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감탄의 연속이다. 동시에 가슴 아픈 일이다.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던지, 감당해야 하는 예술과의 싸움, 지난한 자신과의 싸움, 세상과의 불화, 예민한 감성 때문에 부딪히는 심리적인 외로움과 고통이 동반하는 것을 곱씹듯이 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술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겪는 싸움이 있다는 것을 마네를 통해서 또 다시 확인한다.

 

법무관료와 왕족의 대녀 사이에서 태어난 귀공자

마네의 유년은 그래도 행복했다. 열 다섯 부모님의 반대로 늦게 미술 공부를 시작하지만, 어릴적 문화적인 경험으로 남은 에스파냐의 기억, 외삼촌과 돌아다닌 미술관의 경험, 공화주의자 부모로 부터 물려 받은 개혁적인 성향 까지. 마네는 파리의 유복한 귀공자로, 우아한 미적 감성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했다. 가업을 물려 받지 않으려던 저항의 표시로 선원이 되어 바다를 여행하고 난 후, 자식 고집을 꺾지 못한 부모의 승낙으로 마네는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전시실 명화 앞에서 보낸 10년

등단하면서 부터 미술계에 파란을 몰고 온 이단아란 수식 뒤에 감춰진 10년이 있었다는 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인상적인 장면이다. 명화가 걸린 전시실을 순회하며, 앞 선 미술가들의 작품을 베끼는 훈련을 10년 동안이나 하는 동안 마네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지리한 10년을 견딘 마네의 힘은 또 무엇이었을까?

예술하는 친구들과 지내며 일상의 훈련을 두고 벌이는 지리한 싸움의 고통을 지켜본 터라 더욱 골몰하게 되는 질문이다. 딱히 답이라고 찾지는 못했지만, 막연히 건져지는 것은 마네가 끊임없이 베껴낸 그림들은 그저 베낀 것이 아니라 선배 화가들과의 대화였다는 점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예술 언어를 작품을 보면서 새록새록 알아가게 되고, 그에 근거해서 작품을 놓고 조용한 토론과 논쟁을 주고 받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림의 주제를 놓고 벌인 싸움은 또 얼마나 끈질겼을지, 뒤에 마네의 작품 세계에서 나타나는 그 만의 고집을 보면서 해석을 하게 된다.

뒷 날 '마네의 어떤 그림도 누군가의 모작이지만, 또 어떤 그림도 마네만의 그림'이라는 평을 얻는 것, 작품마다 살롱에서 쫓겨나는 것과, 마네파라는 독특한 흐름을 만든 것들이 그 증거가 된다.

 

눈에 들어 온 세상 그대로, 솔직한 그림

올랭피아,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를 그린 마네의 시선은 솔직했다. 저자는 그림의 주제를 신화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신화세계에서 구하던 아름다움을 현실 세계의 구체적인 대상에서 구하던 마네의 독특한 시선을 그의 솔직함과 고집에서 찾는다. 작가가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지만, 쉽사리 갖기 어려운 덕목이기도 하다.

작가의 지적을 깊이 공감한다. 거기에 더해 자유로운 생각을 열어준 부모의 영향, 스페인과 파리의 정치적인 상황, 스페인에서 싹튼 집시문화에 대한 동경을 더해 본다. 또 보들레르나 에밀 졸라와 같은 그의 그림과 정신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엄호했던 주변의 예술가들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으로 보고 감각하려는 작가의 기질과 정신, 시대, 공감을 나누는 친구. 마네가 당대 평단의 외면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축복처럼 누렸던 것들이다. 마네의 '솔직한 그림'의 바탕을 만들어 준 것들이다.

<마네>는 마네 자신의 이야기 보다는 마네를 주변에서 지켜 본 사람들의 증언과,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많이 담고 있는 책이다. 이야기와 에피소드가 풍부한 데 반해서 정연한 서술이 아쉽지만, 마네의 작품세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에는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야 할 권력자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무식, 미신, 그리고 편협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흉포한 지배자입니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 했던 엠마 골드만이 했던 연설 내용이다. 다소 섬뜩하게도 느껴지는 이 이야기에 앞 서 엠마 골드만은 러시아의 짜르와 미국의 대통령을 거론한다. 마음 먹는 것으로 온갖 권력을 휘두를 수 있던 권력에는 비웃음을 날리면서, '사악하고 흉포한 지배자'를 무식, 미신, 편협이라고 강조하던 엠마 골드만의 이야기가 가슴에 담긴다.

