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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끝에서 두번째 세계[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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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망명 지식인의 마지막 눈에 비친 ‘역사’의 실재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는 현대의 지성인들이 펼치는 깊이 있는 사유와 성찰,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우리 시대의 명저를 소개한다. 또한 동시대와 호흡하는 어제의 지식을 아우르자는 취지에서 근대의 고전들도 포함하고 있다. 특정 분야나 주제에 치우침이 없이 철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문학이론 등을 망라하는 본격 인문 총서이다.

제 4권『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는 현대 일상생활과 문화를 예리하게 파헤친 선구적 지식인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세계를 살피고 있다.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영화 이론≫으로 영화 연구의 판도를 바꾼 그는 이 책에서 전방위적 사유를 선보인다. 이 책은 에라스뮈스에서 프루스트까지, 마르크스에서 부르크하르트를 넘어 마르크블로크까지 넘나들며 역사와 기억의 관계를 현대적으로 조망한 선구적 성찰의 기록이다. 또한 ‘숨겨진 자서전’으로 읽힐 수 있는 아주 개인적인 사색이기도 하다.

출판사 서평

현대의 지성들이 펼치는 깊이 있는 사유와 통찰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우리 시대의 명저


01. <증여의 수수께끼>(모리스 고들리에) 02~03. <진리와 방법 1, 2>(한스게오르크 가다머)
04. <역사─끝에서 두번째 세계>(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05. <죽어가는 자의 고독>(노르베르트 엘리아스)
─ 근간
<멜로드라마의 상상력>(피터 브룩스) <독특한 근대성>(프레드릭 제임슨)
<검은 피부, 하얀 가면>(프란츠 파농) <어리석음>(아비탈 로넬)

지금 서구 학계는 벤야민을 보완하는 중요한 이론가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를 주목한다

현대 일상생활과 문화를 예리하게 파헤친 선구적 지식인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영화 이론』으로 영화 연구의 판도를 바꾼 이론가
크라카우어의 국내 첫 번역서 『역사』, 전방위적 사유를 아우르는 마지막 역작!


철학이 맨 끝의 세계라면 역사는 끝에서 두번째 세계다.
보편사의 유령과 연대기의 환영으로부터 뒤늦게 해방된 역사는
최종 의미도, 고유한 이름도 없는 존재들이 머무는 대기실이다.
“내가 추구하는 하나의 목표는 이름 없는 존재들을 복권시키는 것”

기이한 사실주의자._테오도어 아도르노

어슴푸레한 새벽의 넝마주이. 그는 막대기 끝으로 담화의 파편들과
언어의 누더기들을 걷어올려 자신의 짐수레에 담는다._발터 벤야민

【책 소개】

벤야민에 이은 서구 지성계의 새로운 아이콘

20세기 후반 서구에서는 발터 벤야민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벤야민 르네상스’는 1990년대 절정에 이르렀다. 그 뒤를 이어 곧바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라는 이름이 소환되었다.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친구, 바이마르 문화의 첨병 역할을 했던 지식인, 철학자나 사회학자보다는 영화이론가로 더 알려진 인물, 언어장애 탓에 학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평생 ‘주변인’, ‘국외자’로 살아온 크라카우어.
아도르노가 외면했던 길, 벤야민이 스쳐지나간 길을 묵묵히 거닐며 역사와 현실의 잔해를 수집해온 크라카우어는 사후 3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친구 벤야민을 따라 그렇게 복권되었다. 학계는 벤야민을 보완하는 중요한 이론가로서 그를 주목했다.
『역사―끝에서 두번째 세계』는 크라카우어의 마지막 저서다. 젊은 시절 독일에서 출간한 『사무직 노동자』『탐정소설』『오펜바흐』 등에서 현대 일상생활과 문화의 속성을 예리하게 파헤쳤고, 미국 망명 뒤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영화 이론』으로 당대 영화 비평과 이론의 판도를 바꿔놓았던 크라카우어는 만년에 ‘역사’라는 주제에 매달린다. 그의 유고를 묶은 『역사』는 크라카우어의 다양한 지적 여정을 아우르는, 사유의 근본 지향점을 밝혀놓은 핵심 저술이다.

