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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강화도령 철종 이원범을 소설화한 책이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이자 카세일즈맨 작가로 일반인 대상의 시와 소설은 물론 어린이 동화와 동시 창작에 전력 질주해온 신성범 작가의 첫 역사소설 야심작이다.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철종은 작가가 꼭 쓰고 싶은 소설의 소재였는데 일단 소재가 정해지자 다음 작업은 그것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기 일쑤였다. 역사소설이다 보니 무작정 쓸 수 없어서 철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했다.
이미 세상에 알려진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기에 사실에 근간을 둬야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강화도를 찾아 그곳의 철종 생가인 용흥궁을 여러 번 둘러봤다. 용흥궁은 철종이 왕이 된 이후 새로 지은 곳으로 그곳에 있는 철종 대왕 비(碑)를 통해 그곳이 철종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철종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예릉인데 이 예릉은 철종과 철인왕후 쌍릉이 있다. 그 웅장한 모습에서 왕의 권위가 느껴지는데 특히 능 앞에 서 있는 거대한 문인석과 무인석은 그 위용이 대단하다.

철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강화도에 살던 이원범을 왕으로 지명했다. 그 바람에 철종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왕이 되었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5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복녀라는 한 여인을 사귀었고 혼례를 약조할 만큼 사랑하는 사이였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원범과 복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사실 철종과 복녀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영화나 드라마로 다뤄진 적이 있다. 1963년 개봉된 신상옥 감독 영화 <강화도령>, <철종과 복녀>가 있고 드라마로는 <임금님의 첫사랑>이 있다. 영화는 1963년, 드라마는 1976년에 각각 발표되었다.
이들 작품은 워낙 오래전에 나온 탓에 작가는 그 영화와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철종에 관한 소설을 쓰면서 이미 발표된 작품을 참고할 필요가 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작가는 평상시 동화와 동시와 시를 습작할 때와는 달리 매일 소설을 쓰지 못했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썼다면 좀 더 빨리 이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을 터이지만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상상력이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열흘이 넘도록 단 한 줄도 못 쓴 날도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역사소설은 사전 지식을 많이 갖춘 뒤 창작에 임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실제 일어난 사실을 왜곡할 수 없기에 그런 작업이 쉽지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작가는 주경야독하며 글쓰기에 매달려야 했고 짬짬이 강화도 용흥궁을 찾았고 고양시에 있는 예릉도 찾았다. 조금이라도 철종이 어떤 왕이었는지에 대해 전심전력으로 느끼기 위해서였다.

작가는 “이 소설은 부족한 점이 많아 많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용기 있게 부족하나마 세상에 내놓는다”며 “이 소설을 쓰면서 철종에 관하여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특히 철종이 왜 궁녀와 가까이했으며 요절했는지 알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아울러 작가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조선 후기 철종 시대로 돌아가 그 시절을 마음껏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자가 그것만이라도 느낀다면 이 작품을 쓴 보람을 크게 느낄 것이라고.

[소설 철종 이원범] 목차
1) 원범과 복녀
2) 왕이 되다
3) 원범과 순원왕후
4) 복녀를 만나다
5) 발칵 뒤집힌 궁
6) 복녀의 죽음
7) 중전을 맞이하다
8) 비룡의 고백
9) 철인왕후
10) 범 상궁
11) 수렴청정을 거두다
12) 원범을 사이에 두고
13) 원자의 탄생
14) 영혜 옹주
15) 박영효
16) 진주민란
17) 순원왕후 승하
18) 동학 창도
19) 국구 김문근의 죽음
20) 삼정문란
21) 전계대원군
22) 흥선대원군
23) 철종과 고종
24) 추사 김정희
25) 김대건 신부
26) 천주교 박해
27) 외세 침입
28) 철종의 후궁
29) 효명세자
30) 선정왕후
31) 강화도 5년
32) 복녀의 무덤
33) 옛 친구들
34) 용흥궁
35) 치마폭에 휩싸여
36) 날로 쇠약해지는 원범
37) 원범의 죽음
38) 철종 대왕
39) 예릉
40) 철종 장황제와 철인 장황후

원범은 쫓기듯 강화도로 왔다. 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원범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왕족이라는 사실도 잊었다. 아니 잊고 싶었다. 왕족이기 때문에 항상 위험 속에서 살아야 했다. 원범은 아버지가 역모로 몰려서 끔찍하게 죽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 죽음을 목격한 원범은 자신도 곧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강화도로 피신 왔지만 언제든지 누군가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원범은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다.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게 꿈이었다. 그런 원범에게 강화도는 천국이었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바다가 보였다. 여름에는 바다에 몸을 담그고 헤엄쳤다. 바다는 모든 걱정을 덜어줬다. 그곳에서 놀면 세상 걱정이 다 사라졌다. 산에 올라가면 산짐승이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원범은 산짐승을 잡으러 이 산 저 산으로 뛰어다녔다. 숨이 턱밑까지 파고 올랐지만 힘들지 않았다. 바다와 산은 원범에게 놀이터였다. 하루 온종일 놀아도 지루하지 않은 곳이었다.
