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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방한 시풍. 시야가 거시적. 시 형식도 무애, 불기.

표지에 돼지머리와 돼지떼가 나오는 시집. 예사롭지 않다. 아마도 세상에서 책의 형식을 빌려 시집이 나오기 시작한 이래, 표지에 돼지들을 주인공으로 그려 넣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일 것이리라.

시집이 시작되는 첫 시인 ‘삼겹살 애가’는 ‘코리언 드림(Korean Dream)’을 찾아 한국에 왔다가 돈사 똥통에 빠져 죽은 20대 네팔 청년들에 대한 진혼시의 성격을 띤다.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을, 나아가 인생의 허무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각자 자기의 삶을 돌아보며 인생이란 걸 다시 생각한다.

이렇게 시작된 시집은 단순함이나 단일함에 머물지 않고 내용에 있어서 실로 많은 것을 담으며, 형식에 있어서 다양한 꼴을 시도한다. 무엇보다 시들에서 바다처럼 깊은 사색과 하늘처럼 가없는 철학을 느낄 수 있다. ‘스토리 텔링’이 있는 서사풍의 시들이 있어 재미있는가 하면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서정시들도 주옥같다. 세계를 여행하며 쓴 기행시들은 일반적인 기행시들과 달리 상투적 감상을 벗어나 문명비평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일반적인 시보다 긴 시가 있는가 하면 내용인 시가 제목보다 짧은 것도 있다.

우리는 제3자인 다른 두 시인의 짧은 평을 통해 시집 ‘삼겹살 애가’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원로시인인 임보 선생의 평: “이만주의 시풍은 호방합니다. 시야가 거시적입니다. 사회의 부조리나 인간의 만행에 대해 고발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딱딱하지 않고 즐겁게 읽히는 것은 그 비판이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의 시정신 역시 범상치 않습니다. 탈속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까요?” “시의 형식에 있어서도 무애(無碍), 불기(不羈)라고 할까요?”

여류시인인 김금용 선생의 평: “자본주의의 모순과 황금만능 위주의 사회현상을 현장감 넘치는 소재와 사고로 통렬히 비판하고 항의한 시편들로 채워진 점이 놀랍다. 그러나 시집 3부의 <압록강 세수>, <빅토리아 폭포>, <오카반고 델타> 같은 서정성 높은 시들 또한 주목하게 된다. 독자들 가슴에 오랫동안 기억될 수작이라 하겠다.”

1. 시집 표지에 돼지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일 것입니다.

2. 첫 번째 시집과 이번 시집 표지 상단의 새 두 마리 마크는 공생, 상생을 의미하며 저자가 그린 것입니다.

3. 제자(題字) ‘삼겹살 애가’는 삼겹살을 흉내 내어 저자가 직접 썼습니다.

4. '시인의 말'은 생략하고 '저자 후기'로 대신했습니다.

5. 시집 전체로 보면 성경 구약의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의 '윤회의 고리'를 끊는 것으로 끝납니다.

6. 제목보다 본문이 짧은 시가 있습니다.

7. 우리말은 다른 외국어와 달리 '다', '오', '요' 등으로 끝나기에 끝남을 알 수 있습니다. 시 ‘박희진 시인‘ 부분에서는 마침표를 정상적으로 사용했으나 그 외 전체 시들에서 마침표는 모두 다섯 개만 사용했습니다.

8. 90, 91쪽에 ‘피라미드’가 있으며 둘의 크기가 다릅니다. 실제로 이집트에 가보면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9. 저자의 호가 ‘한눌’인데 '아래 아'를 써서 표기했습니다.

10. 저자의 문학이론이나 시론(詩論)이라고 하기에는 주제넘고, '저자 후기'에는 저자의 문학관(觀) 내지 예술관(觀)이 간략히 피력되어 있으며, '부록: 시인과의 대담'에는 시(詩)를 바라보는 저자의 입장과 저자 나름의 시를 쓰는 변(辯)이 담겨 있습니다.

