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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민중적 삶의 근저를 이루는'생활'의 여러 국면들을 향한 관심을 담은 시집 『빈 곳』. 우리나라 중서부,기호지방 빈곤계층 서민들의 비루한 삶에 틈 없이 밀착하는 시적 파토스는 단연 '진정성'이란 차원에서 부각된다.

☞ 이 책에 담긴 시

빈 곳

몇 개 뭉툭한 위로와 사무용 슬픔들이 첨부된 후,
그의 이름은 곧바로 삭제되었고
동사무소 직원의 손에서 내게 넘어온 서류는 헐렁하다
한 사람 몫의 이승이 지워진 서류를 들고서 2월의 거리로 나선다
음력의 추억들은 겨울바람처럼 흔들리기 시작하고
쉽사리 높낮이가 변하는 그래프처럼 온통 혼잡스럽다
아버지는 더 이상,
구름을 몰고 다니거나 위급한 근심들을 안겨 주지 못할 것이다
주인을 잃은 슬픔들은
기억 한켠에 그늘 한두 개쯤 더 장만하게 될 것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그의 집에 전화를 건다
순간, 날카로운 모서리에 찔리듯 화들짝 깨어나는 기억
아버지는 없다
밤마다 위급함을 이끌고 중환자실을 통과하던 사연들과
눈물을 빌러 그의 머리맡을 찾곤 했던 내 오랜 습관들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

아, 되돌릴 수 없는 막구름들
오늘 이후 나는, 되돌아올 것들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다
어떤 후회나 쓸쓸함은 모두 빈 곳이 되었다
세상의 뒷면이 된 아버지는 깊은 산속에 심겨졌고
이승의 휴일엔, 챙겨야 할 방문지가 하나 더 늘었다
이제 내 안의 금요일엔 폭설이 세상을 잠글 것이고, 빈 곳은 한동안
고체처럼 단단해질 것이다

제1부

누에
개성집
첫 월급
외국인 노동자
일기예보
봉합된 세상
노파
경포호
변기에 앉아서
고장 난 구역
서해에서
맨홀
가을,저수지에서
덕이네 자매
수집되지 않는 것들
바람,오월
북어
금지된 장소
천지간
소읍

제2부

흔한 풍경
킬링필드
빈 곳
백미러·1
보길도
유배지에서
마중물
공중폭발
석산리배추와 장미
어떤 봄·1
그 사내
진사리
날품
요강
담쟁이
그 여자
길
말
백미러·2

제3부

붉은 잠
무릎과 무릎
밥
유년
어름사니
자명종 시계
분청사기
냅일물
구절초와 마가렛
유년의 무던
속도의 부산물
낮잠
교복을 다리는 남자
바늘
귀걸이가 있는 풍경
누수
대추리·1
대추리·2
대추리·3
잣나무 숲

제4부

수장
송현상회
시포리
체납된 날들
의혹
점등
난전
여자
재생
무의도
고궁반점
잠복소
무게
수·우·미·양·가
추석
센토
PM 8:30
서건도
숨비소리

빈 곳

몇 개 뭉툭한 위로와 사무용 슬픔들이 첨부된 후,
그의 이름은 곧바로 삭제되었고
동사무소 직원의 손에서 내게 넘어온 서류는 헐렁하다
한 사람 몫의 이승이 지워진 서류를 들고서 2월의 거리로 나선다
음력의 추억들은 겨울바람처럼 흔들리기 시작하고
쉽사리 높낮이가 변하는 그래프처럼 온통 혼잡스럽다
아버지는 더 이상,
구름을 몰고 다니거나 위급한 근심들을 안겨 주지 못할 것이다
주인을 잃은 슬픔들은
기억 한켠에 그늘 한두 개쯤 더 장만하게 될 것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그의 집에 전화를 건다
순간, 날카로운 모서리에 찔리듯 화들짝 깨어나는 기억
아버지는 없다
밤마다 위급함을 이끌고 중환자실을 통과하던 사연들과
눈물을 빌러 그의 머리맡을 찾곤 했던 내 오랜 습관들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

아, 되돌릴 수 없는 막구름들
오늘 이후 나는, 되돌아올 것들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다
어떤 후회나 쓸쓸함은 모두 빈 곳이 되었다
세상의 뒷면이 된 아버지는 깊은 산속에 심겨졌고
이승의 휴일엔, 챙겨야 할 방문지가 하나 더 늘었다
이제 내 안의 금요일엔 폭설이 세상을 잠글 것이고, 빈 곳은 한동안
고체처럼 단단해질 것이다
(/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