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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체를 통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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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오랜 혼돈 끝에 열리는 개안(開眼)의 세계, 그리고 108편의 시들.

고형렬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유리체를 통과하다]가 실천문학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는 특히 존재와 인지에 대한 시인의 전복적 성찰이 돋보인다. 고형렬은 독특한 의미구조, 명민한 감수성 등 그동안 자신의 시작(詩作)활동에서 견지해온 방법론을 철저하게 배제시킴과 동시에 시간의 투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발견하는 관습화된 인식의 과정조차도 거부한다. 환갑을 앞둔 시인의 생물학적 나이와 30년을 훌쩍 넘긴 시력(詩歷)을 고려해보면 전복과 갱신의 이미지가 시집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지점은 조금 낯설게 다가온다. 시인은 그것을 두고 스스로 “천변만화”라 부른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욕망은 망각으로 씻기고, 상처 입은 육체와 나쁜 기억에 시달리는 마음은 투명한 눈물방울로 허물을 벗는다.”며 고형렬의 시적 갱신에 주목한다.

그녀의 가운에는 핏물이 묻어 있다
죽음의 냄새가 풍긴다
꽃이 피었단 진 자리는 까맣게 탔다
가운은 자신을 껴안은 채 잠든다
가운엔 고통이 숨어 있다
의사는 퇴근하고 늙은 간호사 혼자
잠든 암 옆에 졸고 있다
젊은 시인의 시집을 펼쳐 든 채
멀리 무서운 새벽이 개안하고 있는
청춘들이 지나간 첫새벽
지구를 찾아오는 생명들이 울고 있다
-[그녀의 가운 2]

시집에 수록된 시는 총 108편이다. 결국 이번 시집은 번뇌의 산물인 것이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108번뇌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뜻(意)의 6근이 색(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감촉(觸), 법(法)의 6진을 만나면서 발생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이 세계를 마주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고형렬은 이 번뇌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시인의 말에서 “이 새로운 전이(轉移)와 인식은 이사이다. 아직도 나의 시는 렌즈에서 시작하고 끝날 수밖에 없다. 한 덩이 혼돈의 떡을 108개로 떼어 다시 하나로 묶은 이것은 어둡고 불분명한 의식의 파편들이다. 이것들이 어쩌다 내가 찾은 나의 정체와 분신이다.”라고 고백한다.

[유리체를 통과하다]에서 시인은 놀랍게도 번뇌에서 오는 허무를 동력으로 자신의 내부에 또 하나의 우주와 지구를 창조하여, 비밀스럽게 새어나오는 혼돈의 말들을 제작하고 편집한다. 그는 인간이 인간의 눈으로 질서화한 혼돈 이전의 눈 먼 혼돈 속으로 내려가, 그 수많은 작고 미세한 자아들이 광속으로 생성해내는 혼돈의 메아리를 엿듣고 받아 적는다. 이렇게 불완전한 사랑은 완성되고, 이렇게 불완전한 시행은 완성된다. 그는 이제 자신을 감금하고 문밖에서 말한다. 그의 시편들은 그러한 절대적 허무 속에 숨겨놓은 광물들이며, 보석들의 숨결들이다. 표면상으로는 소란스러운 혼돈이지만 그 밑에서는 매우 민감한 속삭임이 ‘파동의 잎파랑치’처럼 존재와 생명을 만들어간다.