망명 지식인의 마지막 눈에 비친 ‘역사’의 실재
크라카우어가 보기에, 철학이나 신학이 ‘맨 끝의 세계’라면, 역사는 ‘끝에서 두번째 세계’다. 삶의 진실은 최종 의미에 다다르지 못하고 잠정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후자 쪽에 있다고 크라카우어는 생각한다. 크라카우어의 유일한 목표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존재할 자격을 미처 인정받지 못한 영역들의 의의를 끄집어내고, 미처 이름을 못 가진 탓에 무시되고 오해받는 존재 목적들과 존재 양식들을 복권시키는 것”(20쪽)이다.
고정된 사유체계들을 불신하고,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천착하는 크라카우어는 전형적인 철학자들보다 프루스트나 카프카 같은 작가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며, 거시사보다는 미시사에, 역사철학보다는 부르크하르트나 블로크 같은 실무 역사가들의 작업에 더 귀를 기울인다. 그는 ‘보편사’의 기획을 거대한 단선적 연대기들이 만들어낸 환영으로 진단하고, 잔해와 흔적 사이에서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인 어떤 과거를 포착하고자 했다.
크라카우어의 『역사』는 에라스뮈스에서 프루스트까지, 마르크스에서 부르크하르트를 넘어 마르크 블로크까지 거침없이 넘나들며 역사와 기억의 관계를 현대적으로 사유한 선구적 성찰의 기록이자, ‘숨겨진 자서전’으로 읽힐 수 있는 아주 개인적인 사색이다. 또한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과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 대한 크라카우어의 응답이기도 하다.

역사는 중간계 영역에 속한다. 그렇지만 이 영역은 하나의 고유한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한 영역이다. 전통적 사유습관들이 우리 눈을 멀게 하니, 우리는 이 영역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다. ……내가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목표는 역사라는 중간계를 하나의 고유한 영역─끝에서 두번째 세계에 대한 잠정적 통찰을 주는 영역─으로 세우는 것이다.(32쪽)

【추천사】

“주변인은 눈에 띈다.” 크라카우어가 사무직 고용자들의 소외된 생활 조건을 분석한 뛰어난 저작 『사무직 노동자』를 발표했을 때 벤야민이 한 말이다. ……크라카우어는 분명히 주변인이었다. 학파도 당파도 없었으며 어떤 범주로 묶을 수도 없는 인간이었다. 저널리즘과 사회학, 소설과 역사를 넘나들며 도시나 대중문화 같은 일상의 미학을 통해 사회 변화를 드러내는 기호들을 포착했던 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역사의 유물과 현실의 편린들을 수집했다. 그의 행보에서 자신과 비슷한 면을 보았던 벤야민은 그를 “어슴푸레한 새벽의 넝마주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크라카우어의 평전에서 엔초 트라베르소도 19세기 파리에서 근대성을 연구했던 그들의 행보가 나란히 감을 지적했다. 그들은 둘 다 거리의 풍경, 대도시 특유의 분위기, 도시인들의 행동방식에 매혹되었다.
_니콜 라피에르(사회학자), 『다른 곳을 사유하자』

그는 경직된 체계들과 논법들을 의심 내지 혐오했고, 유행이나 타협과는 놀라울 정도로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인간적 현실의 여러 면을 구성하는 진실한 경험이 배어 있는 사람이었기에, 통찰의 풍요로움으로 감동을 주었을 뿐 아니라 언어표현의 확고함과 명료함으로도 감동을 주었다. 그의 문체의 힘은 그의 사유의 힘을 반영한다. 그가 자신의 어휘를 자신의 시대의 유행에 끼워맞추기를 원치 않은 만큼, 그가 미래의 독자들에게 해줄 말은 더 많을 것이다.
_폴 오스카 크리스텔러(역사가)

