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적립 안내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선정한 2004' 올해의 추리소설 모음집. 논리와 감각으로 무장한 추리작가들이 펼지는 지적 모험과 서스펜스의 세계를 담아낸 책이다. 해마다 출간되는 이 작품집은 한국 추리문학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올해에는 중견작가에서 신인작가의 작품까지가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으며 소재나 주제, 그리고 표현양식에서 에로티시즘이 작품 전반에 드러나 있는 우리 시대의 성문화의 주소를 보여준다.

추리문학, 어떻게 읽힐 것인가? 반 다인이나 녹스의 계명－약간의 수정을 가할 순 있지만 그 고유한 정신만큼은 버리지 않는다면－에 충실히　따르는 작법은 오래 전부터 공격을 받아 왔다. 유럽에서 수수께끼 풀이형 추리소설의 황금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니 그 전성기에 보다 문학적이라고 인정받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등장한다． 이것은 추리문학사의 무게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갔음을 보여주는데, 추리문학은 ‘추리’이어야 하는가, ‘문학’이어야 하는가 하는 논쟁도 따지고 보면 추리문학사의 이런 흐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2０세기 전반 일본에서 벌어진 마각논쟁(추리문학에 예술성이 필요한가 하는 논쟁）은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추리문학사적인 사건이다. 그런 논의가 문학지를 통해 사회문화적　원으로 외화된　것은 일본 추리문단의 수준이 가늠될 있는 바로미터와도 같다． 　 -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문제를 자신의 추리문학의 근간으로 삼은 우리 작가는 유우제이다. 유우제는　추리문학은 ‘문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탐정의 눈으로 본 인생’이라는 심농의 주제에 매료된 이　작가는「밤」이라는 작품을 통해 선배들의 옹졸한－유우제가 보기에－추리문학관을 극복하려고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마는데, 그 이유는 「밤」의 내용이 여전히 가족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황하게 설명할 수 없으므로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의 숨은 노력은 노원이 접은　종이학을 풀어헤쳐 놓은 것에 불과했다．　　　　　　 - 한데, 어제 오늘에 이르러서는 추리냐 문학이냐는 문제의 틀 자체가 진부해져 버렸다. 우리가 추리에도 문학에도 충실하지 못한 사이－변명 같지만 이것은 추리작가만의 문제는 아니다－세월을 실은 배가 저만치 흘러가버린 것이다．　 　물론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추리문학의 본질적인 가치가 완전히 훼손된 것은 아니나, 추리문학을 뒷받침했던 국가적·사회적·문화적 가치들이 도전받음으로써 추리문학 자체가 의문시되는 형국에 이르렀다． 　 - 이번에 선을 보이는 작품에서도 부분적으로 그런 현상이 드러난다. 다소의 편차를 눈감아 평가할 때, 김정랑의 「파스퇴르의 휴일」과 김상윤의 「네트런너」는 기존의 반전 형식을 답습함에 불구하고 추리문학에　관한 한 스스로 해체적이 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을 다루고 있다. '텍스트'에서 '현실'로의 반전이 진정한 반전일 수 있는가. ‘파스퇴르의　휴일’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거의 전부가‘텍스트’임을 눈치해지　못하게 하는 데서 반전이 생겨나지 않는가. 그것이 웃고 넘길 맹랑한 수작이 아니라면, 대체 현실(real)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던져진다．　　 「네트런너」는 약간 다르게 현실 감각을 상실한 현대인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현실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것, 약간 비약한다면 대중들은 무엇이 현실인지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만다． - 컴퓨터라는 기계를 등장시킨 두 소설의 공통점은 사뭇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텍스트가 현실에 침투해 올　때 현실이 얼마든지 조작가능한 무엇이 될 때 과연 추리문학은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불황에 허덕이는　출판계의 사정보다 우리가 처한 위기의 핵심일지 모른다．　 그에 반해 각기의 특색을 무시하고 거시적으로 본다면, 이수광의 「검은 머리의 외국인」, 김상헌의 「슈퍼모델」，최종철의 「면도날 블루스」, 황세연의 「동기」는 기존의 「추리」에 충실한 작품이랄 수 있겠다. 감쪽같이 사라진 흉기와 조작된 살인현장, 레즈비언 중 누가 범인인가 라는 문제 그리고 알리바이 조작 등은 전형적인 추리적 요소이다. 따라서 이 소설들의 재미는 그런 요소가 얼마나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면서 논리적으로 전개됐느냐에 성패가 달려있게 될 것이다．　 - 이와는 달리 김연의 「벌레」와 권경희의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남자」 그리고 김유철의 「그리고 그곳에서는」은 기존의 전형적인 추리적 요소보다는 각각의 독특한 흡인력을 느끼게 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벌레」의 경우　욕정 그 자체인 남자들을 죽여가면서 스스로 벌레가 되어가는 아이러니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또한 작품 「그리고 그곳에서는」은 스토리의 일정 부분만 보여줌으로써 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재치를 발휘하고 있다．　　　 과연 이들 중에 어느 부류의 작품이 더 독자에게 흥미를 줄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던 남자 - 권경희
슈퍼모델 - 김상헌
검은 머리의 외국인 - 이수광
동기 - 황세연
파스퇴르의 휴일 - 김정랑
그리고 그곳에서 - 김유철
네트런너(net-runner) - 김상윤
벌레 - 김 연
면도날 블루스 - 최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