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에 놓인 막막한 상황이 눈물겹도록 괴로울 때,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고 싶을 때, 나는 가만히 앉아있다. 어떤 일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기에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조급해 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또 그것에 익숙해 졌다. 남들보다 느리지만 보다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게 목표가 된 지금 틱낫한의 ‘포옹’은 그야말로 평화롭게 다가온다.

나는 이 책을 한권의 명상집과 같은 기분으로 들었다. 표지부터 사계절을 찍은 사진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읽는다는 표현보다는 느낀다는 표현이 걸맞을 듯싶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고 또 다른 꽃이 피는... 그런 자연의 섭리를 잊고 지낸 날이 많았다. 그저 하루하루 목마른 시간을 촉박하게 보낼 뿐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마음과 행동이 달리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나이듦을 실감한다. 그만큼 나 자신에 책임을 많이 져야 할 때이고 그럴수록 어깨가 무거워졌다. 이 책은 이런 나에게 조용히 내려놓고 집중하라고 권하고 있다. 마음을 놓고 차분해지기 시작한다면 평화로울 준비가 된 것이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하는 삶을 말하고 있기에 사진 속의 풍경과 그곳에 녹아든 사람들의 표정이 편안하게 보인다.

집중하고 통찰할 수 있을 때 생각은 아주 생산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호흡에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거센 생각의 폭풍은 멈출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집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p167 中

깊고 푸른 바다와 석양이 지는 붉은 태양, 높고 맑은 하늘, 울창한 숲. 이런 자연의 풍경들이 마주하고 있는 한 권의 책. 참으로 고맙고 귀한 선물이다. 잊고 있던 기억을 깨닫게 해주기에, 또 참된 삶에 대해 말하고 있기에, 이 책의 숨은 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한 줄의 글로 전하는 것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더욱이 고승의 인생의 진리와 함께이기에 진한 향기가 묻어난다.

지친 삶에 짧지만 알찬 휴식과 같은 ‘포옹’... 그곳은 안락함이 평화로움과 공존하기에 저절로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도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살면서 모든 일에 이토록 편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다면 진리는 바로 내 마음 속에 있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도 저 멀리 날려버리고 밝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품어본다. 그리고 내 삶을 향해 두 팔을 뻗어 힘껏 안아준다.    

 

 

이틀전 친구와 함께 극장을 찾은 나는 ‘추격자’를 보았다. 시간이 늦었기에 돌아가는 길이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볼만한 영화라는 평에 궁금증이 일어 오랜만에 스릴러를 접했다. 예상대로 연쇄살인범의 이유를 불문한 살인행각이 이어지고, 그들만의 추격씬이 스크린을 압도했다. 스토리는 빈약했지만, 장면들이 매끄럽게 이어지고 배우들의 호연 덕분에 2시간 가량 몰입하여 감상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살인자 ‘지영민’은 ‘하나님의 블랙리스트’의 7명의 살인자들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성불구자라는 콤플렉스를 무고한 여성들의 살인행위로서 해소하려 했던 잘못된 동기부터 시작된 연쇄살인행위. 나는 가까이에 그와 같은 인간들이 함께 숨쉬고 있음을 깨달을 때마다 오싹해지곤 했었다.

타이완 경찰대학 범죄심리학 교재로 채택되었다는 ‘하나님의 블랙리스트’는 타이완의 여자연예인이 집필한 미국 연쇄살인마 이야기이다. 그녀의 상큼, 발랄한 프로필사진과 책의 어두운 제목이 아이러니하게 짝을 이루는 모습에서 긴장했던 마음을 잠시나마 놓는다. 7가지 연쇄살인의 케이스를 차례로 나열하며 사건의 프로필을 케이스 시작 전에 정리하여 보여준다. 이 때 살인자의 얼굴도 함께 실려 있어 적개심을 가지고 보게 되는데, 이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한 눈에 범죄자임을 알 수 있는 얼굴을 가진 이도 있었고, 꽤나 호감을 살만한 미남도 있었다. 외모만으로 판단할 수 없기에, 평범한 모습으로 연쇄살인이라는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살인마가 꼭 우리 주변에도 어떤 형태로 존재한다는 묵시적 경고로까지 느끼게 만든다.