크라카우어의 사후 출간된 이 저술은 미시사에 대한 최고의 서론이다.
_카를로 긴즈부르그(역사가), 『실과 흔적』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을 두고 그와 격론을 벌였던 크라카우어는 내재적 변증법에 대한 자신의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평생 품어온 헤겔에 대한 혐오감’을 명백히 드러내면서 크라카우어는 그 대신 변증법의 폐쇄성에 대한 벤야민의 반감에는 동질감을 느꼈다.
_마틴 제이(버클리 대학 역사학과 교수)

크라카우어는 이미 1920년대부터 동시대 사상의 흐름을 치외법권적인 관찰자로서 바라보는 독자적 입장을 취한다.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는 폐쇄적인 사상의 구조물이 떠받드는 가치체계와 신앙체계의 붕괴 속에서 맹목적 희망에 매달리려는 여러 시도에 대해 명료하게 정립된 비평을 들이댄다. 그러므로 그가 보편사를 추체험 가능한 어떤 특정한 미래로 나아가는 연대기적 발전과정으로 해석하려는 온갖 시도에 비판적인 눈길을 던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 시도에 반하여 그는 시간의 ‘홍수’, 즉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미시사들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내포한 의미는 오로지 그때그때 경험의 맥락 안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
_게르트루트 코흐(보훔 대학 영화학과 교수), 평전 『크라카우어』

역사의 본질을 논한, 최근 수십 년간 가장 중요한 책에 속한다.
_『아메리칸 히스토리컬 리뷰American Historical Review』

크라카우어는 영화비평가이자 역사가로 잘 알려져 있다. ……만년에 그가 주로 심취했던 주제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일반성의 기준이 각기 다른 역사들 사이의 관계’였다. 철학은 맨 끝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 역사는 ‘끝에서 두번째 세계’를 해명하고자 한다. 크라카우어는 다양한 역사 이론을 하나하나 고찰하면서 그 강점과 약점을 밝혀낸다.
- 『라이브러리 저널』

