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민석 :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출귀몰한 운동권의 스타. 시위 현장에는 반드시 나타나지만 단 한 번도 체포된 적 없으며,
어느 누 구하나 그의 얼굴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
정부 기관에서는 그를 빨갱이라고 부르고, 시민들은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 김기준 : 어느 누구도 실체를 본 적 없는 운동가 최민석 검거 전담반의 팀장이다. 정보요원이 된 후로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 그 자, 최민석의 검거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 이태주 :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연극에 빠져 연출가가 되었다. 권력의 속성을 꼬집는 정치극 <줄리어스 시저> 에서
대사 하나를 바꾸는 바람에 그의 커리어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권위' 라는 단어를 '독재' 로 바꾸었다는 이유로.
* 김진아 : 배우가 되겠다는 꿈 하나를 안고 서울로 올라와 허드렛일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그녀의 우편배달부> 라는
선정적 누드 연극에 출연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쉽사리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이 연극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이야기의 배경은 1980년대, 독재 정권에 대한 항쟁이 벌어지던 시기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이야기로 내 나이 때 사람들은 기억조차 나지않는 어린시절인데,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마치 엊그제 뉴스에서 본 듯하다는 기시감 말이다.
작가는 2012년에 이 이야기를 구상해서 결국 2017년이 된 지금에서야 내놓게 됐다고 한다.
2012년에 구상한 30년 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엊그제 뉴스에서 본 것 같은 이야기라고 한다면 도대체 1980년대를 거쳐 2017년이 될 때까지 무엇이 바꼈단 말인가.
그 때 당시에도 불온한 사상을 품은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문화계에 스파이를 심어 감시하게 했고, 2017년 현재도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 전통적으로 문화 예술계는 언론 관심이 집중되는데다 반정부 성향이 노골적이었기 때문에 공작에 있어 늘 취약한 분야였다. 만약 외부인을 폐쇄적인 예술계로 어설프게 접근시켰다가는 자칫 예술인 사찰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두고 볼 수 만도 없었다." ( P236 )
1980년대에는 독재정권을 통해 폭력으로 국민들을 억압하고 사찰하던 정권이 있었고, 자칭 민주주의공화국이라 칭하는 현재에는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이 있었다.
힘들게 얻어낸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허울을 쟁취한 기쁨에 취해 방심해 있는 동안 권력자들은 슬그머니 이름을 바꾸고 색깔을 바꿔가며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팍팍한 생활에 먹고 살기 힘들다며 그저 이 현실을 미지의 영웅이 나타나 바꿔주기를 바라며 방관하는 동안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권력에 부역하는 지식인들과 기업 , 그리고 실상을 알면서도 권력에 빌붙어 여론을 조작하는데 앞장서는 언론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나, 혹은 우리의 선한 이웃들은 누구도 이런 결과를 의도치 않았다.
그저 각자가 처한 현실과 상황에 따라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으며, 성실하게 살아갔다.
다만 그 이웃들의 악의없는, 신념없는 성실함이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가는 거대한 권력과 시스템을 만날 때 결과는 왜곡된다 .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인 '김기준'은 법으로 악을 심판하는 법관을 꿈꿨으나 정부 기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공작원이 된다.
비록 정부기관의 공작원이지만 고문을 지양하고, 피심문자와의 대화와 깊은 이해를 통해 진술을 받아 낸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그의 배경과 성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도 처음부터 권력에 부역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 중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선택을 하고 , 그 선택에 책임을 졌을 뿐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국가를 위한 일이며, 이 나라에 이바지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그의 신념은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몰락의 길로 걷게 하고,
한 발 더 나아가서는 나라 전체를 후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 잘못된 선택을 신념으로 내면화시키고 그것을 정당화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 (p207)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그리는 소설이나 영화들은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영웅적인 운동권 학생이 등장하지도,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정권에 대항하며 민주화에 이바지하는 소시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민주화 항쟁을 떠올리며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그런 극적인 이야기도, 절대적으로 선한 의지를 지닌 주인공의 이야기도 없다.
오히려 방관자적 시점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의 사연과 그 시대를 담담하게 지켜보며 그들이 한 순간순간의 선택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뭔가 극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도입부에는 등장인물 개개인의 이야기가 개연성 없이 이어지고,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이태주가 연출하는 연극의 이야기가 큰 비중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고는 할 수 없었다.
( 책 속에 등장하는 연극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정보가 있다면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
하지만 중반부터 각 인물간의 연결고리가 생기면서 하나의 큰 흐름으로 모인 후에는 몰입감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치못한 반전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 이 반전이 놀랍기도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을 법한 너무나 현실적인 결말이라 씁씁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추운 광장에서의 촛볼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숨죽이고 있지만 권력은 방관하는 시민에게 절대 복종하지 않는다. 대중의 감시가 느슨해지고 관심이 시들해질 때 권력은 다시금 그 사나운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개개인의 올바른 신념과 의지를 통해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권력을 이어 나간다면 , 개인의 선한 의도가 의도치 않은 결과가 아니라 의도한 선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아무런 의심없이 세상이 반듯한 원리로 돌아가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질 거라고 믿었던 시절, 근거도 없이 자신의 미래가 바르고 정의롭게 펼쳐질 거라는 확신을 지녔던 시절은 언제 끝났을까? " ( P205)
선한이웃,
이정명,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