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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원의 시집 『낯선 영혼』. 이 시집은 유재원의 시 작품을 엮은 책이다. 책에 담긴 주옥같은 시편을 통해 독자를 시인의 시 세계로 안내한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는 검정 세상에서 별 하나의 진실이 무슨 소용일까. 구름이 내려앉던 산마루에도 황사 같은 먼지가 잔뜩 끼었다. 물은 땅 위에서 강을 만들어 흐르기도 하지만 흙속에 스며들어 흐르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세심히 쪼개낼 수 있는 시선으로 한 시대를 바라보며 내 마음이 불순한 사상과 흥정할 때는 이 글을 꺼내놓고 영혼이 출렁거리도록 채찍질하겠다. 꽃향기에 취한 바람을 타고 마음대로 흔들릴 수 있는 인간성 회복의 강에서 날마다 밟히는 징검다리 돌로 사용하겠다. 연신 시절이 변해도 정성을 보태 현실에 실존하는 시를 남기겠다.

제1부 낯선 영혼
흰나비 17
장독대 18
낯선 영혼 19
어머니 꽃 20
할미꽃 시절 21
무덤 가는 길 22
요령소리 23
만장을 들다 24
달공의 노래 25
이장 26
몽당빗자루 27
소박 맞은 여인 28
모듬살이 29
꺼꾸리 30
금계랍의 추억 31
주사를 맞으며 32
섬의 여자 33
이명 34
달 35
종이학 날다 36
원죄 37
풍등을 보며 38
고독한 영혼 39
언젠가는 40
보리밭에는 종달새 41
제사상의 촛불 42

제2부 그물거두기
공황장애 도시 45
도시는 공사판 46
그물 거두기 47
개 판 날 48
민물 낚시 49
달력 50
두드러기 51
인생 52
건망증 53
허물 54
고독한 양심 55
오늘의 현장 56
등잔불 57
장승 58
기도의 역습 59
현기증 60
오두막집 61
황홀지경 62
가슴을 열어도 63
기적소리 64
고일 목 65
황사의 도시 66
다리 밑 더부살이 67
하루 68
징 울음 69
재개발지역 70

제3부 불두화를 보며
징검다리 73
물방울 무늬 74
불두화를 보며 75
까마중 76
소쩍새 울음 77
곰팡이 닦기 78
구름 79
이별 80
불나비와 등불 81
달빛 82
가을의 향기 83
산장의 밤 84
가슴 아픈 새 85
내연녀 86
민들레 등불 87
차 한 잔의 여유 88
가로등 89
고목 90
배꽃 91
밤하늘을 보며 92
몸살 앓는 밤 93
낙엽 속에서 94
꽃잎 여자 95
목련꽃 가로수 96
작부의 노래 97
도시의 보름달 98

제4부 맨발의 자유
고독한 시간 101
허물벗는 남자 102
맨발의 자유 103
목욕탕에서 104
외로운 꿈 105
군소리 106
죽음의 천사 107
피뢰침 108
달걀을 삶다 109
예수 장사 110
천년 나무 111
홀아비 집 112
열대야 113
소주 인생 114
여우비 115
벼랑 끝에서 116
우렁이 껍질 117
돌팔매 118
싸리비 인생 119
복날에 120
디딜방아 121
땀 흘리는 사람들 122
촛불은 꺼지고 123
쇠꼴 베는 마음 124
회오리바람 125
옥수수 밭에서 126

제5부 철거목 의자
잿빛 인생 129
보릿고개 130
철거목 의자 131
섭다리 132
별과 영혼 133
골목길 134
벌목 인생 135
산지기 노인 136
바다와 나 137
불면의 시간 138
봄이 올 때 139
빙하 속에 새겨진 말 140
섬 그늘 141
들길을 걸으며 142
풍경소리 143
겨울 뒷모습 144
숲에서 145
장작 난로 146
광장 147
금목서 가을 148
오름을 밟다 149
겨울 150
이 시대의 야수 151
찬바람이 불면 152
외로운 인생 153
간격을 보다 154

나의 시론 _ 155

흰나비
뒤란 장독대 곁에 심어놓은
봄빛 젖은 장다리는 훌쩍 크고
마음 헹구어 내던 정화수에서
소원이 모시적삼 입고 날아갔다
기억 속에 철없이 핀 상사화
아직 붉은 사연이 남아 아련한데
전할 말 잃어버린 목구멍에서
쏟아지는 건 가시같은 고독이었다.
더 이상 벌릴 수 없는 세월 틈으로
애써 투명하게 이륙하는 작은 날개
첫눈보다 하얀 상승의 자유가
인생 항로 줄기를 붙잡고 치솟았다
언덕을 휘적휘적 넘어가던 인연이
찔레꽃 같은 영혼을 덜어내며
낯익은 목소리로 속살거릴 때면
가슴 아리게 슬픔이 밀려왔다
흰나비 날아가고 장다리꽃 진 자리
말간 그리움이 소복하게 쌓였다

장독대
소갈증으로 물을 퍼부었던
몹시 배고픈 항아리마다
별들이 그리움을 쟁여놓았다
장 뜨는 냄새가 외돌아도
햇빛이 내려 번들거리는 장독대
누구도 뽑아낼 수 없는 슬픔이
마른 가슴에 대못처럼 박히면
바람에 나부끼는 사시나무 잎은
하얀 치마를 질근 동여맸다
뒤 꼍에서 소원을 토렴하는 여인이
항아리의 사연을 끄집어내도
장독대는 기억이 침전하는 세상
살갗에 각질로 붙은 시집살이가
반지 같은 세월을 꿰고 있다
빗물에 쓸려간 꽃잎 시절
바람이 치마를 붙잡고 칭얼대면
어느새 하늘은 노을이 물들고
여인의 향기는 더욱 짙어졌다

낯선 영혼
떠나는 배 뒷모습을 붙잡고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이
마른 가슴에 그리움을 들여놓았다
천길 벼랑 끝에서 불거진 갈증
풀무질로 달구어진 저녁노을이
연신 표정없는 꽃잎으로 떨어지면
어둠을 엮어 이엉으로 덮은 지붕에
마실 나온 별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도가니처럼 현실을 녹이던 달빛이
오목한 소원을 말갛게 고아내고
짧은 하루 기억을 남김없이 지웠다
아무것도 머무를 수 없는 허공으로
솟대가 한 마리 새의 형상 벗어던지고
낯선 인연을 고리로 연결할 때
인생은 시간 밑에 고일 목으로 끼었다
매듭을 풀고 굵어진 영혼의 미소가
욕심을 비워내지 못한 마음에서
납작해진 풍경을 개운하게 빼냈다

어머니 꽃
세월이 갈라놓은 주름 사이
별들은 바람꽃으로 날았다
삭신이 쑤시는 신경통 무게가
다부지게 쌓은 돌담장에 부딪쳐
앙살하며 떠나는 시간은 부산한데
한 여자를 노예처럼 부리면서
가슴에다 우렁이껍질 둥둥 띄우는
속살 파먹은 자식이 무슨 소용인가
둥근달을 바라보며 삭히는 울화증
은비늘 뿌리고 슬픔을 가늠했던
달빛이 초가지붕 박꽃으로 피었다
열병앓는 사랑 아낌없이 발라내고
마른 젖내를 쉬임없이 토해내고
둥구나무 같았던 허리가 휘어지면
얼굴에 무수히 찍히는 반점들
어머니의 그을린 저승꽃이 피었다
날마다 등이 배겨 누울 수 없는
생을 지탱했던 영혼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