【크라카우어와 역사】

어디에도 정주하지 않은 국외자 크라카우어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소설가, 저널리스트였던 전방위 지식인 크라카우어는 188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철학과 사회학에 심취했으나 정작 박사학위는 건축학으로 받았고, 1920년까지 건축가로 활동했다. 1차대전 말, 당시 십대이던 아도르노를 데리고 철학 강독을 했다. 아도르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강독하던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이 시간에 대학 선생들에게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의 인도에 따라, 처음부터 나는 이 저서를 단순한 인식론으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타당한 판단의 조건을 분석한 책으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정신의 역사적 상태를 해독할 수 있는 일종의 암호로 경험했다.”
크라카우어는 1920년대 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에서 영화와 문학 등을 소개하는 문예면을 혁신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 시기에 벤야민, 에른스트 블로흐, 레오 뢰벤탈 등 당대의 지성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한다.
현대의 문화와 일상생활을 탐구하던 크라카우어는 1920년대 초 『탐정소설』을 발표하고, 이어 사진, 영화, 광고, 춤, 여행, 도시 등을 폭넓게 분석한 『대중의 장식』(1927), 익명으로 발표한 자전적 소설 『긴스터』(1928)를 출간했다. 군대와 애국주의와 전쟁에서 도망치려고 고군분투하는 희극적 인물이 작가의 분신처럼 등장하는 『긴스터』는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등의 호평을 받았고, 소설가 요제프 로트는 주인공 긴스터를 “문학의 채플린”이라 평했다. 1930년에는 새로 형성된 사무직 노동자 계급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사회학 연구서 『사무직 노동자』를 펴냈다. 이 책을 접한 벤야민은 크라카우어를 자본주의의 흥을 깨는 ‘소란꾼’에 끼워넣었다.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파리로 이주한 크라카우어는 8년간 그곳에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잠시 수용소에 갇히기도 하는 등 힘겨운 세월을 보낸다. 스페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크라카우어는 1940년 마르세유에서 벤야민과 재회하기도 했다. 그해 9월, 벤야민은 스페인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친다. 가까스로 미국에 망명한 크라카우어는 아도르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파리에서 보낸 8년간은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네. 늙었어. 마음까지도. 이제 마지막 처소, 마지막 기회네. 이 기회를 잘못 다루었다가는 끝장이지.”
미국에서 뉴욕현대미술관 등의 지원을 받아 영화 연구에 매진한 크라카우어는 1947년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독일 영화의 심리사』를 펴냈다. 독일 대중의 심리가 바이마르 시대에서 히틀러 시대로 가면서 어떻게 조금씩 타락하는지를 흥행영화들을 통해 분석하는 영화비평서 겸 대중문화사였다. 미국 반공 진영에서는 이 책을 좌파적이라고 비난했고 독일 학계에서는 ‘난민의 복수’라고 규탄했지만, 이 책은 현대 영화 비평의 기반을 닦은 명저로 평가된다.
1960년 크라카우어는 영화 연구의 기념비적 저서인 『영화 이론-물리적 현실의 구원』을 출간했다. 이 책은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적 특징들이 어떤 의미에서 ‘현실’의 ‘구원’에 유리한가를 논한 저서로서, 역시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분명한 사실은 이 책을 계기로 영화 이론의 판도가 바뀌어버렸다는 점이다.
버클리 대학 역사학과 교수 마틴 제이는 이렇게 잘라 말한다. “크라카우어는 이 두 책을 통해 일류 영화이론가로 자리매김했다. 이 두 책은 오늘날까지도 영화 연구 커리큘럼의 시금석이 되고 있다.”
만년에 자신의 사상을 온축한 역사에 대한 책을 준비하던 크라가우어는 1966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유고는 친구이자 저명한 역사가인 폴 오스카 크리스텔러가 정리하여 1969년 출간되었다. 그것이 크라카우어의 마지막 책 『역사』이다. 사회학자 니콜 라피에르는 크라카우어의 생애와 『역사』라는 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933년 독일에서 크라카우어의 책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그때 크라카우어는 이미 베를린을 떠나 프랑스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는 음울한 호텔 방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산책자는 망명자가 되었고, 그의 삶과 자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게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1941년에 미국으로 다시 망명하면서 마침내 비교적 안정된 삶을 얻고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를 출간하면서 약간의 유명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면에서 여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크라카우어는 사진과 영화를 연구하면서 영감을 얻어 저술한 『역사』라는 저서에서 역사가를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로 인도되는 이방인에 비유한다.(니콜 라피에르, 『다른 곳을 사유하자』)

크라카우어는 어디에도 정주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국외자였다. 사회학과 철학 분야에서 여러 의미 있는 저술을 발표했지만 학계와는 거리가 있었고, 소설을 써서 호평을 받았지만 익명으로 출판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기자로서 명성을 쌓았지만 기자로 불리기를 싫어했고,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 친구들과 오랫동안 교류했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엮여 정리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존재들의 복권, 『역사』

크라카우어는 1966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 이론』 출간 6년 뒤였다. 생애 마지막 6년 동안 70대의 노학자는 마지막으로 ‘역사’라는 주제에 매달렸다. 『역사―끝에서 두번째 세계』는 유고로 남았지만 이미 상당 부분 완성돼 있었다. 크라카우어는 이 책을 자신의 마지막 주저로 여겼다.
『역사』는 크라카우어 사유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인간 크라카우어와 사상가 크라카우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전까지 크라카우어는 역사를 본격적으로 논한 적이 없지만, 이 책은 사유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그간의 사유 여정을 아우르는 포괄적 성격을 가진다. 저자가 「서론」에서 밝힌 이 책의 집필 의도는 다음과 같다.

