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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왕국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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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역사가 돌보지 않았던 이름, 벨테브레 혹은 박연朴燕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한 사내의 영혼을 건 전투가 시작된다

380년 전, 낯선 땅 조선에서 이방인으로 살다 간 네덜란드인들의 이야기



동세대 어느 누구보다도, 당대의 얼굴, 당대의 성격을 적극적으로 성찰하고 감각적으로 돋을새김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온 작가 김경욱이 새 장편소설 [천년의 왕국](문학과지성사, 2007)을 출간했다. 1993년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래 다작의 부지런한 작가로 분류되어 온 김경욱답게, 이번 소설은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전작 [장국영이 죽었다고?](2005) 이후 2년 만에 선보인 책이고, 그의 장편 목록에서는 벌써 네번째에 자리하는 소설이다.

[천년의 왕국]은 작가가 2006년 여름부터 2007년 봄까지 계간 [문학과사회]에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한 장편이다. 앞서 가상공간을 실재의 현실세계로 탈바꿈시키는 영상세대의 적자로서 그 수다한 영상문화의 기호들에 접속하고 또 그것을 산뜻하게 변용한 글쓰기로 주목받아온 김경욱의 전작들에 익숙한 독자라면, 역사소설이란 범주에 한 발 담근 채로 머나먼 시간과 우주를 현재적 감각으로 노래한 이번 [천년의 왕국]에 적잖은 놀라움을 가질 것이다. 혹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멋지게 패러디한 그의 세번째 장편 [황금사과]를 읽은 독자라면, 숨겨진 역사를 무대로 하여 새로운 서사문법에 도전하는 김경욱의 근기(根器)에서 이번 작품을 예견했음 직도 하다. 이런 다양한 시선 혹은 요구들을 짊어진 채 김경욱의 [천년의 왕국]은 380년 전, 조선 땅 한복판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책장을 넘기면 이역만리 타국에서 이방인의 신분으로 살다 간, 분노의 눈물과 쓰디쓴 연민의 웃음으로도 다 보듬을 수 없었던 한 네덜란드인의 처절한 고백이 펼쳐진다.

김경욱은 17세기 조선에 표착했다가 일본을 거쳐 다시 네덜란드 땅을 밟았던 하멜이 써서 남긴 [하멜 표류기]에 기록된 한 줄 역사에 의지하여, 1000매를 훌쩍 뛰어넘는 애달픈 서사시 한 편을 창조했다. “1653년 여름 나가사키로 향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스페르베르호는 풍랑을 만나 제주도 해안에 좌초된다. 선원 64명 중 36명만 살아남았다. 생존자 중에는 후일 조선을 탈출한 후 13년 동안의 밀린 급료를 받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한 하멜도 있었다. 그해 가을 조선의 국왕이 보낸 사자가 제주도에 억류되어 있던 네덜란드인들 앞에 나타났다. 조선 국왕의 사자는 네덜란드인이었다. 이 네덜란드인은 26년 전 항해 도중 조선 땅에 표착했단다. 조선인들은 그를 ‘박연’이라 불렀다.” [천년의 왕국]은 바로 이 사람, ‘박연’이라 불리웠으나 본시 J.J. 벨테브레라는 번듯한 이름으로 살았던 네덜란드인과 그의 동료, 그리고 당시 그들을 맞았던 조선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이다.

380여 년 전, 듣도 보도 못했던 조선이란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던 이들 네덜란드인들의 가난한 운명을 담은 [천년의 왕국]은 조선 땅 네덜란드인, 동양 속 서양인이라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의 내면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3인칭 ‘그’ 혹은 ‘벨테브레/박연’이 아닌 화자 ‘나’의 고백으로 일관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이방인이자 아웃사이더인 인물의 중층적인 내면을 읽고 이해하는 데 주효하다. 대구를 이루는 의고체(擬古體)의 미려하고 우아한 문장은 전통 서정시의 음보율과 음수율을 느끼게 할 정도의 규칙적인 호흡을 타고 뭉긋한 감동의 파고를 견인한다. 정확하고 세세한 역사적 사료의 제시에 부러 인색한 김경욱의 서사 전략은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일찍이 등단작 「아웃사이더」를 통해, 기성 질서로부터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힌 자들의 상처와 자의식 그리고 시선 그리기에 소설의 무게중심을 두었던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돼온) 김경욱의 행보에 주목해온 자라면 이번 작품이 그 어느 때보다 독서 자체에의 몰입과 거기에서 비롯된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는 데 동조할 것이다.