인도에서 온 성공회대 교수 보노짓은 우리 사회에서 인종차별을 겪고 그에 대한 소송을 하는 중에 "일종의 무지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최소한의 자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한국의 인권 상황을 악화 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인권을 "타인에 대한 이해와 커뮤니케이션"이라 이야기하는 보노짓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낯이 뜨거워졌다.

<지식e 5>는 인권의 문제를 집중해서 조명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 '사람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세상과 권력 앞에서 보호 받아야 할 숭고한 권리' 등을 뜻하는 인권은 <지식e 5> 안에서 추상적이고 세련된 포장을 벗고 생생하고 퍼덕거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민주주의의 후퇴 _ 다시 생각해야 할 인권

엠마 골드만이나 보노짓의 날 선 비판은 새삼스런 문제가 아니다. 습자지만큼 얄팍한 상상력만 있어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정규직, 철거민, 노동조합, 양심적인 지식인, 방송인, 예술인들의 손 발을 묶고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나와 내 주변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가능하다.

오늘, 꿈을 거세 당하고, 생존의 위협을 받고, 일자리와 꿈을 봉쇄당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진다면,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살아갈 미래에 비전이 없다는 것 쯤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허나 소란스럽지 않다.

올 들어 양심수의 숫자가 다시 세자리 수를 기록하고, 2009년 새해 벽두에 벌어진 억울한 철거민들의 죽음은 아직 제대로 진상 파악도 되지 않았고 장례조차 치루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올 해 청년들의 취업지수는 최악을 기록했고, 내년 별 다른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청소년과 어린이들의 인권 실태는 뒤돌아서 달음박질을 하고, 아이들의 자살 충동과 시도도 몇 년 사이 세 배나 늘었는데도, 국민들의 사회적 불안지수는 위험수위를 넘어서는데도 소란스럽지가 않다. 물 속에 가라앉은 채 숨 쉬고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가뿐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간헐적으로 기포만 수면 위로 올릴 뿐이다.

세상과 타인과 나 사이를 오가는 감각을 일깨우는 지식

<지식e 5>는 무감각해진 관계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이런 게 한 두해 일인가?", "어차피 다 그러고도 살아" 하면서 슬며시 덮어두었던 것들을 코 끝에 들이밀고, 손 위에 올려 놓아 파닥거리는 숨소리를 듣게 한다.

정보의 양이 많으면 많을 수록 '세상이 원래 그렇지' 하고 냉소로 얼버무리는 식자 층에게 "사람은 그럴 수 없어" 하는 사례들을 다양하고 꼼꼼하게 찬찬히 들려준다.

스포츠, 예술, 정치, 교육, 과학, 미디어, 정보통신, 생태, 환경, 공동체, ... 다양한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났던 일이 이성적인 목소리로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그 사건들과 '인권'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 줄 열 사람과의 인터뷰는 '타인'을 이해하는 계기와 소통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전문 산악인, 판화가, 마임이스트, 공연연출가, 생명공동체 대표, 뮤지션, 용산 유족, ...개인의 용기로는 찾아가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나를 돌아보고, 내 무뎌진 감각을 또 한번 점검한다.

사실, 이런 책은 이 나라에 힘 좀 가졌다는 사람들 모두가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내가 먼저다. 약한 사람, 억울한 사람, 혹은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람은 본래 기대고 어우러지면서 살아야 한다는 걸 믿는 사람이 먼저 읽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생각했다.

나와 다른 이해와 요구를 가진 또 다른 '나'들을 이해하고 보듬을 힘이 지금은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다.

임꺽정을 끝냈습니다. 소설책 10권 읽기가 별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별 일처럼 읽었습니다. 중간에 다른 책들이 끼어들기도 하고, 7권 들어서부터는 곧 끝나게 될 걸 아쉬워하면서 아껴 읽었습니다.

미완인 걸 알고 시작한 읽기지만, 막상 끝장을 대하니 아쉬움이 더욱 물컹 밀려듭니다.

<임꺽정>은 작가 홍명희가 10년에 걸쳐서 써내려간 소설이며, 일제시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소설입니다. 소설을 쓰며 한 차례의 구속과, 한 차례의 신문 폐간으로 공식적으로 두 번 중단이 되었답니다. 이렇게 불온한 소설을 일제시대에 써내려간 작가의 긴 노정을 상상하며 읽는 것만으로도 <임꺽정> 읽기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박재동 화백의 삽화가 실린 최근 개정판으로 읽고 싶었지만 여건이 닿지 않아서, 9책에서 10책으로 개정되었던 사계절 개정신판으로 읽었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박재동 화백의 삽화가 실린 책으로 한번 더 읽고 싶은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한자말 뜻을 제대로 새기지 못하고 읽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서산대사>를 읽을 때도, 고문(古文)을 읽는 것 같아 어려웠는데, 문체로 보면 임꺽정은 조금 더합니다. 물론, 임꺽정과 그의 결의형제들인 두령이 나오는 질펀한 삶의 우여곡절 속에는 한자나 한자말들이 등장할 일이 별로 없어 좋지만, 양반들만 나왔다 하면 말의 절반 정도가 남의 나라 말로 보여 읽는 눈이 금방 뻑뻑해지곤 했습니다.