“원범아!”
누군가 원범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원범은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원범의 얼굴이 활짝 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빨간 치마를 곱게 입은 앳된 소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어! 복녀!”
자나 깨나 생각하던 복녀였다. 원범은 복녀를 본 것만으로도 하늘로 올라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원범은 복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왜 그래. 남이 보면 어쩌려고.”
복녀가 몸을 뒤로 뺐다.
“보면 어때. 난 복녀가 좋은 걸. 너하고 같이 살 거야.”
원범은 입이 찢어질 듯 활짝 웃었다.
“누구 맘대로. 너 같은 농사꾼이 뭐가 좋다고.”
복녀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원범은 그런 복녀를 더욱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난 복녀 모든 게 다 좋아. 선녀보다도 더 예뻐. 넌 내 거야.”
원범은 복녀 손을 세게 잡으며 소리쳤다. 복녀가 손을 뿌리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원범이 워낙 세게 잡아서 손을 뺄 수 없었다.
“괜히 불렀네. 그냥 집에 갈 걸.”
복녀가 귀찮은 듯 투덜댔다. 원범이 그 소리를 놓칠 리 없었다.
“우린 천생연분이야. 우리가 만난 것은 하늘이 정해 준 거라고.”
원범은 복녀만 보면 기분이 좋았다. 복녀는 원범이 너무 자신을 가까이하려고 하니 부담스러웠다. 혼례도 치룬 처지가 아닌데도 원범은 복녀를 짝으로 생각했다.
“난 복녀 아니면 안 살아. 나에겐 복녀뿐이야.”
원범은 복녀를 보면 그 소리를 귀가 닳도록 했다. 원범의 마음속에 복녀는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원범은 복녀와 헤어지고 집에 오면 온몸을 뒹굴었다. 복녀가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날 원범은 붓을 꺼냈다. 복녀 모습을 직접 그리기 위해서였다. 먹을 갈고 화선지를 폈다. 낮에 봤던 복녀 얼굴을 떠올렸다. 붓을 들어 먹물을 묻혔다. 붓을 잡은 손은 떨렸다. 원범은 조심스럽게 한 획 한 획을 그었다. 서서히 그림이 윤곽을 드러냈다. 원범이 잡은 붓은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마치 학이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붓은 조금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아름다운 곡선이 나타났다. 눈, 코, 귀, 입 등 얼굴 윤곽이 또렷이 드러났다. 누가 봐도 아리따운 여자 얼굴이었다. 원범은 복녀 얼굴을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똑같이 그렸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자 원범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림을 그리기 전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원범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이 그린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림은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럴 듯 한데.”
원범은 만족스러운지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원범은 복녀를 만나면 그 그림을 꼭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범은 하루라도 빨리 복녀를 만나고 싶었다.
밖은 어두웠다. 해가 져서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그 시간에 복녀를 만나기는 힘든 일이었지만 원범은 복녀 생각뿐이었다. 원범은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런 뒤 쏜살같이 언덕을 달렸다. 복녀 집을 향해 달려간 거였다.
어느새 원범은 복녀 집에 다 왔다. 주위는 칠흑이었다. 원범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그 깜깜한 거리를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달렸다. 원범 자신도 놀랐다. 어떻게 그토록 빨리 복녀의 집을 찾았는지 신기했다. 원범은 헛기침을 했다. 혹 그 소리에 복녀가 밖으로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 헛기침을 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원범은 애가 탔다.
그 때 수염을 기른 어른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복녀 아버지 같았다. 원범은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그 어른이 원범에게 다가왔다.
“웬 놈이냐? 왜 남의 집 앞을 서성이느냐?”
