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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 핸드폰으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아직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게타라는 작은 커뮤니티형 게임 사이트에 글을 쓰는 소모임 클럽에 들어가 핸드폰 자판을 눌러대며 몇 시간 동안 소설을 써댔었다. 그 때는 뭐가 재밌다고 그런 노가다를 즐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인메일>을 읽는 순간 그 때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 조금 놀랐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무렵에 학생들 사이에 무섭게 퍼지기 시작한 핸드폰이란 존재는 지금 못지 않는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시작한건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였고,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슬라이드폰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나 역시 슬라이드폰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쉬는시간에 작은 액정을 노려보며 짧게라도 소설을 써서 올리는 낙으로 살았다. 그 때는 나 역시 친구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핸드폰 말고는 책을 읽거나 잠을 자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나오는 사와코의 심리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인간은 정말 약한 존재다. 하지만 가장 강한 존재 역시 인간이다. 살아 남으려는 의지만 있다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는 것이 바로 인간이고, 위험한 상황에서 남을 밟고 올라서라도 살아 남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내면엔 정글에서나 통할법한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능이 꿈틀거리지만 평소에는 이성이라는 녀석으로 잠재우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잔혹성을 컨트롤 해주는 유일한 방어막에도 약점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고독이다. 사와코는 고독했다. 형제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다. 누군가와 함께이고 싶었지만 마땅히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그녀를 위해 아버지가 한 행동은 오히려 사와코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어느날 사와코는 유카리라는 아이에게서 메일을 받는다. 허구의 세계에서 같이 놀지 않겠냐는 제안이 담긴 메일에 사와코는 의심스러워하면서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식으로 모인 네 명의 여중생들은 '허구의 세계'에서 릴레이 소설을 쓰기 위해 뭉친다.

 

고독한 생활을 하던 사와코는 주인공 여자아이 역을, 정체불명의 유카리는 스토커 역을, 베드민턴을 하는 친구의 뒷바라지를 삶의 낙으로 생각하던 마유미는 형사 역을, 라이브카페에서 공연을 보는 것을 즐기는 마이는 스토킹을 당하는 소녀의 남자친구 역이다. 일단 이 아이들이 써나가는 릴레이 소설의 내용에 놀랐다. 그 아이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들이 쓰던 '허구의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여중생 실종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와코가 사라지고, 심지어 유카리마저 글을 쓰지 않게 되자 마유미는 사와코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사와코를 찾기 위해 뒤를 쫓으며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사건의 모습은 마지막에 반전되며 큰 충격을 안겨 준다.

 

이 소설은 조금 특별한 아이들에 대한 소설이다.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취미, 성격, 분위기를 가진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단지 남들이 좋아하는 것과 다른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 뿐인데 그런 사소한 이유로 괄시 받고 외면 당하는 사회의 이기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시선이 중학생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에는 초등학교때부터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때면 자연스럽게 남들을 자신보다 아래에 두고 생각하거나 행동할 때가 많다. 남을 깎아 내리는 듯한 중학생 특유의 으스대는 말투와 행동이 나중에는 사회라는 큰 물에서도 작용하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만 존재할 것 같았던 왕따가 대학교와 회사에서도 쭉 이어져 나가는걸 보면 괜시리 입안이 써진다. 어째서 사람들은 자기보다 잘난 사람이나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무시하고 깔보려 하는 것일까?

 

남을 다치게 한 것은 사와코가 잘못했다. 제대로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안해."라고 사과하는 것 조차 해보지 못했을 것이고, "너 같은건 꼴도 보기 싫어!" 하고 화 냈다가도 다음날이면 웃으며 인사를 해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분노를 나이프를 꺼내 휘두르는 것으로 표출해 낸 것이 틀림 없다. 그건 엄연히 잘못된 방식이지만 그녀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더라면, 남들과의 다름을 포용하고 자신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여 가슴 깊이 이해해주고 안아줄 수 있는 어느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맞잡아 주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핸드폰 속 가상 공간 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손을 잡을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위에 제 2의 사와코가 생기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한다. 