최근 나는 역사에 대한 나의 관심이 실은 내가 『영화 이론』에서 펼쳐본 생각들에서 나왔음을 돌연 깨달았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는 그 책에서 나타난 방향을 따르고 있었다. ……내가 역사에 빠지게 된 진짜 이유가, 역사가 나의 오랜 관심사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가 내가 생각해온 것을 훨씬 넓은 지평에 적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사와 사진 사이, 역사적 현실과 카메라─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유사점을 일순간에 깨달은 것이다.(19쪽)

역사와 사진(영화)의 유비관계에 대해서는 2장 ‘리얼리즘 충동’과 ‘조형 충동’에 대한 논의에서 상세히 다뤄진다.
크라카우어에게 역사는, “대체로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는 사유를 가지고 대체로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는 현실을 다루는” 학문이다.(20쪽) 그렇기에 그가 관심을 가지는 시대는, 시대로 구분될 수 없는 시대, 시대가 되기 전의 시대이다. 예를 들면, 그는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최종 정착하기 직전의 시대, 종교개혁 직전의 시대, 공산주의 운동 직전의 시대”(23쪽)에 매력을 느낀다. 그런 시대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 시대의 메시지가 “상충하는 대의들 가운데 어느 것도 최종적 쟁점의 최종적 결론이 아닐 가능성, 우리로 하여금 대의 없이 사유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해줄 사유방식 및 생활방식이 있을 가능성”(24쪽)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가 역사에 빠진 이유는 역사가 대의니, 이념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안개를 뚫고 생활 그 자체, 인본 그 자체와 만나게 해주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나의 최종 목표─역사가들의 특별한 사유양식들을 재정의하고 복권시키는 것─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런 사유양식들이 역사가들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역사가들의 논증방식과 사유방식이 지배적인 역사의 영역은 한쪽으로는 일상의 세계─생활세계Lebenswelt─와 경계를 접하고 한쪽으로는 엄밀한 의미의 철학과 경계를 접한다. 중간계의 모든 특징을 보여주는 이 영역에서 우리는 대체로 맨 끝의 세계가 아니라 끝에서 두번째 세계에 주목한다.
내가 이 맥락에서 복권을 말하는 이유는, 역사 영역에서 작동하는 핵심 범주들이 철학 전통 탓에 오래전부터 가려져왔기 때문이다. 내가 이 장 앞부분에서 밝히고자 한 것처럼, 철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틈새 영역은 대기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229~230쪽)

목차

보급판 서문(1995년)
초판 서문(1969년)
유고遺稿 편집에 관하여

서론
1 자연
2 역사적 접근
3 현재적 관심
4 역사가의 여행
5 역사계의 구조
6 아하수에로 또는 시간의 수수께끼
7 통사와 미학적 접근
8 대기실
에필로그를 대신하여

주|참고문헌|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연보
해설|옮긴이의 말|찾아보기

본문중에서

고정된 사유체계들에 대한 크라카우어의 불신은 뿌리 깊고 의식적인 것이었다. 그는 신학을 전반적으로 멀리했으며, 전문 철학에 대한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그가 후설을 존경하는 주요한 이유는 후설이 ‘생활세계’에 호소한다는 데 한정된다. 그가 에라스뮈스를 존경하는 이유는 에라스뮈스가 고정된 신학적 입장 내지 철학적 입장을 정식화하거나 지지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구체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향한 크라카우어의 고집은 그가 전형적인 철학자들보다 프루스트나 카프카 같은 작가들을 더 가깝게 느끼는 이유이다.(크리스텔러 「초판 서문」, 11~12쪽)

내가 지금껏 추구해왔고 지금도 추구하는 하나의 목표는 미처 이름을 못 가진 탓에 무시되고 오해받는 존재 목적들과 존재 양식들을 복권시키는 것이다. 역사는 사진에 비하면 이러한 목표가 좀 덜 적용되겠지만, 대체로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는 사유를 가지고 대체로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는 현실을 다룬다는 점은 역사도 마찬가지다.(20쪽)

모든 이념은 이 세상을 거치면서 조잡해지고 납작해지고 일그러진다. 이 세상은 이 세상 고유의 관점과 필요에 따라서 이념을 취한다. 한 이념이 제도가 되면, 먼지의 구름이 그 이념을 둘러싸고 그 이념의 윤곽과 내용을 흐린다. 이념의 역사는 오해의 역사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 이념이 그 진실함과 온전함을 보존할 수 있는 때는 널리 인정받는 믿음에 수반되는 확고함이 없는 때로 한정된다. 아마도 이념의 태동기는 이념이 온갖 의심 속에 겨냥하는 진실들을 가장 투명하게 볼 수 있는 시대일 것이다.(22~23쪽)

