115쪽

사람들이 호수 둘레에 서서 하는 마지막 결심.
그건 결심이 아니다.
어떤 마음도 아니다.
다 지나간 후, 이미 끝난 것이다.
끝난 것을 끝내려는 것이다.
소리가 남고, 가라앉는 것은 물뿐이다. _131쪽

저자소개

생년월일 1988

저자 김엄지는 1988년 서울에서 태어나 201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장편소설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가 있으며,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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