 

 

 

 

모두는 제 가슴으로 성장한다. 육체적 성장이 먼저라지만 때로는 제 사는 모양새에 따라, 처해진 환경에 따라 정신적 성장이 먼저인 이들이 있다. 만으로 스물이 되었다고, 성인의 날에 장미꽃, 향수, 키스를 선물 받았다고, 술집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고 우리 모두가 완전한 성인이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종종 오해한다. 민증이 나온 순간 자신들은 어른이 된 것이라고. 술집을 드나들 수 있게 되고 담배를 마음껏 사도 아무도 꾸짖지 않게 될 때 자신들은 완전한 어른이라고. 허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철 좀 들어라. 나잇값 좀 해라."하는 말들이다. 나이만 먹었다고, 외면적으로 성장했다고 끝이 아니다. 속 알맹이가 꽉 들어차는 내면적 성장을 거쳐야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다. 비로소 성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청소년기는 어떨까. 지금 나는 고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활발하게 움직이며 정렬을 불태우고,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며 사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할 청춘의 시기에 지루하고 따분하게 매일을 흘려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속앓이 하며 성숙해본 적이 있을까. 사람이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아픔을 겪어야 하고, 그 아픔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하며, 그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길 때 우리는 성숙이라는 훈장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 '성숙'이라는 훈장도 가지지 못한 듯하다. 나는 더욱 아파해야하고 내 앞에서는 그것을 위해 많은 시련과 아픔이 도사리고 있을게 분명하다. 나는 <성인식>에 등장한 다섯 명의 아이들처럼 그 과정을 견디고 이겨내야만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내가 아직 닿아보지 못한 단계에 서있는 각자의 사정을 가진 청소년들이 있다.

 

 

책의 표제이기도 한 《성인식》에서는 맹장수술을 하고 어머니를 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시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요즘 사회의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시우의 어머니는 아들 시우만 바라보고 살며 아들을 위해서라면 몸 안에 장기도 꺼내어 줄 수 있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모습이다. 시우는 그런 자신의 어머니를 대하기가 껄끄러워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자꾸만 늦추었다. 맹장수술을 한 시우를 위해 고기를 해주겠다며 장을 보러간 어머니는 수술한 사람들 기력 회복에는 개고기만한게 없다던 마을 사람의 말을 듣고 집에서 기르던 칠손이를 잡자고 말한다. 한 가족처럼 많은 시간을 보내왔던 칠손이를 잡아먹자는 말에 시우는 반대하지만 어머니는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 같은 강한 눈매와 다부진 입술로 시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우는 어머니와 충돌한다. 지금껏 어머니의 바람대로 살아왔고 그에 맞게 훌륭한 아들로 자라왔던 시우는 제 나름대로의 반항도 해보았지만 그건 반항이라 할 수 없었다. 목줄에 묶여 죽음의 냄새를 맡지 못한 채 꼬리로, 눈으로, 온 몸으로 자신에게 반가움을 표현해대는 칠손이를 보며 시우는 무력한 자신을 깨닫는다. 칠손이를 풀어주고 도망가라고 소리칠 수도 있었지마는 시우는 그러지 못한다. 그럴 용기도 없었고 그만큼 웃자라버렸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들고 나온 엉성한 올가미를 해체하여 다시 만든 시우는 자신이 칠손이의 생명을 거둘 수 있을지 고민한다. 결국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지도 못하고 칠손이를 자신이 잡겠다, 나서지도 못한 채 시우는 제가 죽을 줄도 모르면서 자신만 보면 반갑다고 꼬리치며 혀로 핥아주는 칠손이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아무도 시우를 대신하여 말리는 이가 없다. 대신 상수형님이 장독대 곁에 쭈그려 앉아 눈물을 떨구는 시우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며 위로할 따름이었다.