역사는 중간계 영역에 속한다. 그렇지만 이 영역은 하나의 고유한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한 영역이다. 전통적 사유 습관들이 우리 눈을 멀게 하니, 우리는 이 영역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다. 특히 과학적 접근, 또는 궁극적인 것에 대한 철학적 집착은 역사적 탐구에 수반되는 문제들을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목표는 역사라는 중간계를 하나의 고유한 영역―끝에서 두번째 세계에 대한 잠정적 통찰을 주는 영역―으로 세우는 것이다.(32쪽)

사진가의 조형 충동이 사진가의 리얼리즘 충동을 배반하기보다 지지할 때 이것을 “사진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진가는 표현적 예술가보다는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텍스트를 열심히 연구하고 해독하는 창의적 독자에 가깝다. 사진업에 종사하는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사진가가 포착하는 “이미지의 강렬함”은 “자기 눈에 비친 것에 대한 진실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역사적 접근”이란 사진적 접근에 정확하게 유비되는 접근방식, 곧 역사가의 자발적 직관이 증거에 대한 그의 충실성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거에 대한 그의 감정이입적 몰두를 장려하는 접근이다. 왜 역사가들은 철학적 사변을 사실들이라는 몸에 비해 너무 큰 옷인 듯 불신하는지, 왜 역사가들은 역사책에서 문학적 아름다움이 두드러지는 것에 대해 꺼리는 태도를 갖는지, 이제 그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70~71쪽)

역사적 현실과 사진적 현실은 일종의 대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양쪽 현실 모두 정해진 탐구 방법이 없다. 양쪽 현실을 구성하는 재료는 체계적 사유로 정리되지도, 예술작품의 형태로 조형되지도 않는다. ……내가 『영화 이론』에서 사진을 위해서 행한 것을 이 논고에서는 역사를 위해서 행하고자 한다. 아직 완전하게 인정받거나 평가받지 못한 중간계 특유의 속성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209쪽)

하위징아에 따르면, 역사란 “부활이되 꿈에서의 부활이고, 보는 것이되 안 보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고, 듣는 것이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을 듣는 것이다.” 이 대목, 그리고 하위징아가 같은 맥락에서 호고적 관심을 복권시키는 이 대목은 이념 영역으로 침투하는 역사가에 대한, 내가 여태까지 만난 최고의 정의 중 하나이다.(231쪽)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철학을 ‘일종의 소일거리’라고 부른다. 단순한 인간인 우리는 두고두고 곱씹을 수밖에 없는 괴상하고 입증 불가능한 사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루함과 따분함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에게는 쾌락주의자의 면이 있다. 카프카는 산초 판사라는 잊지 못할 소박한 인물을 쾌락주의자로 그리는데, 부르크하르트는 바로 그 산초 판사를 연상시킨다. ……카프카는 산초 판사를 ‘자유인’이라고 정의하는데, 이 정의에는 유토피아적인 데가 있다. 이 정의는 틈새의 유토피아-우리가 알고 있는 영역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지의 땅-를 가리킨다.(234~235쪽)

저자소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1889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 1889?-1966)는 독일의 철학자, 사회학자, 문화비평가, 매체이론가, 영화이론가, 소설가이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건축가로 활동하다가 1920년대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문화면 편집자로 일하며 이름을 알렸다. 나치 정권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주요 저서로 『학문으로서의 사회학』 『탐정소설』 『사무원들』 『자크 오펜바흐와 그 시대의 파리』 『프로파간다와 나치 전쟁 영화』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영화 이론』 『대중의 장식』 그리고 유작인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 등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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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아 [역]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

에밀리 디킨슨의 시로 영문학 석사학위를, 소설과 영화의 매체 비교 연구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 『아카이브 취향』 『자살폭탄테러』 『마음의 발걸음』 『걷기의 인문학』 『미국 고전 문학 연구』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평전』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감정 자본주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 『비폭력의 힘』(근간) 『프닌』(근간) 『센티멘털 저니』(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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