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후면 밀레니엄 시대가 열린다던 가을 초입이었다. 사보 기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한겨레문화센터 PR전문가과정을 수강했다. 직장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대학생이었던 나는 조용히 강의나 들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첫인사를 마치자마자 뒤풀이를 도망갈 수는 없었다. 한 번만 가자고 생각했다. 삼삼오오 둘러앉은 생맥줏집에서 나는 수줍게 맥주를 홀짝이며 4학년입니다만 앵무새처럼 외치고 있었다.

 

그때 한 여인이 맥줏집에 들어섰다. 강의 때 보이지 않던 사람이었다. 일정이 있어 늦었다고 했다. 자기소개를 했다. ‘대우중공업 사보를 담당하고 있는 전미옥입니다.’ 내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가을밤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고, 그 여인은 ‘왕언니’란 별명을 얻었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남자가 사보 기자를 하고 싶다는 흔치 않은 상황에 대해 잘 이해해주었다. 3개월 과정 내내 조언을 해준 것은 물론 과정의 끝 무렵 사보를 만들 수 있는 회사에 추천을 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잘 나가는 편집디자인 회사에 당당히 입사할 수 있었다. 내 꿈의 첫 단추를 연 것이다. 교육 수료 후에도 우리의 인연은 이어졌고 한국사보협회, 사보PR닷컴을 함께 하며 기획과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4년 9월 19일. 그녀의 책 <스토리 라이팅>(나무발전소) 출간 기념 강연회에 패널로 초대를 받았다. 강연회 2부 순서에 마련된 글talk book톡 순서에 40대 대표주자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대학 시절 만나 저자이자 CMI연구소의 대표로, 한 회사의 기획실장으로 대중 앞에 섰다. 지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숱한 밤을 지새우고 열정을 불태웠던 시간이었다.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보람이 느껴졌다.

 

<스토리 라이팅>은 전미옥 대표가 늘 말해오던 기획과 글쓰기 비법의 결정체다. 문학소녀의 감성으로 논리적인 글쓰기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본인 또한 오랜 기간 대기업에서 근무했고 강의와 코칭을 통해 제대로 된 비즈니스 글쓰기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어떠한 부분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짚어낸다. 그러니 글쓰기가 두려운, 남들과는 차별화된 글을 쓰기를 원하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라.

 

지난여름에는 책쓰기 학교를 통해 멋진 세 남자와 한 권의 책을 펴낸 사실도 알고 있는 터라 나는 책의 가치 이전에 그 열정을 먼저 논하고 싶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이 책도 빛을 볼 수 있었다. 그 마음처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글쓰기에 조금이라도 자신감을 얻었으면 좋겠다.

 

by 꽃다지

 

기본권이 신장하면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예전보다 높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의 자유와 행복, 그리고 평등이 보장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잘 발달한 나라에서조차 불평등은 심화하고 있으며, 그 진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예란 테르보른 교수는 신작 <불평등의 킬링필드>(문예춘추사)를 통해 오늘날의 세계가 불평등한 이유를 밝히고 있으며, 가능한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 책은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불평등에 대한 다차원적이고 글로벌한 접근의 필요성을 학생들과 학계 동료들에게 납득시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현존하는 다양한 종류의 불평등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나와 동시대를 사는 세계 시민들에게 불평등에 대한 책임감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첫 장부터 제기되는 불평등의 대가는 너무도 참혹하다. 불평등은 사람을 죽인다.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기대수명은 평등한 대접을 받은 사람보다 5년 이상 짧아졌다. 이는 비단 가난한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인 미국은 물론, 비교적 평등하다는 서유럽에서조차 통계로 드러난다. 사회적 불평등이 생명의 불평등으로까지 이어지는 처참한 현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점이다. 그동안 주목해왔던 소득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다른 불평등, 예를 들어 건강, 수명, 죽음 등의 불평등에 대해 우리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불평등의 대물림, 지역 간 불평등 등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불평등한 상황들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란 테르보른 교수는 불평등을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추론한다. 생명력 불평등, 실존적 불평등, 자원 불평등이다.