이밖에도 시집에는 많은 함의(含意)와 비의(秘義)가 숨어 있습니다.

시인의 말

I
삼겹살 애가(哀歌)
테레비
우리
별난 식성(食性)
비(非)채식주의자
인도 항공우주공학의 개가
대양 컬링(大洋 Curling)
환향녀
말세(末世)
내비도(道) 도사
소록도에 왔던 두 천사

II
박희진 시인
노시인의 사리
런던과 연암(燕巖)의 장님 이야기
골콘다(Golkonda) 다이아몬드 광산
딱따구리
고독은 싫어
한국 남자의 쓸쓸함에 대한 순간적 단상
한국 남자의 행복함에 대한 순간적 단상
그날, 오이도행 전철을 탔다
어느 풍류산인(風流山人)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에
숲의 풍경
가을 새벽 보름달
산비둘기야! 보리심(菩提心)을
노년의 초상
세밑의 밤

III

선몽대(仙夢臺)에서
압록강 세수
목 축이는 새
목 축이는 인면조(人面鳥)
나일강
피라미드
오카반고 델타(Okavango Delta)
빅토리아 폭포
이과수 폭포
작은 나라, 산마리노
카자흐스탄

IV

접문(接吻)
합일(合一)
탄생(誕生)
생각
실존털학 개론
가래와 실존털학
가려움과 실존털학
질병과 실존털학
새벽 1시, 24시간 국밥집의 독백
노숙자
탁상시계
8열(熱)지옥계
산길에서 만난 노파
공작선인장 꽃
목어(木魚) 1
목어(木魚) 2

〈발문〉
예리한 풍자와 호방한 시정(詩情)
임보 / 시인, 전 충북대 국문학과 교수

〈저자 후기〉

〈부록: 시인과의 대담〉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의 이만주 시인을 만나다
우천식 / 경제학박사

〈저자 약력〉

삼겹살 애가(哀歌)







“돼지 삼겹살에 얽힌 이야기.
21세기 애가라.”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빛이 이울어져 저녁이 되었고
저녁은 곧 밤으로 바뀌었다

서울의 식당가 여기저기서
삼겹살 굽는 기름 증기가 피어올랐다

한국보다 3시간 늦은 오후
네팔의 작은 마을에선
22세 청년 C를 화장하는 연기가
설산을 타고 하늘을 올랐다

네팔의 사내아이들은 자라면서 꿈을 꾼다
런던 버킹검궁 근위대원이 된다는 꿈

웅장한 궁전, 화려한 군복
여왕님을 지킨다는 자부심
가장 용감하기에 환영받는 용병
구르카 장병들1

네팔 평균 임금의 수십 배 연봉으로
20여 년 근무하면
평생 잘 먹고, 잘 산다

하지만, 구르카 입대시험에서 떨어지면
석청 따는 일이라도 해야 한다

수천 미터 고산
히말라야 산악에서
밧줄에 매달려
목숨 걸고
절벽에서 꿀을 따는 일

하지만, 요즘은 여차하면
한국행을 결행하면 된다

산자수명, 금수강산
아침이 조용한
군자들의 나라

봉급 높고, 인심 좋고
살기 편해
푸근한 나라, 한국

용병으로 고된 훈련
아니 받아도 되고
험산준령에서
곡예할 필요도 없다

용감무쌍한 네팔 청년에게
돼지 똥통 치우는 일은
일도 아니다

네팔 청년은 꿈을 꾸었다
코리언 드림

어서 빨리 돈을 모으리라
팔려간 어린 누이를 찾아오리라2

2017년 5월 어느 날 오후
네팔의 어머니는
이역만리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었고
팔려간 누이는 종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한순간
동료 선배인 25세 G가
청소하던
돼지 똥통 속으로 곤두박질쳤다3
곧 반사적으로
착한 청년 C가 그를 구하겠다고
똥통으로 뛰어들었다