 

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면서 울음을 짜냈다. 어머니가 알까봐 울음소리를 꾹꾹 누르면서 온몸 구석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던 눈물의 고삐를 풀어버렸다. 평생 이렇게 많은 눈물을 세상으로 내보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입관을 보면서도 이렇게 눈물이삭을 떨구지는 않았다. 상수 형님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그저 곡식들을 어루만지는 두툼한 손으로 내 등을 토닥토닥 달래주었을 뿐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눈에서는 천천히 눈물이 잦아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약간 현기증이 났으나 몸은 가벼웠다. 나는 처음으로 눈물이 얼마나 무거운지, 때로는 몸보다 눈물이 무겁다는 사실을 알았다.                      - p. 47

 

그는 자신 앞에 닥친 문제를 바라보며 '눈물의 고삐'를 풀어낸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면서도 그 순리를 따라야만 하는 현실이 억울하고 서글플 따름이다. 그는 '눈물'이란 것의 무게를 새삼 느끼게된다. 한참을 울고 나서 가벼워진 몸에 눈물의 무게를 실감한 것이다. 세상은 때로는 잔인하게 다가온다. 시우에게 있어서 가족과도 같은 칠손이를 제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현실이, 불로 털을 지지고 배를 갈라 쓸개를 따내도록 말을 퍼붓고 정신차리지 못하게 공격을 해대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겨내는 것이 통과의례인 것이다. 그는 '성장이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되뇌인다. 초동할아범이 우군이 되어 다리 밑으로 내려와 시우에게 "때로는 눈을 떠도 안 보이는 법"이라며 "때로는 눈보다 귀보다 코보다 손이 더 잘 볼 때가 있다."는 말씀을 들려주신다. 시우는 초동할아버지의 도움 아래서 비로소 성인식을 치뤄낸다. 하지만 이 단편소설 안에 성인식을 치룬 또 한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시우의 친구 진만이다. 새봄이를 임신시킨 진만이는 새봄이의 부모님께 책임지겠다고 말해 뺨을 얻어 맞는다. 그리고 "편안하다."고 말한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응어리가 비로소 녹아 내린 것이다. 시우는 다리 밑 흙때와 이끼들이 시멘트의 살이 되어있고, 다리 밑에서 올라왔는지 아니면 옆으로 기어왔는지 알 수 없지만 몇 가닥의 깡마른 덩굴식물 사이사이에 꿈틀거리는 오래 된 글자들을 발견한다. 어두운 다리 밑에 살아 숨쉬고 있던 사람들의 신화(神話)다. 그리고 그곳에 돌맹으로 자신의 신화를 긁어 새긴다. 비로소 '성인식'이 마무리 된 것이다.

 

다음 작품인 《문자 메세지 발신인》은 왕따문제를 고스라니 내보여주고 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총 12년 동안 학교생활을 되새겨 보았을 때 아이들이 만든 '그룹'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학교에나 그룹은 있다. 생각이 트여있을거라 기대했던 대학교에서도 그 '그룹제'는 존재한다. 이 챕터에 등장해 왕따 문제를 겪는 슬기라는 여학생은 '그룹'에 속해있다가 일명 '퇴출'당한 아이이다. 없는 말도 지어내고, 사람의 단점만 보면 그것을 부각시키려하며, 물어 뜯어서라도 그 사람을 아래로 깔아 뭉개려고 하는 것이 사람 심리라고 하지만 함께 얼굴을 보고 웃고 떠들며 정답게 놀던 친구를 하루 아침에 배신하고 외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 실제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무리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한 명이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 하면 다른 아이들은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룹에 속해 있기 위해, 안정된 학교 생활을 위해, 뒤쳐지지 않기 위해 그 아이의 말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려 들지 않고 무조건 수용하며 맞장구를 치려 한다. 그렇게 슬기는 자신이 어울려다니던 친구들로부터 '너랑 너무 불편해. 앞으로 우리한테 문자도 하지 말고, 전화도 하지 마. 학교에서도 아는 체 하지 마.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문자 발신인으로는 자신의 친구였던 맑음새, 윤지, 푸른이, 다해, 우인이, 예지 이름이 적혀있다. 슬기는 자신도 그렇게 문자 메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바로 정미의 일이었다. 자신이 따돌림을 당하기 이전에 정미를 이렇게 따돌린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모일 때마다 정미의 나쁜 점만 들먹이며 서로 성토하기 바빴고, 결국 정미를 따돌리자는 데에 의견을 굳혀 그런 문자를 보냈던 것이다. 자신의 모습에서 잊고 있었던 정미의 모습을 발견한 슬기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어느 날 정미가 그리워져 정미네로 전화를 걸었지만 오히려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정미 어머니의 말에 슬기는 충격을 받는다. 정미 어머니와의 통화 이후에 슬기는 태연한 척, 학교 생활을 계속 하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슬기는 겉모습만큼은 전과 다름없었다. 같이 몰려다녔던 무리하고 마주쳐도 애써 태연할 수 있었고, 자신이 왕따당했다는 사실을 안 다른 친구들하고 마주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어낼 수 있었다. 물론 속마음은 그럴 수 없었다. 친구들이 끼리끼리 몰려다니거나 수군거리는 걸 보면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슬기는 학교수업만 끝나면 집으로 달려왔다. 학교에 있으면 즐겁지 않았따.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속상하고 심란해졌다. 친구들만 보아도 마음이 어지럽고 집에만 가고 싶었다. 집에 와서 부모님 얼굴을 보면 너무 편안해졌다. 안도감을 느꼈다.    - p. 93