 

생명력 불평등은 사회적 구조에 속한 인간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실존적 불평등은 자율성, 존엄성, 자유의 정도, 존중받을 권리, 자아를 개발할 권리 등 인격과 관련해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배장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자원 불평등은 행위자로서의 인간이 활동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공평하게 제공받지 못하는 불평등이다. 이 세 가지 불평등은 서로 뒤얽히며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며 거리두기, 배제, 위계화, 착취의 메커니즘을 통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불평등은 누군가를 무엇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평등이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들의 생명력을 저해한다면, 그 불평등은 곧 배제를 의미한다. 즉 인간 개발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으로부터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34쪽)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섬뜩했던 단어는 바로 ‘배제’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말처럼 배제의 매커니즘은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과거에는 핏대를 올리며 싸우기라도 했지만, 이제는 아예 유령인간을 만들어 상대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배제의 논리 속에서는 소통을 기대할 수 없고, 경계 너머로는 절대 이동할 수 없다.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그들은 부와 사회적 자원을 독차지하게 되고, 평등하지 못한 자들은 불평등의 원인도 모른 채 발버둥 치다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완벽한 평등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함께 평등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평등에 대한 책임감을 증대시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저자의 말처럼 구성원 모두가 불평등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때 불평등은 감소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평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공동의 생활을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51쪽)

 

by 꽃다지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 다 알 거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어른이 되면 모든 걸 책임질 수 있을 것이라 여기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나이를 먹어갈수록 삶은 버거웠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정을 내리기는 점점 더 어려웠다. 나이 마흔을 넘고서도 삶은 늘 흔들렸다. 불혹(不惑)의 세계는 공자쯤이나 되어야 이룰 수 있는 경지인지, 세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아 그런 것인지……

 

흔들리기 바쁜 와중에 <일상방황>(임주리 지음, 행성:B잎새>을 읽었다. 어디 한번 같이 방황해 볼까 하는 심정이었다. 동시대의 30대가 느끼는 흔들림의 정도를 가늠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 처자 참으로 수상쩍다. 자우림의 노랫말처럼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떠나고, 선보기 하루 전에 훌쩍 삭발이라도 한 줄 알았더니 뜻밖에 얌전하다. 도대체 이 방황의 꿍꿍이는 뭐야? 그 방황의 품새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이 모든 사단은 ‘방황’이 아닌 ‘일탈’로 개념을 규정한 내 고정관념 탓이었다.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줄 알았던 착한 모범생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주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얼마 전 보았던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 동영상(일본 리쿠르트 광고, 마라톤 도중 마라토너들이 레이스를 벗어나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다양한 방법으로 즐기며 달려간다)에서처럼 인생의 목적지는 수천수만의 갈래가 존재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마라톤의 목적지가 마치 인생의 목적지인 양 모두가 한 길을 달려간다.

 

조금만 벗어나도 ‘방황’이 아닌 ‘일탈’이 되는 것이다. 잠시 길을 잃어 헤맬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녀의 의도는 지극히 정상적이며, 그녀의 방황은 인생의 레이스에 있어 잠시의 ‘쉼’이며, 새로운 ‘도전’이다. 아나운서가 되고자 했으나 기자가 되고, 취미를 찾아 방황하다 다시 꿈을 떠올리고, 숱한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만의 관점을 서서히 키울 수 있었던 건 방황, 그 흔들림 속에서 꾸준히 사색하며 자신을 찾아 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방황은 유쾌하다. 그리고 그 유쾌함 속에는 짠한 무엇이 있다. 여운이 남거나, 잔잔한 감동이 느껴지는 그 무엇 때문에 그녀의 방황은 참 멋지다. 평소 사고 한 번 안 치던 사람이 사고를 한번 내면 대형사고를 터뜨리니, 한 번의 일탈로 인생을 바꿀 생각 말고 꾸준히 방황하는 것이 좋겠다. 일상의 방황을 통해 틈을 만들고, 생각할 시간을 갖자.

 

불혹의 경지는 끊임없는 방황과 흔들림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리니, 그녀의 말 그대로 그냥, 지금, 여기에서 방황하며 살자! 아직 젊다면 꿈을 계속 꾸게 될 것이고, 도전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일상의 방황이 삶을 키우리라.

 

by 꽃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