시인의 말

4년 전 한 시골로 내려와 파묻혀 살면서 나는 낯선 나를 만들고 싶었다. 야릇한 절망의 끝이 만져졌다. 나에 대한 반성과 반작용의 작업들이 내 어두운 눈구멍을 활짝 열어주길 바란다.
감히, 그리고 어느새, 육십(六十) 앞에 왔다. 천변을 겪고 만화를 맞는 이 새로운 전이(轉移)와 인식은 ‘이사’이다. 이 강을 건너간 쟁쟁한 시인들은 무언가를 한 가지씩 얻어간 것으로 안다. 초월하고 번지고 생략되어 사라지는 물빛 같은 정신의 언어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찢어진 눈 밖에 창상(創傷)은 수많은데 해결(解決)은 없다. 아직도 시는 이 렌즈에서 시작하고 끝날 수밖에 없다. 한 덩이 혼돈의 떡을 108개로 떼어 다시 하나로 묶은 이것은 어둡고 불분명한 의식의 파편들이다. 이것들이 어쩌다 내가 찾은 나의 정체와 분신이다.
시란 무엇인가. 33년 써왔지만 나는 시의 불가지론을 믿는다. 이 부지(不知)가 시를 쓰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길을 모르고 걸어왔으니까 앞길도 모르고 걸어갈 것이다. 자신의 길을 혼자 가는 시를 따라간다.
이 악몽의 시들은 모두 신작이다. 언어에 속도를 내고 서사를 줄여보고 간결한 형식을 취했다. 끊어질 순 없는, 무사(無事)의 우둔처럼, 일성순(一成純)의 자연에서 뒹굴 것이다.
-2012년 지평(砥平) 갈지산 밑에서 고형렬

추천사

고형렬은 태양을 너무 오래 쳐다보아 눈이 멀어버린 것 같은, 이 시대의 장님 천재이다. 신작으로만 꾸린 그의 이번 시집은 사물의 절대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자기 자신의 눈을 버리고 사물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눈 먼 자의 시선에 잡힌 혼돈의 말로 가득하다. 혼돈의 가장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아무도 본 적 없고 만진 적 없는 이 생명의 언어들은 너무나 작고 미세하지만, 그 작은 것들의 중심은 광속의 에너지로 들끓는다. 사물이 저 스스로 말이 되도록 이 장님 천재는 자신을 버린 채 그렇게 문을 열어둔다. 장님의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같은 사물의 순결한 혼돈에 자신을 내어준다. 그의 시편들 앞에서 나는 현기증이 인다. 아아, 이것은 내 안에 잠든 언어들인가, 장님들의 해마 속에서 찍어낸 슬픈 꿈인가.
- 박형준 / 시인

목차


안경
그녀의 가운 1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우리나라 새
장님 천재
연금된 한 시인의 반성
거미, 눈이 멀다
거세(去勢)의 시간
결사적인 생애
지구의 중심
더러운 물고기들의 옷
고층빌딩 밑에서 농담을
악어에 대한 상상
지구, 한 컵의 물
나는 계단에서 웃을 수 있다?
개기월식 1
한 고층빌딩의 영지(靈地)
십자못과 십자드라이버의 노래

고도 1
기초생활수급권자의 빗방울
나목(裸木)을 보는 순간
나무망치로 그의 머리를
태양을 쳐다보는 관찰
한 남자의 메뚜기
나의 침실에서
테헤란로의 겨울
형광안저촬영실에서
흰 변기의 여자
원자로의 나라에서
사랑의 섬을 위하여
하나하나의 잎들처럼
한 번씩 도시로 나갔다가
육식(肉食)의 밤
성욕을 나누는 자들의 반대자
편집위원회
역사의 순환선에 서서
불면증
반년의 지옥
아름다운 물고기
은빛투명전자볼펜의 도시
이미 책장이 바스러지는 책의 가을
밤과 낮
다른 나라의 광화문 사거리에서
눈 오는 산수병풍
렌즈 속으로 도망치는 시인
마음의 0시 6분
새벽 APT
산신령
아, 인생 뜬구름
또 한 번의 밑바닥의 밑바닥에서
한 켤레 구두
그 산
고도 2
거대한 사진기
마지막 손가락 하나
필라테스 링
나에게 눈길 한번 줘봐요
빗소리
K의 비밀
흰 엉덩이의 여자
피임 사회
철제 의자
그 남자 집 단풍나무는
여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늑대와 함께한 순간의 기억
토마토 사랑법
손의 존재
유리체를 통과하다
사슴의 뿔을 자르다 1
비가 그치다
돌려받은 시계
시인의 사업
무명 장님 시인의 꿈
연금(軟禁) 생활자의 책
단풍옷 한 벌
젠장, 자유란 이런 것
장마 속의 푸른곰팡이
인간적인, 전기의 문제
제국 도시의 밤
황금박쥐가 부패를 막는다
부서지는 명태 대가리
카메라
통화(通化) 시편
북극
풀쐐기
비명 지르는 북두칠성
그믐밤의 장님
밤, 화신백화점 앞에서
문 닫히는 소리, 쾅
사슴의 뿔을 자르다 2
염좌나무의 그날 아침
크리스마스 리스
지독하게 춥고 우울한 날
신성한 코끼리
죽음 밖에서
마지막 도시의 창상(創傷)
또, 설악산
시간을 본다
혼돈의 신이 찾아오다
뒤란에 눈 오는군
아 어쩐지, 프란츠 카프카의 성(城)
그의 잠지를 잡고
개기월식 2
그녀의 가운 2
평면의 지옥
하하하, 바보 달밤