이번 책에서도 김경욱 소설이면 늘 함께 이야기되는 유려하고도 내밀한 문체, 적어도 열댓 번은 더 담금질했을 문장의 깊은 맛이 의고체의 호흡에 편승해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한편 곳곳에서 발견되는, 조선 땅에 표착한 이방인의 의식적인 거부에 기인한 우리 말 구사의 어색함 역시 외부인의 시선과 내면을 그대로 전하기 위한 작가의 전략과 창조력으로 이해될 만하다. 다만 이제까지 나와 내 안의 타인에게 냉담하고 가차 없던, 삶과 죽음, 죽음과 심연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허무한 시선으로 일관했던 김경욱의 목소리가 한 치 앞의 미래도 짐작키 어려운 고독한 이방인 앞에서 따스하고 물기 어린 목소리로 탈바꿈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변화일 것이다. 예의 건조하고 무심한 듯한 문체에 뭉긋한 시선과 뭉클한 감정의 결합으로 새로운 소설읽기의 매력을 선사하는 [천년의 왕국]은, 김경욱의 소설이 그 문체 면에서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었음을 짐작케 하고 나아가 작가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더 넓고 깊어졌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돼줄 것이다.
단 한 줄의 기록에서 수많은 기억과 이야기를 복원하고 창조하는 김경욱의 역사적 상상력은 궁극적으로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작가적 고민의 투영에 다름 아니다. 동세대 젊은 작가 그룹에서 그만큼 자주 동서양의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널따란 외연을 주저 없이 가져오고, 또 그만큼 사회 속 개인의 사적 진실에 천착하여 내밀하고 성찰적인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작가는 흔치 않다. 허구/역사라는 또 하나의 텍스트에 기대어, 그리고 이만큼이나 색다른 소재에 착안하여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생의 아이러니, 그 이율배반적 진실이 담고 있는 물음의 답을 얻기 위해, 또 이만큼이나 주도면밀한 자세로 소설쓰기에 도전한 작가는 정작 찾아보면 그리 많지 않다. 동세대 작가의 선두에서 전혀 색다른 역사소설의 문법 갱신에 힘을 쏟아부은 김경욱은, 번득이는 작가적 자의식과 곡진한 문장에 힘입어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 세계를 확보해가는 중이다.

목차

*
머나먼 바다
이교도의 전사
고귀한 야만
영혼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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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본문중에서

이 왕국의 이교도들은 태양의 뜨거움과 달의 차가움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극단을 쉬이 넘나드는 저들의 병적인 활달이 나는 두려웠다. 물 위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야만적이면서 시적이고 불경하면서 신성한 활달이었다. 격렬하게 약동하는 모순이야말로 저들 삶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p.68~69)

그들의 머릿속을 분주하게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자의 눈에 비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교도들은 우리의 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우리의 풍속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평판에 대한 관심이 그러하듯 바깥 세계에 대한 이들의 무관심은 거의 병적이었다.
이교도들은 세계의 끝에서 세상의 중심을 숭배했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자신들의 심연 속에 가둘 것이었다. 이 은둔의 왕국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바람과 구름과 새뿐이었다. 새로 만나는 이교도가 늘수록 나의 불안은 붉게 달궈졌다. 달궈진 불안은 내 영혼과 심장을 갉아먹었다. 이교도의 초대를 받으면 나는 전날부터 굶었다. 나는 이 은둔의 땅에서 배부른 광대로 죽을 것이다.
(p.108)

내 가난한 영혼은 한 줌의 위안을 구하기 위해 온 우주를 헤매었으나 주인 없는 바다는 떠도는 영혼에게 한 순간의 안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국왕이 내려준 이름은 내 육신을 결박했으나 내 영혼을 정박시키지는 못했다.
(p.117)

때때로 나는 국왕이 내린 신분증에 적힌 내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가해한 내 운명의 표정이 보였다. 내 장래의 향방은 그 표정 속에 있었다. 이교도들은 나를 ‘박연’이라고 불렀다. 국왕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이교도들이 나를 ‘박연’이라 부를 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교도들이 나를 재차 ‘박연’이라고 부를 때 나는 성난 얼굴로 돌아보았다. 돌아보면 흰옷을 어색하게 걸친 나 자신이 거기 있었다.
(p.120)

무엇을 두려워 말고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이교도의 뭍에 표착한 순간부터 두려움은 내 생존의 방편이었다. 내 두려움의 내력은 깊고 질겼다. 분노와 경멸은 두려움의 배다른 형제였다.
(p.293)

십 년! 꿈같은 세월이었다. 나는 이미 천 년의 세월을 살아낸 것 같았다. 산성, 대포, 국왕의 병사들, 타타르 군대, 이교도보다 더 이교도 같은 에보켄…… 이 모든 것이 낯설었다. 꿈속의 꿈처럼 아득했다.
(p.356~357)

세 개의 이름을 전전했던 사내는 세번째 얻은 이름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 어떤 이름으로로 뿌리내리지 못했던 사내, 이 우주의 고독한 이방인이 내게 남기려 했던 말은 영원한 침묵으로 봉인되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우주의 이방인이 또 다른 이방인에게 생사를 다투며 남기려 했던 전언의 의미를. 그것은 남겨진 자의 생을 통해 완성되리니 온 세상을 덮은 적이 물러나도 나의 전투는 쉬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영혼을 건 나의 전투는 이제 시작이다.
(p.367)

저자소개

생년월일 1971~
출생지 광주광역시
출간도서 27종
판매수 100,265권

1971년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아웃사이더]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소설집으로 [위험한 독서]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와 장편소설 [천년의 왕국] [동화처럼] [야구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제37회 한국일보문학상, 제40회 동인문학상, 제53회 현대문학상, 제3회 김승옥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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