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읽고 싶지 않았다. 한국 근현대사 스토리텔링의 달인이라고도 불리는 조정래 작가가 1974년 당시, 중편 「황토」를 발표했을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37년만에 할 수 있게 된 것만 하더라도 내게는 큰 부담이었다. 해냄출판사의 문예담당부에서 조정래 작가를 담당한 편집자가 고심 끝에 선택하고 입힌 겉표지와 제목을 닮은 황토색의 양장을 쉽게 넘기지 못한 것도 그러한 부담감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 다른 책은 손도 대지 않을 것 같은, 불온하고 떨리며 아쉬운 그러한 기분.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미리 겁을내고 손을 내저으며 서평기간이 다 지나도록 <황토> 읽기를 두려워했다. 허나 잠자리에 들기 전 그 제목을 다시 보는 순간, 나는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책을 손에 들고 읽을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를 갈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풀어낸 한국 근현대사 스토리텔링을 두 눈과 누군가에게 내놓기 모자란 상상력으로 맛보았다.
나를 제일 먼저 맞이 했던 것은 조정래의 늙은 문체였다. 지금까지 접해본 적이 별로 없는 옛시대의 말투들, 고전문학과 전후문학에서만 고루 봐왔던 그러한 필체들이 눈 앞에 쏟아져 나왔다. 읽혀지지 않아 포기해 버릴까, 싶었지만 서두르기 보다는 느릿하게 읽기를 택했다. 그렇게 마음 먹고 나니 이상하게도 조정래의 필체가 눈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대극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라도 한 것 처럼 나는 조정래가 들려주는 스토리텔링을 두 눈으로 ’보았다.’ 한 단락만 읽고 자야지, 책갈피를 끼워 넣고 자야지, 하며 읽어 내려가던 것이 어느새 마지막장에 달해 있었다. 새삼스럽게 작가의 필력이 가진 무서움을 깨닫게 된다. 쉬자, 쉬자 하면서 읽은 부분까지 표시해두고 자려 누웠는데 그 뒷이야기가 어찌 될지 궁금해 다시 불을 켜고 책을 펼쳐 들었다. 시대적인 배경은 일제강점기 말에서 해방 전 후를 지나 한국전쟁 이후까지 쭉쭉 뻗어 나간다. 시간의 간격은 짧지만 굵은 사건들은 그대로 등장하며 그 속에 한 여인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인 점례의 비극적인 삶을 고스라니 담아낸 것만 하더라도 이 책은 ’대박’이라 말할 수 있다.
서럽고 분통하기 이를데 없다. 한 여인의 삶이 이토록 비참하게, 역사의 굴레 앞에서 찢겨지고 발가벗겨져 구경거리가 되더니 이젠 손가락질을 당하고 끝내 말이 말을 낳는 사회에 지쳐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기에 이른다. 여인이라는 것이, 그 약한 존재가 세상이라는 것 앞에서, 역사라는 것 앞에서, 남자라는 것 앞에서, 권력이라는 것 앞에서, 배움이라는 것 앞에서 이렇게 모질게 내팽겨치고 모멸 받고 휘둘릴 수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기 그지 없다. 살기 힘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진 여인, 점례는 자신의 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살아 남는다. 그녀를 살아가게 했던 것은 남정네들도 아니었고 친정에 대한 그리움도 아니었으며 세상에 대한 복수심이나 오기도 아니었다. 단순히 자기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어머니의 마음가짐이었다. 책을 덮으며 점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일본인과 한국인, 미국인을 고루 거치며 그녀는 태순과 세연, 동익을 차례로 낳는다. 그녀가 걸어온 그 길에 역사가 깔려 있고 회오리 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녀가 낳아 기르고 품었던 자식들 역시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난,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일제강점말기에 점례를 탐했던 야마다의 피를 이어 받은 태순, 해방 직후 3년 간의 진실한 사랑이었던 항구의 자식인 세연과 몸이 약해 숨을 거둔 세진, 인민군 부위원장인 남편이 사라지고 한국전쟁이 벌어진 틈바구니에서 미군 프랜더스 대위의 사이에서 태어난 동익. 조정래의 장편소설 <황토> 속에서 그녀는 어찌보면 또 다른 이름의 ’대한민국’이지 않나, 싶다. 귄터그라스의 <양철북>에서 할머니는 페미니즘의 상징이자 대지이고 어머니를 상징한다. <양철북>의 시작과 끝에서 동일하게 감자밭을 캐고 있던 할머니의 모습이 어쩐지 <황토>의 점례와 닮아 있다고 느낀 것은 나 뿐일까? 점례는 가난하고 침략 받으며 휘둘리는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를 탐했던 다른 두 남자인 야마다와 프랜더스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각의 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일본인의 피를 이어 받은 태순이 미국인의 피를 이어 받은 동익을 못 잡아 먹어서 으르렁거리는 것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오가며 미국에게 시달렸던 일본의 반발심일지도 모른다.
허나 이 소설은 점례와 시대의 갈등이 큰 틀이다. 사건은 지나가고 시대도 변하지만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변하는 시대 속에서 점례의 생활 만큼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징병과 징용되는 남자들 사이에서 정신대에 가는 것도 아닌데 점례는 야마다에게 팔려간다. 긴긴 세월 속에서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3년을 같이 한 박항구도 공산주의를 부르짖으며 남북전쟁의 모습을 짧고 굵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전쟁통에 끌려가 수사를 받으며 만난 프랜더스 대위 역시 점례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지만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리는 만무하다. 박항구와 점례 사이에서 낳은 세연의 동생 세진이 죽었을 때, 차갑게 식어버린 자신의 핏덩이를 땅 속에 묻으며 황토 위로 떠오른 박항구의 모습을 훔쳐 내던 점례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서야 남편에 대한 미련을 떨쳐낸다.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 허나 점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각각의 인물들이 아니라 바로 시대였다. 잘나신 윗분들이 행하고 있는 잘못이 한 사람이 내뱉은 올바른 소리조차 듣지 않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나라를 빼앗기게 만든 그들이 바로 점례가 싸워야 할 대상인 것이다. 페미니즘 소설은 아름답다. 조정래의 <황토> 속에 녹아든 페미니즘은 거칠고 삭막한 남자들의 사회 속에서 여자인 점례를 통해 어찌 할 수 없었음에도 끝내 살아 남는, 여인이 가지고 있는 강인한 생명력과 생명을 일궈내는 대지와 같은 어머니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으며 이 시대상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와 맞물려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어지럽고 경제가 흔들리고 윗사람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바쁘며 우리는 불평등한 부를 바라보며 부의 재분배를 부르짖는다. 남북간 사이는 계속해서 마찰만 일어나고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불안한 조짐을 보인다. 두 열차가 서로 마주본채 최고 속력으로 내달리고 있는 상황이 딱 지금과 같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 속에서도 또 다른 이름의 점례가 살아가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으로 하여금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느끼건데 단연코 우리가 쉽게 지나치고 잊어버린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재조명 하는 것에 그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 틀림 없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그는 37년을 기다려 지금에서야 중편소설이었던 「황토」를 장편소설로 개작해냈을 것이다. 허나 분명한 것이 있다면 점례가 가졌던 질기고 끊질긴 생명력으로 우리 역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아직도 살아가기 퍽퍽하고, 서양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버터처럼 밍밍하고 느글거린다. 말이 살기 좋은 세상이지 정말로 살기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누가 뭐라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며 주위에 관심을 쏟고 세상에 대항해 진정한 우리의 삶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더이상 한 곳에 오랫동안 고여 썩어버린 물 신세가 되면 안된다.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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