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그렇다. 특히나 굴곡이 많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살아남은 자들은 치욕의 순간을 감추려 하고 지우려한다. 그래서 기록은 많이 남지 않는 대신 ~카더라 통신에 의해서 또는 뜻있는 몇몇 자들의 서책에 숨겨진 채로 후세에 전해지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청의 10만 대군에 크게 패해 항복하고 군신의 의를 맺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조가 겪은 '병자호란'이 아닐까 한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을 세번이나 반복한 근세 조선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치욕을 안겼던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는 비운의 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왕권은 굳건하지 못해 임금의 자리는 늘 불안했고 부자간의 따뜻한 정이 없어서일까 먼곳에 있는 아들이 그리웠던 것은 처음 몇 년일 뿐 청에 붙어먹는다고 생각했기에 점점 의심과 불신의 골은 깊어갔을 것이다. 인조의 이런 마음이 환국 후 겨우 두 달 만에 소현세자가 급사를 하게게 되는데 세인들은 그 죽음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과연 아비가 아들을 독살하여 죽였을까?

 

오늘 읽게 된 <소현>은 소현세자가 청에 잡혀가 있는 동안 비극적이고 굴욕적인 생활을 담은  이야기이다. 이 책은 소현세자의 환국 후 겪게 되는 시간들이 아닌 볼모로 잡혀갈 때 만난 청 황제 홍타이지의 동생이며 어린 조카를 황제로 세우고 섭정을 했던 도르곤과의 인연으로부터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중국을 제패하며 소현이 귀국하게 되는 2년여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임금인 아버지와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해 자신을 버려야만 했으며 적국에서 냉대를 받으며 언젠가 조국을 강하게 만드리라 매일 다짐하고 다짐하던 소현의 가슴앓이와 고독을 담아 33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소현의 삶을 심리적인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

 

소설속에서 그려지는 소현은 나약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할 것과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보였다. 볼모로 잡혀 청에 대한 끊임없는 충성을 강요받으면서도 늘 조국을 생각했다. 사대사상으로 명의 편에서 소현을 시기하고 모함하고자 하는 조선의 대신들 앞에서도 힘을 쓸 수 없어 아비인 인조와의 사이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보다는 더 중한 적국에서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행하며 때를 기다렸다. 언젠가 돌아가 부국하고 강병한 조선을 만드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늘 봉림이 대신하던 청의 전쟁에 참전하는 과감한 결단도 필요했고 오른팔이라 생각했던 심석경이 아버지인 심기원의 첩자였음 알자 단호하게 돌아설 줄도 알았다.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그리되기를 위하여 내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하하여지리라. 아무것도 켤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p316

 

전쟁의 상흔에 힘겨움을 겪는자는 비단 소현뿐이 아니었다. 정복자가 아닌 패배자였던 조선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희생자가 된다. 볼모가 되었던 소현과 봉림이 그랬고 종실의 처자였으나 청의 황제에게 바쳐지고 다시 대학사의 첩이 되어 청나라 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흔이 그랬다. 청나라 사람들에게 여자로서는 지울수 없는 능욕을 당했던 무녀 막금이도 끔찍한 시간들을 함께 했고, 기회주의자라 할지 모르나 그 상황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역관 만상이도 있었다. 아버지의 욕망과 세자와의 공감사이에서 번뇌해야 했고 흔을 사모해야 했었던 석경도 희생자다. 이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좌절과 슬픔, 고통은 나라가 강하지 못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불운이었다.

 

만약 소현이 임금이 되었다면? 알기론 소현은 청에 있으면서 서양문물을 많이 접하고 개방화되어 생각이 깨인 사람이었다 한다. 인조가 귀가 얇지 않았었다면 조선의 권력자들이 그토록 자신의 이익에만 탐하지 않았다면 어쩜 조금더 일찍 세계화에 눈을 떠 임진왜란이나 일제 강점기같은 치욕스러운 2차 3차의 비극이 우리나라의 역사 한페이지를 차지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아쉽다. 

 