원범은 겁이 났지만 침착하게 어른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어르신. 저는 이웃 마을에 사는 이원범이라고 하옵니다. 복녀에게 전해 줄 게 있어서 염치 불구하고 늦은 시간에 찾아왔사옵니다. 복녀와는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사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어른은 원범을 아래위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행색은 초라했지만 얼굴에서 왠지 모를 빛이 났다. 어른이 보기에 원범은 보통 사람 같지 않았다.
“복녀에게 전해줄 게 있다고? 복녀는 무남독녀 내 딸이야. 내가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여기는 딸이지. 위로 오빠와 언니가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었어. 어두운데 안으로 들어오게. 복녀를 불러오겠네.”
어른은 원범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원범은 어른이 뜻밖에도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자 기분이 들떴다. 장차 장인어른이 될 분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잘 보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어른은 소리쳤다.
“복녀야!”
그 한 마디에 복녀가 부리나케 문 밖으로 나왔다.
“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원범과 복녀가 두 눈이 마주쳤다. 복녀가 눈을 크게 떴다.
“원범아!”
“복녀! 너에게 줄 게 있어서 왔어.”
원범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어른은 원범과 복녀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거였다.
“둘이 편하게 얘기하게. 늙은이가 여기 있으면 불편하잖나.”
“아니옵니다. 괜찮사옵니다. 장인 어른!”
원범은 어른이 자리를 피하는 것을 막았다. 그때 말이 헛나왔다.
“장인어른? 내가 벌써 자네 장인이 됐나? 껄껄 껄껄.”
어른은 아주 호탕하게 웃었다. 복녀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원범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동안 웃으며 자리를 피하는 어른 뒷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데 이 밤에 우리 집에 다 왔어?”
복녀가 새침하게 물었다. 원범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너에게 꼭 전해줄 게 있어서. 생각난 김에 빨리 주고 싶었어. 이걸 안 주면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달려왔어.”
그 말을 듣고 복녀는 원범이 손에 든 것을 쳐다보았다.
“그게 뭔데?”
원범은 복녀에게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건넸다. 복녀가 조심스럽게 원범이 건네준 것을 받아 펼쳤다. 제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본 복녀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이거 네가 그린 거야?”
복녀가 깜짝 놀라며 원범에게 물었다. 원범은 어깨에 힘을 잔뜩 넣으며 웃었다.
“그래. 널 생각하면서 그렸어.”
복녀 표정이 밝아졌다. 원범에게 그런 손재주가 있는 줄 몰랐다. 원범이 그림을 그린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토록 뛰어난 실력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 원범이었다. 혼자서 그림 실력을 키운 거였다.
“제법인데.”
복녀가 만족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마음에 들어? 앞으로 얼마든지 더 그려줄 수 있어.”
원범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웃었다. 원범은 복녀가 기뻐하는 모습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당장이라도 복녀에게 같이 살자고 고백하고 싶었다. 원범이 복녀에게 건넨 그림 한 장은 사랑 고백이었다. 원범은 복녀와 혼례를 올리고 싶었다. 원범은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복녀야! 나 너 좋아해.”
원범의 목소리는 떨렸다. 복녀 얼굴이 붉어졌다.
“난 아직 널 받을 준비가 안 됐어.”
복녀는 좋은 듯 아닌 듯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복녀야!”
원범이 복녀에게 다가가 끌어안았다. 복녀가 몸을 움찔했다.
“왜 그래. 난 아직 널 받아줄 준비가 안 됐다고 했잖아.”
복녀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원범을 뿌리쳤다. 복녀가 원범을 뒤로 밀었다. 원범은 뒤로 자빠지듯 넘어졌다. 원범은 바로 일어섰다. 그대로 물러설 원범이 아니었다.
“나 그냥 못 가겠어. 어른께 내 마음을 고백하겠어.”
원범은 복녀 아버지를 찾아가 얘기할 생각이었다. 원범은 꼭 복녀를 차지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왜 그래. 아버지는 내가 싫다면 그대로 하는 사람이야.”
복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바로 그때 복녀 아버지가 나타났다.
“젊은이 아직 안 갔나? 무슨 얘기가 그렇게 많아.”
어른은 원범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원범은 놀랐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어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장인어른! 소인은 복녀와 꼭 혼례를 해야겠사옵니다.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원범은 어른에게 매달렸다. 복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원범은 거의 사생결단 하듯이 어른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야! 이 못 돼먹은 놈아. 네 놈이 아무리 복녀를 좋아한다고 해도 싫다고 하면 물러나야 하는 법이야. 어디 못 배운 놈이 애걸복걸이야. 너 같은 놈에게 내 딸을 줄 수 없어.”
어른은 완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