발문 황현산
시인의 말

본문중에서

마지막 도시의 창상(創傷)

겨울비가 젖는 누덕지고 오래된 도시
아직도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 뒤쪽
몇 개의 동공이 열렸다 닫힌다
그 후사경의 배경은 모두 금이 갔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들
모두가 헤어졌거나 다시 만난 사람들
자신을 자신이 보고 있는 몰골들
새로워지는 것은 늙어가는 것뿐
뚜, 뚜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온다
지붕 없이 젖는 아픈 도시의 거리에서
어이 하리, 밤눈이 시작한다,
또 꿰매는 도시의 상공을 쳐다보면
검은 동공 속, 창상의 눈이 쌓인다
불타다 뒹구는 검은 기억의 도심 한쪽
한 영혼은 이 거리를 떠나고 없다


개기월식 2
-지평, 2011년 12월

우주가 하늘의 가등을 꺼버렸다
돌연 밖이 캄캄해진 지구의 한쪽
태양 빛을 받아 마당을 비추던 언어가
사라졌다, 지혜의 책도 함께 사라진다
지구권을 건너는 달이
먹통의 카메라 속에 쾅 굴러떨어진다
가끔은 하늘의 밤이라도 보아야 한다
지구가 천공의 가리개를 덮은 채
통째로 달을 집어삼킨 지구
자기 눈동자 속에 달을 집어넣었다
이렇게 한 번씩은 안아주어야 한다
멋대로 떠돌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너무 오래 잊지 않기 위해
저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도


그믐밤의 장님

그믐밤의 나는 장님이다
나는 밤이고 되고 밤은 장님이다
빛이 존재하는 곳이라곤 없다
반지를 만져본다, 그믐이다
어둠이 깊숙이 안쪽까지 박혀 있다
정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밤은 강고한 영하의 활엽 교목
접붙인 활착이 팔을 뻗는다
밤은 광석만큼 단단하다


북극

우리집 마당은
눈이 녹아 흙이 드러난 북극의 검은 머리 같다
얼룩거리고, 갈증 같고, 비가 올 것 같고
그리고, 그리고 또 뭐라고 할까,
모든 것이 끝나버린 뒤의
저 어른거리는 건양(建陽)의, 서서 들어오는 빛들은,
빛의 새들이라 할까, 창자라고 할까,
태양의 완성이라고 할까,
흙 묻어 더러워진 눈
그 지구 지각을 뚫고 풀의 용들이 솟아나온다
마른명태 같은 검은 슬픔의 울음소리로

누가 꽂아두고 가버린, 푯대의 깃폭 하나로 펄럭이는, 북극의 봄
그 파괴된 흙에 닿고 싶다
(/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54.11.08
출생지 강원도 속초
출간도서 44종
판매수 2,686권

낯선 현실과 영토를 자기 신체의 일부로 동화시키면서 내재적 초월과 전이를 지속해가는 고형렬은 15년 동안 삶의 방황소요와 마음의 무위한 업을 찾아 이 책, 장자 에세이 12,000매를 완성했다.

속초에서 태어나 자란 고형렬(高炯烈)은 「장자(莊子)」를 『현대문학』에 발표하고 문학을 시작했으며 창비 편집부장,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첫 시집 『대청봉 수박밭』 을 출간한 뒤 『밤 미시령』,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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