먼저 출간되었던 '바람의 그림자, 천사의 게임'의 히트로 인해 베스트셀러작가 반열에 오른 저자의 이름은 들어 보았다. 먼저 출간된 작품을 읽어보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던 관계로 데뷔작인 이 책 <안개의 왕자>로 처음 만나게 된다. 이 작품으로 전업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사폰은 이 후 발표한 '한밤의 궁전, 9월의 빛'을 묶어 안개 3부작이라 하고 이 작품은 '에데베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영예를 안게 해 준다. 하지만 나를 흥미롭게 한것은 스물셋이 되어서도, 마흔셋이 되어서도, 심지어 여든셋이 되어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을 써봐야 겠다 싶었습니다 라는 작가의 말 때문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전쟁을 피해 바닷가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 막스네 가족, 평화로울 거라 생각했던 마을에 퍼져 있는 음산한 기운에 역에 도착했을때 거꾸로 가는 시계나, 막스네 가족을 따라온 고양이, 이사오게 된 집에 살던 전 가족들의 슬프고도 이상한 행적들, 전 주인이 차고에 둔 영사기,  조각공원의 기묘한 조각들의 움직임이 있는 등 막스는 미스테리한 일들에 접하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마음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다는 배 '오르페우스호'에 관한 소원을 들어 주는 안개의 왕자가 살고 있고 그 대가는 무조건 적인 복종이라는 전설에 이제 소년의 모험이 시작된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 청소년 소설로 작가의 길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신선하다. 청소년 소설은 성인 소설에 비해 소재나 내용이 자극적이지 않고 동화적인 표현과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청소년들이 미래를 꿈꾸거나 희망을 품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어른인 나도 즐겨 읽는 장르다.  탐욕스럽지 않고 우정과 사랑이 우선시 되는 세계를 함께 하면서 순수함이 있던 시절을 되돌아보기도 하는데 이 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사랑에 눈떠가는 알리시아와 롤랑의 키스, 무언가에 끌려 해저로 들어가는 롤랑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 드는 막스, 아버지가 케인과 했던 거래의 댓가가 자신인었는지 알아내고 제이콥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희생하는 롤랑의 모험을 숨가쁘게 따라가면서 순식간에 마음도 몸도 커버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풋풋함과 활기찬 역동적인 힘을 느끼게 된다.

 

데뷔작이 맞을까 싶게 구성과 캐릭터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이 작품은 역시 저자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길에 들어 설 만큼의 역량이 초반부터 있었겠구나 싶게 한다. 추천사를 쓴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의 작가)의 긴장과 비극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며 독자의 시선을 완급조절하는 내러티브를 통해 독자는 가혹한 환상의 세계로 인도될 것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거야 라고 생각하며 다음에 나올 사실들에 고개를 빼게 만들었던 다양한 소재들과 어린 제이콥 익사사건에 얽힌 수수께끼와 전설을 풀어가는 소년탐정들의 추리와 활약에 빠져들었다. 악마와의 거래 또한 흥미를 자아내는 소재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절정에 달했던 악마와의 거래는 너무나도 따뜻한 말로 다가오지만 결국 인간이 가진 것 모두를 앗아가며 그 어두운 거래가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는 교훈을 주는 듯하다.

 

오호, 이렇다면 저자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폰의 안개의 3부작 뿐만 아니라 그를 세계적 작가로 만들어준 '바람의 그림자'와 '천사의 게임' 또한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트라우마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일상으로 돌아온 듯 하나 상처는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면서 늘 괴롭힌다. 특히나 성폭력에 관한 한은 여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흉터를 남기고 볼 때마다 그 끔찍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정혜는 그런 자신을 벽안에 가둔다. 용구는 억누르며 반듯하고 눈에 띄지 않는 스스로를 만들어 가며 우체국에서 조용히 일을 한다. 그러던 그녀에게 한 남자가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여자, 정혜"  사실 이것이 우애령 작가의 소설을 각색한 것이라고는 모르고 있었다. 박완서 외 9인의 여성작가들의 진솔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해서 집어 든 &lt;지금 나는 사랑하러 갑니다&gt;에 담겨 있던 김지수·황정민 주연의 '여자, 정혜'의 원작 &lt;정혜&gt;라는 한 줄 글을 읽고 호기심이 일어 먼저 읽게 되었다. 영상으로 만들어 지는 것과는 아무래도 소설이 다른 면이 있기에 그리고 연기잘한다는 배우 둘 김지수와 황정민이 선택한 이 시나리오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 졌던거 같다. 영화를 보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나.

 

&lt;지금 나는 사랑하러 갑니다&gt;는 1997년 &lt;13월의 사랑&gt;이라 출판되었던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당선자 모임인 여성동아문우회 회원들의 소설집을 개정해서 내 놓았다. 작가의 나이가 50-60대가 많다는 출판사의 소개에 그렇구나 하고 동감을 하게 되는 이유는 요즘 젊은이들의 인스턴트식 사랑과는 무언가 다른 끈적함과 진지함이 소설전반에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박완서의 &lt;그 여자의 집&gt;처럼 순수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사랑이야기에 겪어보지 못한 시대인 해방이나 분단의 아픔을 접목시켜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유춘강의 &lt;러브레터&gt; 또한 사랑은 없다고 결론지어 놓고 세상을 바라보던 한 여자가 일본에 있는 한 남자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느끼게 되는 미지의 남자에 대한 두근거림과 궁금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몇년 전만 해도 인기있었던 채팅과 이를 통해 이루어지던 만남의 기억에 입가에 웃음이 번지게도 하는 이 소설의 마지막은 해피앤딩은 아니나 마음에 남았다.

 

어쩜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진부한 소설집일 수도 있겠다. 자극적인 내용도 없고 스피티하게 내용이 전개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향 좋은 차를 옆에 놓고 한 편을 읽은 뒤 그 두근거림을 진정시켜 보고 또 한편 읽은 뒤 안타까움에 젖어 보며 한가로운 오후를 즐길 수 있는 책일 듯 하다. 조금 다른 성향의 여성작가들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장점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들이 바라보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하나씩 슬며시 들여다 보는 재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