책의 구성은 연쇄살인의 개요와 동기, 성장환경 등으로 차례차례 언급하고 있기에 교재로 채택되었다는 선전문구가 수긍되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저지른 연쇄살인은 불운한 가정환경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로 인해 범인들은 부정적인 자아의식으로 비정상적인 성격을 형상하게 되었다. 몇몇 케이스는 공포영화의 소재로도 사용된 적이 있다기에, 영화 속의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이 커져갔다. 정말 스릴러에서나 봄직한 굵직한 사건들의 집합이었다. 무엇보다 실제 사건 현상을 스케치한 듯 그려진 삽화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은 마지막에 소개된 ‘찰스 맨슨’이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부인이자 배우였던 ‘샤론 테이트’를 포함해 7명을 살해했다. 당시 ‘샤론 테이트’는 임신 8개월째였다니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파장의 사건이었다.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비버리힐즈의 대저택으로 향해 그곳에서 있던 모든 사람들을 잔인한 수법으로 죽인다. 수십 군데의 좌상과 총상을 입은 피해자들의 피로 얼룩진 저택. 더군다나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 사건의 중심이 유명한 감독과의 일이었다니...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지난날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고 범죄자 신분으로 도주해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는 ‘로만 폴란스키’; 그 사실마저 아프게 다가온다. 아카데미 시상식 때 ‘피아니스트’가 호명되어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던, 이 시대의 불운한 감독으로 자리잡은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겨준 이런 무분별한 살인들의 무서운 연결고리 속에 존재하는 고통의 크기란 과연 얼마나 될까.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상황이기에 무한한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 솟구친다. 그렇기에 오늘밤은 무작정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본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그런 환상적인 꿈은 누구나 한번쯤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늘 현재의 나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일 뿐, 악조건의 상황에 놓인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이런 면에서 ‘타임슬립’의 겐타에게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 과거로 이동해 있다는 것 자체가 악몽이었다. 현재 2001년을 살고 있는 겐타는 세계 2차대전이 종식될 무렵인 1945년으로, 전시상황의 일본 소년병인 고이치는 번잡하고 기묘한 세상 2001년으로 오게 된다. 고이치는 과거의 많은 희생을 통해 얻은 현재의 모습에 실망을 하고, 겐타는 일본의 패망이라는 결과를 알고 있기에 머리 속으로 그곳에서 도망칠 방법만 모색한다.

 

갑자기 바뀐 자신의 삶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이내 그들은 각자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순응하게 된다. 고이치는 현재 자신을 사랑해 주는 미나미에게 진심어린 마음을 느끼게 되고, 겐타도 전시상황에서 뜨거운 전우애를 느낀다. 미래에서 자유롭게 서핑을 즐기던 백수 겐타가 목숨이 오고가던 전쟁을 경험했으니 점차 죽음의 의미를 알아갔던 것이다. 무엇보다 미나미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를 만나게 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고 또 미나미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희생이 뒷받침했다는 깨달음을 자연스레 얻는다. 더불어 치열한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들,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과거로 돌아가도, 혹은 미래를 뛰어넘어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느꼈다. 역사 속에서 갇힌 인간만 있을 뿐, 그것을 깨부수는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겐타, 고이치 모두 바뀐 현재를 살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모든 과거의 역사 사실을 아는 겐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가이텐을 타고 미군함정에 출격하는 일이었다. 패전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이 무모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한계 상황이 안타까웠다. 좀 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 아니 전쟁의 아픔없이 살 수 있는 세상 따위는 결정된 역사 속에서 용납할 수 없는 사항인 것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는 타임리프라 하여 자신이 지나온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재로,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 강렬한 자극이 된 소설이 있었다. 주인공 마코토는 삐뚤어진 과거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행복하게 만들려 하지만, 작위적으로 한 가지의 일을 할 때마다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사람이 불행해 질 수 있다는 그런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어떻게 되어도 후회 속에 갇힌 과거... 그렇기에 현재를 후회없이 사는 것에 고민해야 한다는 풀기 힘든 숙제가 아프게 다가왔다.

 

오늘을 사는 나에게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게 해 준 타임리프. 이와 비슷하게 ‘타임슬립’에서도 과거의 의미를 또다시 부각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이 소설에서는 뒤바뀐 운명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동, 내면의 갈등 등을 묘사하고 있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가볍고 유머러스한 문장들로 구성하고 있기에 간간히 웃음도 터진다. 하루아침에 다른 시대를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만큼 변화를 꿈꿀 수 있겠는가. 적응하며 상황파악하기도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현실적인 주인공들의 모습에 나약한 나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거대한 역사 앞에서 힘없는 군상들 탓일까. 씁쓸하고도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 채 책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