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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리의 시집『달을 배회하다』. 《노랑지빠귀의 고백》, 《은행나무 아래 서다》, 《가을비, 떠나는 소리》, 《아름다운 나무》, 《웃음꽃 피우기》 등 다양한 시를 감상할 수 있다.

2010년 《심상》으로 등단한 서정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달을 배회하다』가 《시로여는세상》 시인선으로 나왔다.
서정리 시는 무엇보다도 서정시의 길을 사색하듯 조용히 걸어간다는 점을 큰 미덕으로 꼽을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의 주요 관심사인 시적 제재와 형식을 통해서 또렷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자연을 관조하는 그윽한 눈빛으로 포착한 대상을 ‘단아’하고 ‘정결’한 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68편의 작품들에서 그 특성이 거의 일관되게 드러나는 것은 시인의 시정신이 서정성과 서정시의 장점에 대해 깊이 의식하고 있다는 징표이다. 이러한 시인의 시정신은 혼탁한 현대사회와 혼란스런 현대시의 형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반영한다. 바꾸어 말하면 ‘흩어지고 모아지는’ 자연의 질서를 조용히 관조하고 침잠하는 시인의 시안(詩眼)은 맑은 세계에 대한 꿈을 형상화하는 방향으로 열려 있는 셈이다. 그 길로 매진하기 위해 시인은 잡다한 생각의 가지들을 가능하면 많이 잘라내고 단정한 시의 모습으로 그려 내놓았다. 그 결과로 빚어낸 은은한 작품들은 이 시대에 왜 새삼스레 서정시법이 우리에게 따뜻하게 다가오는지, 그 까닭을 심각하게 되짚어보게 한다.

│평론│

시집을 관통하는 서정리 시인의 정서는 다정하고 감응을 희구하며 상대에게 다가가고 있다. 예를 들어 「섬 쪽으로」에서는 "일상의 나날/ 나태함까지 밀치고/ 낯 선 기억 찾기/ 낯 선 바람 쐬기"라고 표현을 한다. 또 「난초」에서는 프랑수아 쿠프랭의 클라브생 모음곡 6번 "신비한 방벽"을 차용하여 "시간을 젖히면/ 차곡차곡 쌓인/ 장마/ 햇살에 널다"는 구절로 대변하였다가 "맑음/ 또옥 떨군 잉크색"으로 변주되고 마침내 "물방울은 그녀,/ 한 점의 수채화"로 물무늬로 그리는 시편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이렇듯 시인의 따스한 마음과 섬세한 감성은 대상과 동화된다. 많이 등장하는 꽃 이름과 풀 나무 이름들에게 감정이입이 되고 있어서 확인된다. 그녀는 또한 메시지를 은유와 상징으로 에둘러 말하려 하지 않고 정직하게 노래하는 편이라서 고독, 슬픔, 우울, 세월, 상처에 따른 기분들이 진솔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9월의 편지」에서 "로렐라이 언덕을 바라"보는 화자가 등장하는데 "삶은/ 출렁거리며 흐르는 것"이라며 "후회"하는 감정이 여과 없이 노출되는 사례를 들 수 있다.
형식면에서도 "시는 사물의 인상을 최소화로 응축시킨 것"이라는 허버트 리드의 말을 따라서 짧은 시를 선보이는 경향이 있고 기저에는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과 휴머니즘이 깔려있다. 이번 시집의 많은 분포를 이루는 ‘그리움’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인간미 따스한 주제로 귀결이 되고 있다. 이때 사물을 직관력으로 보고 느낀 마음을 조촐하게 엮어낼 뿐만 아니라 추억으로 넘나드는 시공간을 접하게 된다.

― 박수빈(시인, 문학평론가)

1부
숨은 빛
노랑지빠귀의 고백
달을 배회하다
책 읽는 여름
목 백일홍 핀 언덕
꿈꾸는 봄
시인
노란색 프리지어
성에서 내려와
섬 쪽으로
빛이다
호수 마을
백야
첫사랑
난초
아침 산책
소월 길

2부
9월의 편지
창포원
국화 분
시월애
길 따라
은행나무 아래 서다
부리도의 하루
가을 연가
오후
소슬바람
귀가
서리꽃 흔적
가을비, 떠나는 소리
이별과 만남 사이
면회
11월의 편지
정든 길

3부
눈 내린 저녁
겨울 벤치
화롯불
세밑 풍경
모퉁이 길
아차산
따뜻한 사랑
박물관 길
솜다리꽃이 서랍에
까치집
청매화
오! 나무네
물푸레나무
자금우, 2012
그림엽서
아름다운 나무
두 번째, 봄 길

4부
내가 좋아한 고욤 꽃
달달한 사랑
핑크빛, 퍼즐 맞추다
비모란 선인장
내 사랑은
깨알 사랑
초록 매실 담그다
푸름
취암동 길
밤꽃
시계꽃
웃음꽃 피우기
초롱꽃목
원두막
할미꽃
외가 가는 길
묘지의 꽃

해설
시간의 저편, 뮤즈의 선율 _박수빈

달을 배회하다

잠시,
달의 속으로 날아 들어가
메밀꽃을 하얗게 피워보고
목화솜 송이도 보드라웁게
보드라웁게 부풀리다
반 뼘쯤 세상 밖으로

어느
허름한
사월의 밤
스믈 스믈
어수룩한 별이
풀피리 불던 언덕에
봄바람 타고 내려오다
스르르륵

휘파람새는 저 먼저 꽃잠 들고

그 여자와 그 남자
두 사람의 인연을 누가 알랴마는

달을 휘몰아 가는 달그림자의 무리다


책 읽는 여름

조심스레 한걸음 떼고
밤사이 꽃들은 안녕하신지

사각사각 신문 넘기는 소리
세상은 무탈하신지

빠끔히 열린 틈새로
얕은 숨소리

외딴 방 지키는 마알간
별 하나

별보다 더 먼 저편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온

열릴 듯 열릴 듯 반쯤 잠긴
어느 빛, 책장을 넘기며

대신할 수 없는 슬픔으로
그대 깨어나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