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31살의 캐시 H.다.. 이야기는 캐시가 현재 간병사 역할을 하면서 과거 그녀의 성장기를 보냈던 헤일섬에서의 시간과, 16살이 되어 헤일섬을 나와 간병사가 되기 전 임시로 머물던 코티지에서의 추억을 회상하며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으나 지금은 깨닫게 된 일들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한다.. 그녀는 11년 이상 간병사 일을 해 왔고, 간병사의 역할이 끝나는 몇 달 뒤에는 다른 친구들처럼 기증자로서의 자신의 운명대로 삶을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이런 그녀의 운명은 그야말로 그녀가 존재하였던 순간부터 주어진 길이고 그녀는 그대로 순응하고자 한다.. 

이 소설속 이런 클론들의 운명은 그 어떤 sf속 인간의 모습보다도 훨씬 잔인한 구석이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나오는 시험관에서 세뇌되어지고 지능까지 조절되어져 세상에 태어나면 그게 당연한듯 살아가는 최하위 계급들보다는 말할것도 없이 더 못하다.. 또한 내가 처음에 떠올렸던 영화 <아일랜드>속 클론들의 삶보다도 훨신 불행하다.. 자신이 클론이라는걸 전혀 모른채, 당첨되어지면 환상의 섬으로 떠난다는 기쁨을 품은 채 수술대 위에서 죽어간 <아일랜드> 속 클론들은 차라리 나았다는 말이다..

캐시는 인간들하고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의문을 가지지만, 절대 인간하고 같은 대우를 받을수 없고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인간의 욕망을 채우려는 이기심 위에 실현된 세상이란건 같을지 모르지만, 공포영화와도 같은 자신의 결말을 알고 사는 세상은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이나 가는가.. 이것은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클론들의 존재를 애써 모른 채 하는 인간들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냉정하게 느껴지게 한다..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요?"라는 캐시의 물음은 인간의 이기심을 통째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렇게 그들이 영혼도 없는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생각해버리는게 더 편하기 때문에 소위 인간들이 선택한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냉혹한 현실을 표현하는 쓸쓸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잔잔하고 따뜻한 추억을 떠올리듯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공 캐시가 다른 클론들과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주인공인 캐시가 헤일섬 출신이라는 것이다.. 캐시가 간병하였던 다른 클론 기증자들은 헤일섬 출신들을 부러워하며 애써 지우고싶어지는 자신의 성장기대신 캐시의 성장기의 추억을 들으며 자신의 추억인듯 꿈을 꾸며 죽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일섬 출신들에게는 어떤 특권이 있었기에, 그럴까..

인간의 장기 이식을 위해 여러 곳에서 사육되어지는 클론들.. 이들을 외면하려는 벽 앞에서 이들도 영혼이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조금은 인간적인 사육소가 헤일섬의 학교였던 것이다.. 그래서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그들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지닐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헤일섬 출신들은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의 유년의 추억을 가지게 된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읽고 쓰고, 자기 소유의 소장품을 아끼고, 친구들과의 우정과 사랑을 쌓아나가며.. 하지만 졸업 후, 결국 무차별적으로 사육되어지는 다른 클론들과 같은 운명을 지니게 되는데.. 후에 진실을 알게 된 캐시와 그녀가 사랑하는 헤일섬 출신의 친구 토미는 좌절하게 되고..

이 책의 최대 화두인 클론들의 존엄성 문제와 더불어, 내게 가장 강하게 들었던 생각은, 불편한 진실은 모르는게 나을 것이냐 하는 것이다.. 토미는 헤일섬 시절에 그들에게 그들의 앞날을 똑똑히 알게 해주려는 시도를 하였던 루시 선생님이 옳았다는 말을 하였지만, 나는 헤일섬의 다른 선생들이 하였던 방식에 찬성한다.. 그들의 생각처럼, 내가 앞으로 몇 년 후에 기증자가 되어 기증만 하다 죽게 된다.라는 공포를 안고있었더라면 그들의 헤일섬도, 그곳에서의 생활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란걸 이해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일랜드>속 클론들처럼 바보가 되더라도 모르는게 나았을 거라는건 내 생각일 뿐이겠지.. 나는 책속 "문제는 능력이라기보다 믿음이었다"에 더 맘이 간다..

어쨋든 책은 내 예상처럼 스펙터클한 모험을 담고 있지도 않았으며 모든 사실을 뒤엎는 영웅적인 설정도 전혀 없었다.. 큰 흐름 속에서 그저 둘의 힘에 의지해서 부둥켜 안고 있다 결국 흩어질 수 밖에 없는 두 주인공, 캐시와 토미의 모습이 그렇게 무력하게 그려졌을지라도 그들은 내게 많은걸 생각케 하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속 나치 수용소에서 극한의 상황을 견뎌내게 하였던 것중 하나도 추억이었듯, 한 인간이 가지는 추억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불편한 진실을 어디까지 알게 하는게 좋을지에 대해서..그랬다.. 부적절한 기대감으로 부적절한 때에 읽어서 안타까움이 더해졌지만 좋은 책이다..

내 책장에는 저자의 1989년 부커상 수상작인 <남아 있는 나날>이 남아있다.. 처음 이 책을 가지고 왔을 때보다도 더 기대되는 바이다.. 다만 "뉘앙스와 미묘함을 표현하는 데 최고"라는 평론에 어울리는 그의 문체를 이 작품을 통해 어느정도 알았으니 그 섬세한 결을 가늠할 수 있을 적절한 때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그리고 이 책은 ’키아라 나이틀리’ 출연으로 곧 영화화된다고 한다..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 책이 어떻게 영상화 될지도 기대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