 

슬기는 대보름을 맞아 외할머니댁에 내려갔다가 얼굴도, 성격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악기를 건네 받아 풍물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고 전율을 느낀다. 슬기는 온몸으로 땀기운을 맛보았고, 휘영청 떠오른 달을 보고 정미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 안에서 샘솟는 모든 힘을 꽹과리를 치는데 쏟아부었다. 그렇게 슬기는 한층 더 성숙해졌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지금 누군가도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을게 분명해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내 주위의 친구들도 대부분 이런 상처를 안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고 나 역시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에 슬기의 마음을 십분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긴 하지만 학교 뿐 아니라 사회 속에서도 '왕따'는 존재한다.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남에게 안겨주지 않으려 한다면 더 나은 사회가 될테지만 아직 이 사회는 그렇게 '착한 사회'가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이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슬기의 이야기 말고도 세 편의 이야기가 더 담겨 있었다. 왕따를 당했던 기억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와 마음의 문을 두들겨준 수지에게 집착하는 예분이의 이야기가 담긴《암탉》에는 오리와 닭의 모습을 통해 예분이가 겪는 문제를 담아내고 있다.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 지켜주려하며, 한 마리가 들짐승에 쫓기어 도망가면 밥도 먹지 않고 찾아 다니는 의리의 존재인 오리들과 사냥개에 공격당해 피를 흘리면서도 알을 지키기 위해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는 암탉의 모습은 겁 먹고 도망치려하는 예분이에게 하나의 바람과도 같았고, 동경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그 다음 이야기인 《욕쟁이 할머니와 얼짱 손녀》, 《먼나라 이야기》는 한창 뉴스를 뜨겁게 달구었던 조류독감과 미국소 수입에 대한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조류독감에 걸린 것들만 매장하면 되지 아무 문제도 없는 살아 있는 생명을 생매장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욕쟁이 할머니의 모습은, 자신과 일생을 함께하며 가족처럼 지내온 거위를 떼까우라고 예우해 부르며 친아들, 딸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에 답답해하는 필분이는 "된장"이라고 욕하면서도 할머니 편에 서야할지 나라의 편에 서야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에반해 오연이는 미국소 수입에 의해 침통해진 농민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제 아버지도 다른 농민처럼 농약을 먹고 음독자살을 할까 겁나하는데, 제초제를 뺏기 위해 자신을 뒤쫓아오는 아버지를 피해 도망쳐 들어간 외양간에서 어이소의 고삐를 풀어낸다. 아버지는 한쪽 다리가 세시 방향으로 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이소와 벌어진 간격을 좁혀나가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 그려진 어이소와 아버지의 모습은 오연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성인식> 안에는 서로 다른 다섯명의 아이들의 사정과 사건이 담겨 있지만 이들 모두는 자신들이 겪은 하나의 사건을 통해 한 층 더 성숙해졌다. 단계를 밟아나가며 아픔과 성숙을 반복하는 나이. 그것이 바로 청소년 시기가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성숙이라는 것이 성인식이라는 이름을 빌어 자꾸만 어린아이로 돌아가려고 하는 어른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