밤하늘 설산 위,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이 보였고
눈물 흘리며 팔려가던
어린 누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의 환영

악취가 넘쳐나는
구렁텅이로
순진무구한 이방의 청년들이
제물로 던져졌다

한 시간 뒤
두 사람의 시신은
119대원들에 의해 건져 올려졌다

이제 성년의 삶을 시작하려던
22세와 25세

돈 벌러 온 지 두 달 만에
월급 한 번 받아본 게 다였다
그리곤 끝이었다

그 시각
그러한 사연을 알 리 없는
한국 남자들은
대낮부터 삼겹살에 낮술을 걸쳤다

그중에는 별명이 ‘삼겹살’인
사람도 있었다

그로부터 2주일 뒤
똑같은 사고로 또 세 명이
돼지 똥통에 빠져 죽었다

그날 저녁에도 사람들은
마구 먹어 제쳤다
삼겹살뿐만이 아니었다
목살, 갈비, 족발
껍데기, 각종 부속

한국 사람들은 너나없이
돼지고길 좋아한다

‘돼지 갈비’
‘돼지 수육’
‘돼지 곱창’
‘돼지 국밥’

한국 사람들은 너나없이
돈을 좋아한다

‘돈돈(豚)집’
‘돈돈까스’
‘돈 되지 삼겹살집’
‘똥돼지 한돈삼겹살집’



돈에 주린 이들이
돈삼겹 구우며 피워 내는
흰 연기 사이사이

돈 벌러 한국에 와
돈사에서 삶을 다한
이방 청년의 몸도
가느다란 연기 되어
함께 피어올랐다





런던과 연암(燕巖)의 장님 이야기


런던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칠흑이었다
가로등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노인들은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장님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그들이 노인들을 인도하여 집을 찾아주었다

다섯 살 때 눈이 멀어 20년 간 장님이었던 청년
어느 날 갑자기 마을 어귀에서 눈이 틔었다
그는 필요 없게 된 지팡이를 버렸다

그 골목이 그 골목 같았고
집집의 대문이 비슷비슷했다
눈 감고 쉽게 가던, 자기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을 어귀에 서서 울었다
지나가던 서화담1이 청년에게 까닭을 물었다

대답을 들은 화담은
“눈을 감고 다시 지팡이를 짚으라”고 했다
그는 그리 했고
그제야 쉽게 집에 닿을 수 있었다
노년의 초상


갈잎 되어
떨어질 줄 알면서
그리도 애쓰면서
잎을 틔웠더란 말이냐

시들어
한순간에 질 줄 알면서
기어코 꽃을 피웠더란 말이냐

꽃들의 자취는 흔적도 없고
낙엽은 거름이 되어 간다

모든 것을 비우고
겨울 한복판에 서 있는 나목

하지만, 지금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목 축이는 새


마셔야 산다

목을 축인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이다
살아 있음이다

달고 단, 물 한 모금

얼마나 돌고 돌아, 예 왔을까

10년 전, 바이칼 호수의 물이
100년 전, 대서양의 물이
1000년 전, 천산산맥의 눈이

수증기 되고
구름 되어 떠돌다
이곳에 와
비로 내렸는지도 몰라

강렬한 볕으로
소음이 잦아진 텅 빈 오후

새 한 마리가
공원 수조에서
물 한 모금 쪼고 있다



- 캘리포니아 몬트레이(Monterey)에서.





