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한동안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었다. 초저녁잠을 즐겨 주무시던 어머니 곁을 한동안 떠나지 못한
버릇이 있던 나는 항상 어머니의 들숨과 날숨을 눈으로 지켜보곤 했다. 먼 친척이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 생긴 공포였다.
어린 나이에도 그 공포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가 겪게 될 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그 사소한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 p49
주인공 알리스는 어느 날 갑자기 엄마의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다.
현실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던 알리스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엄마가 당부했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한다. 죽고싶어도 살아야겠다고, 죽지 못했다면 살아가야 한다고.
훨씬 나중에 그 무서운 장면을 목도하도록 한 아빠의 뜻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나는 죽음의 얼굴을 본 것이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죽음을 품위 있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후 내가 천착한 것은 엄마의 품위였다.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한 것은 엄마였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심지어 죽음이 눈앞에 와 있다 할지라도 오렌지를 사 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삶은 계속되니까. 아직도 엄마는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 p51
개인적으로 공감되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사실 감정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감성이 맞지 않은 것인지 알리스나 아버지의 모습이 가족의 죽음에 대해 객관적이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져
얇디 얇은 책임에도 손에서 놓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으로 페이지를 넘겼을 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배우게 됐다.
악쓰지 마라, 울지 마라,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저항하지 마라.
받아들이기 힘든 사태를 마주하더라도 분노를 폭발하는 것은 추하다. 어찌 되었든 그건 그냥 그런 거니까.
- p55
언젠가 내게도 찾아올 그 현실적인 아픔과 고통은 지금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슬픈 것이 항상 해오던 일들을 갑자기 할 수 없게 되는 것.
항상 봐오던 사람들을 갑자기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어릴 적 경험했던 극심한 불안감을
이제 다시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앞을 향해서 걸어가기도 하고, 숨차게 달려가기도 하면서
결국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결론적으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게 될 거라는 것이
나 자신을 가장 용서할 수 없게 하면서 슬프게 하고, 겁먹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우연히 tv에서 중년 가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가 들어보니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죽음이라는 인생의 마지막 숙제를 제출하는 날이 점점 다가오는걸 느끼고 있자니
봄에는 꽃이, 여름에는 햇살이, 가을에는 단풍이, 겨울에는 눈송이가 그렇게 소중하고 예뻐보일 수가 없다고.
인생의 순차적인 과제를 직접 들어보니 별 것 아닌 것이라 여겨지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알리스도 아빠도 그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곁에 있을 때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했다는 자책감. 함께 있을 때 더 사랑해줄 수 없었던 본인의 이기심
알리스는 나에게 말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부터 시작하라고.
지금부터 오렌지 1kg를 사야한다고 말한다. 이제 나에게 남은 숙제가 생겼다.
오렌지를 사는 것. 그리고 계속되는 삶을 사는 것.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