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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숙 수필집 [뜸]. 자신의 삶 속에서 사유함으로써 독자와 소통을 꾀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삶의 의문을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밝고 애틋한 분위기를 풍기며 개개인의 삶과 긴밀한 접촉을 시도한다. 저자 개인의 삶이 아닌 독자 개개인의 이야기로 넘어가며 공감을 이끌어낸다.

밝은 공감과 애틋한 기억 그리고 삶의 예지

박정숙의 수필에는 두 가지 차원의 언어가 있다. 하나가 진솔하고도 투명한 고백을 통한 자기 확인의 언어라면, 다른 하나는 구체적 경험을 통해 다다른 가치에 관하여 독자와 소통하려는 언어이다. 우리의 귀와 눈을 울리는 그녀의 수필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투명함과 소통성을 가지고 있다. 이때 그녀가 보여주는 투명한 언어가 타인의 생각과 태도에 심미적 충격을 주려는 의지의 산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만큼 그녀의 수필은, 작가의 오랜 경험과 깊은 사색을 담은 정성스러운 자각과 깨달음의 세계라 할 것이다. 그 내용과 문체가 활달하고 견고하며, 작가 자신의 인생관이라고 할 만한 삶의 태도가 문장에 가득 실려 풍요롭게 전해진다. 이에 우리의 공감이 배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작가는 [고사리]에서 마른 고사리처럼 윤기 없는 노년을 보내고 계신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풀어놓았다. 그런가 하면 [반려식물]에서는 초록이 주는 자연의 선물을 만끽하면서 느끼는 근원적 감각을 보여주었다. 고무나무의 그늘과 초록빛이야말로 최고의 기쁨을 선사하는 존재라는 경험적 실감이 이러한 과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이웃사촌]에서는 이웃들과 겪은 구체적 경험을 통해 소통과 애정의 공동체를 사유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수필이 신변적 회고에 머물지 않고 근원적이고 비평적인 감각을 민감하게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지표들일 것이다. 이때 우리는 박정숙 수필이 구체적 경험에 바탕을 둔 사유의 깊이를 품고 있음을 선명하게 알게 된다.
박정숙 수필은 창조적 사유와 영감을 얻는 방법으로서 삶에 대한 지성적 사고의 힘을 빌리고 있다. 지성이란 사물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녀의 수필이 이처럼 사물에 대한 해석과 반응으로부터 인간의 본성 전반에 걸친 사유와 지성을 향하는 것은, 우리 수필의 확장과정을 첨예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박정숙 수필에 나타난 지성의 면모는 수필의 심미적, 비평적 기능을 제고하면서 수필의 본령을 한 단계 높이고 있다 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공감의 파문이 잔잔하게 흘러드는 것을 느끼게 되고, 박정숙 수필이 사유의 깊이를 견고하게 가진 투명한 소통의 언어였다는 사실에 가 닿게 된다.

그렇게 박정숙 수필은 부드러운 성정性情과 구체적 경험들 그리고 날카로운 비평안眼을 통해 수필 문학의 보기 드문 위의威儀를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의 수필을 읽음으로써 밝은 공감과 애틋한 기억 그리고 삶의 예지가 충일한 경험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애틋하고 융융한 세계가 아닐 수 없다.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제1부 뜸
고사리 15
뜸 20
달밤 24
내 마음의 물고기 27
온도 32
김장을 담그며 34
엇박자 38
여름 달밤43
쑥부쟁이 44
갈증 49
낙화 53

제2부 뻐꾸기 울 때
빈자리 57
이웃사촌 62
뻐꾸기 울 때 66
신불산 69
거짓말 74
장자구메 79
추억 여행 82
이름 87
아버지의 소나무 92
연줄 96

제3부 반려식물

때 103
참빗 108
드립커피 113
반려식물 118
안개 120
퍼즐 126
길 130
그녀의 웃음소리 134
마지막 모습 138
아버지와 고사리 143
노거수 144

제4부 청송에서
코스모스 149
황초굴 154
떠날 때는 말없이 156
달래 161
굽칼 165
염화미소 169
반성문 173
사춘기와 갱년기 178
명당 183
청송에서 187

■ 발문 194
■ 서평 197

첫 마음

봄비가 내린다. 비는 대지를 적시고 잠든 싹을 깨운다. 조만간 세상은 연초록 옷으로 갈아입고 연극무대의 주인공처럼 기지개를 켤 것이다. 작은 씨앗이 꿈에서 깨듯, 나도 새로운 시간 앞에 서 있다. 그동안 품고 있던 싹을 대지에 심을 때가 온 것이다.
글쓰기는 시냇물 옆에 놓인 디딤돌과 같다. 없어도 시냇물을 건널 수는 있지만 디딤돌을 괴면 물에 젖지 않고 수월하게 건널 수 있지 않은가.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인생을 망치는 것도 아니고 큰일이 생기지는 않지만,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하는 나에게는 효과적인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내 글의 팔 할은 고향이다. 소소한 일상이 쌓여 추억이 되는 곳, 그곳이 고향이다. 고향의 품, 그 품 안에서 내 꿈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는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고, 문장이 되어 살아났다.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산과 들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곤 했던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담이 되고 말았다.
한없이 부족한 글을 엮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부모님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개인사일 뿐이지만 그분들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망각 속에 버려둘 수만은 없었다. 아버지는 강직하면서 도 정이 많았다. 아버지 생전에 책을 출간하고 싶었는데 한참이나 늦어버렸다. 게으름을 피우며 보낸 날이 부지기수다. 아프다는 핑계로 글쓰기와 담을 쌓고 있었던 것 같다. 담을 쌓는 것도 그 담을 허물고 나오는 것도 결국 자신이다. 지금이라도 책을 묶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따뜻한 품으로 나를 지켜준 어머니를 위해서 용기를 낸 것이 다행스럽다.
바람이 불다 그치다 하는 나이에 수필을 만났다. 그때는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서 제자리걸음을 걷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 걷잡을 수 없이 휘청거렸고, 바람이 자면 간신히 일어나 중심을 잡았다. 정신을 차리고 가슴 깊이 쌓아둔 고물을 하나씩 꺼냈다. 고물이 보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십 년이 훌쩍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핍과 원망의 시간이 나를 성장시켰던 것 같다.
내 수필은 곧 내 삶이다. 나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 보통은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아니한 중간 정도라는 말이다. 중간을 맞춘다는 것,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동안 잘하려고 발버둥치지나 않았는지, 특별한 것에 집착하여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기쁜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해주고 누군가 아파하면 가서 손을 내밀 수 있는 보통 사람으로 살고 싶다.
글쓰기는 늘 반성문을 쓰는 것과 같았다. 그동안의 삶을 풀어내면서 스스로 깨닫는 시간이었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다친 마음을 다독였고, 퇴고하는 과정에서 성격의 모난 부분을 둥글게 깎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글쓰기는 나를 만나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지금 처음이라는 설레고 낯선 문 앞에 서 있다. 책을 엮으면서 험한 산을 넘었으며, 처음 글을 쓸 때의 마음으로 무장했다. 부침이 심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자연스럽게 첫 마음으로 돌아간다. 헝클어진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역설의 진실도 알았다.
지금은 비록 서툰 글이지만 독자들의 비난도 감내하리라 다짐한다. 결코 사랑 받는 작품집이 아니더라도 글쓴이의 일화에 고개 끄덕여 줄 한 명의 독자라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본다.
-2018 청송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