목 축이는 인면조(人面鳥)


기독교 사회에서 일찌감치 신(神)을 버린 사람
머리 길게 기른 타고난 보헤미안
젊은 시절엔 빡빡한 형편에 싸구려 술집을 떠돌던 사내

가업인 등대 만드는 일이 싫었던 아들
변호사 자격을 따고도 다툼이 싫어 개업하지 않은 선인
애초에 그저 시시한 글쟁이나 되기를 바랐던 로버트 스티븐슨1

하지만, 평생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도
글을 썼고 방랑을 즐겼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몸에
폐병2에 걸려 객혈을 하면서도
글만은 부지런히 썼다
오히려 병이 악화되어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더 왕성하게 집필했고 걸작을 뽑아냈다

모험에 대한 동경과 대박의 꿈
청소년들에게는 ‘보물섬’3이라는 영원한 판타지를 선사했다
그러나 판타지가 어찌 청소년만의 몫이겠는가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선과 악
어른들에게는 ‘지킬과 하이드’4라는 영원한 화두를 던졌다
그는 각자(覺者)였다

병마와 싸우던
44년의 길지 않은 생이건만5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 소설, 여행기, 음악작곡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생긴 모양새도 마법사 같았지만
문학의 마법사였다

교통수단이 발달치 않았던 19세기 후반
유럽으로, 미국으로, 태평양의 섬들로, 호주로

병약한 몸에 가녀린 체격으로
세계를 떠돌던 그는 한 마리 인면조6였다

그가 마지막에 정착한 곳은
태평양 사모아의 우폴루(Upolu) 섬으로
‘보물섬’ 저자다운 선택이었다

그가 당시 독일령이던 그곳에서 4년 동안
원주민들을 도우며7 살다 타계하자
그를 따르던 추장들은 극진한 예장으로 치러
그들의 성지인 바에아(Vaea) 산에 묻었다

대양을 굽어보는 산정(山頂)에 조성된 큰 무덤은
그에 걸맞은 예우였고
모든 것은 신화가 되었다

그가 스쳐간 모든 곳의 사람들이 그를 기려
캘리포니아 몬트레이 시민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머물렀던 기간은 단지 115일이건만
기념관까지 만들어 그를 기린다

프랑스에서 11년 연상의 미국인 기혼녀를 만나
그녀가 본남편과 이혼하고
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결혼하기 전까지 머물던 곳이
포근하고 쾌적한 도시 몬트레이였다

강렬한 볕으로
소음이 잦아진 텅 빈 오후

그를 기념하는 표석이 있는
몬트레이의 작은 공원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는
또 한 마리의 새가
벤치에 홀로 앉아 있다

한국에서 날아온, 사람의 얼굴을 한
또 한 마리의 새가
벤치에서 날개를 쉬고 있다

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이고 있다
































접문(接吻)


첫 번째 문이 열렸다

하나되는 시작이었다



- 접문은 입맞춤, 키스.



























합일(合一)


이윽고 문이 열렸다

무한대의 블랙홀로
빨려들었다

속도 빠른 살별들이
휙휙 스쳐 지나갔고

빅뱅이 일어나자
무수한 별이 튀었고
성운(星雲)이 생겼고
수많은 소우주가 생성되었다

하나가 되었다

신에게서 오는 전갈 따윈 반송했다

우주의 한쪽에서 시작된 굉음이
여운 되어 길게 이어지더니
우주의 또 다른 한쪽으로 사라졌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1

하나에서 시작해서 하나로 끝났다

모든 것은 하나였다



1. 천부경의 제일 앞과 제일 뒤 구절.



탄생(誕生)


100억 년 전, 대폭발로 우주가 탄생했다는 주장은
별 의미 없다

내가 첫울음을 터뜨렸던 것은
나의 탄생과 함께, 비로소
우주가 탄생된 기쁨에서였다

아인슈타인의 초기 우주불변론
프리드만의 우주팽창론
호킹의 다중우주론

천재들의 고답한 이론들이 공허하다

우주는 존재의 목적이 없다

있다면
내 존재를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 목적일 뿐

내가 존재치 않는다면
저 풀 한 포기도 있거나 말거나다

나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우주 파티에서
모든 것은 나를 위한 데코레이션이다
모든 이는 나를 위한 엑스트라다

내가 적멸하는 순간
우주도 소멸한다

그렇게 생각치만
어째 개운치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