작가 홍명희 선생님을 생각해봅니다.

이광수, 최남선과 비교하여 천재로 꼽혔던 작가라고 합니다. 이광수와는 절은시절 무척 가까운 사이로 지냈던 모양입니다. 젊은시절에는 오스카와일드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심미주의에 대한 깊은 애착이 있었다고 하며, 사실주의적인 문학예술관을 갖게 된 것은 3.1운동 후라고 합니다.

"좋다! 그러면 이른바 신흥문학은 유산계급문학에 대항한 문학일 것이며, 생활을 떠난 문예에 대항한 생활의 문학일 것이며, 구계급에 대항한 신흥계급의 사회변혁의 문학일 것이다. 그러면, 플롤레타리아 문예는 즉 신흥문예의 별명이 아닌가. 그리하야 지금 신흥문예는 조선의 문예계에 있어서 새로운 기운을 진작하고 있다. ... " 이 글은 1925년 카프가 발행하던 문예운동에 실린 글이랍니다.

하지만, 최남선이 소년이나 청춘을 발간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일 때도, 이광수가 무정을 발표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 때도 홍명희는 작품으로 자신의 문예관을 드러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이광수가 '무정'을 발표할 때, 싱가포르 등지를 여행하던 홍명희는 이광수의 작품을 "'무정'을 보았으나 신통치 않다."는 의견을 내어 신흥문학에 대한 견해가 이광수와는 다른 것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 탐미주의에 대한 심취, 무산계급에 이해 주도되는 신흥문예, 사실주의적인 문예를 주창하던 작가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은 '가운데 길', '제3의 길'로 평가됩니다. 카프의 성향과는 다른 소설인 셈입니다. 문체에 있어서도, 중국이나 서구의 것과는 다른 우리 민족의 말 글과 색체를 찾아 살리려는 노력을 깊이 했다고 합니다.

자세히 알 길은 없지만, 문예이론과 당시 문학적 경향, 앞으로의 문학을 고민하는 과정에 <임꺽정>이라는 봉건과 계급적 신분질서에 극도로 항거한 인물, 안 팎 문화의 침윤이 덜한 조선의 천민의 말과 생활을 취해서 '제3의 문학'을 실천한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소설 임꺽정

사계절이 임꺽정을 출간하면서,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을 책에 포함시켰다고 합니다. 남북을 통털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라지요. 실제 앞의 세 권에 임꺽정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것, 당시 시대상을 일가의 역사와, 갓바치란 인물의 역사, 양반들의 이전투구를 독립된 권으로 엮은 것을 보면 임꺽정 속의 다른 소설, '액자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앞의 세권에 대한 이해가 임꺽정이란 인물이 가진 정신세게를 이해시키는 결정적인 배경이 됩니다. 앞의 세권이 없었던들, 임꺽정은 그저 기운 무지막지하게 세고, 칼 잘 쓰며 의리 좀 지킬 줄 아는 성질 포악하고 급한 도적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임꺽정이 대항하고자 한 시대, 임꺽정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이해, 도적으로 나선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이어질 일 없이 툭 끊겨진 소설이 어찌보면 우리 현대사가 남긴 단절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북으로 올라가 부수상을 지냈다지요? 어쩌면 소설을 마무리 못할 만큼 바빴겠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소설의 끝을 보고싶은 마음이 작가로서의 홍명희에게 원망을 하게도 됩니다.

한편으로 미완의 소설이기 때문에 상상력으로 뒤를 엮어보는 맛을 즐기고도 싶습니다.

심정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두령들, 곽오주나 배돌석,... 그 인물들 마저도, 배신하고 살 길 찾은 서림이 같은 인물, 비루하고 비굴하기 짝이 없는 노밤이 같은 인물 마저도 애정을 깊이 담아 그린 작가의 손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제가 임꺽정을 통틀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긴 시간 더듬어 온 책을 다시 한번 몰두해서 읽을 기회가 오기를 바랍니다.

임꺽정, 소설, 홍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