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 전 책의 서두에 적힌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판타지 소설인가 싶었다. 읽은 동안에는 왜 굳이 책의 서두에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가 있었던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인트로이었나 보다 싶었다. 헌데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야 알 수 있었다. 왜 굳이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를 책의 서두에 넣었는지 말이다.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어마어마한 책의 두께와 두께에 비해 얇은 종이 그리고 작은 글씨로 채워진 페이지를 보면서 이 책 괜찮을까 싶었다. 표지만 빼고 봤을 때 책을 슬쩍 보면 꼭 사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는 순간 책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다.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자꾸 빠져들게 되었고, 동일시까지는 아니지만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이들은 소설인 만큼 모두 극단적인 상황에 맞닥뜨리고 있었지만, 모두 결혼한 여자들 주변에 어느 정도 맴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가족, 남편, 아내, 아이, 바람, 외도, 친정, 시댁, 사랑, 미움, 증오, 욕망, 관심, 슬픔, 절망, 불안, 의심, 이해, 기대, 용서.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과 함께 다양한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고 그 만큼 다양한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여자의 인생을 둘로 나누라면 결혼 전과 후로 나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읽는 동안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빠져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이 책에서 담고 있는 시간은 단 7일이었다. 단 7일 동안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들이 다 일어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또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특히 열려 진 판도라의 상자와 7일 동안 마주해야 했던, 세실리아와 테스, 레이첼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인간을 괴롭힐 온갖 나쁜 것들이 튀어나왔던 판도라의 상자. 그들은 그 7일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나쁜 감정들을 다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그 7일이 지난 후에는 판도라의 상자에 남겨진 마지막 하나, 희망만으로 남은 삶을 버텨야 했다.

 

살면서 우리는 종종 판도라의 상자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자를 여는 것은 때론 자의에 의해 열리기도 하고, 또 때론 타의에 의해서 열리기도 한다. 이들 역시 그랬다. 호기심에 의해서, 또는 우연히, 원치 않게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어느 누가 자기 남편에게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싶을까. 내 남편이 옛날 누군가를 살해했다는 사실 역시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일 것이다. 죽은 딸의 남자친구와의 비밀 비디오 역시 몰랐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분명 있었다. 몰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란 말을 무심코 내뱉게 될 때도 말이다.

 

결혼. 여자들에게는 결혼 그 자체가 판도라의 상자가 아닐까 싶다. 그 누구도 결혼의 현실을, 육아의 현실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판도라의 상자를 안겨주고 축하해 줄 뿐.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결혼을 하면 삼시세끼 밥을 혼자 다 차려서 먹고 치워야 하고, 빨래 청소 정리는 매일같이 해야 하고, 집안의 온갖 살림마저 다 도맡아 해야 한다는 것을.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 몸도 망가지고 몸매도 다 망가지고, 배꼽은 예전 모양을 잊어버리고 뱃살은 잘 펴지지 않게 되고 머리카락은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아이가 태어나면 몇 년 동안은 낮에도 밤에도 잠을 푹 잘 수 없고, 몇 년 동안은 앉아서 밥도 먹을 수 없고, 몇 년 동안은 앉아 있을 시간이 없고, 몇 년 동안은 아이들을 따라 다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는 결혼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난 뒤 남겨진 것은 언젠간 육아가 끝날 것이라는 희망만을 잡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또 버틴다.

 

그런데 여자들은 결혼 후 또 다른 판도라의 상자를 받게 된다. 남편이라는 판도라의 상자. 평생 나만을 사랑하겠다던 남자가 남편이 되었지만, 남편은 과연 평생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나만 바라보며 살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심에 가까운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 호기심이 더 커지면 남편 작은 판도라 상자인 지갑, 주머니, 핸드폰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럼 고민에 빠지게 된다. 봐야할까 말아야 할까. 엄마들끼리 반 우스개소리로 하는 말 중에 남편은 집에서나 남편이지 밖에 나가면 남의 남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곧 굳이 집 밖에서의 남편에 대해 알려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집에서 만큼은 충실한 남편이길 바라며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 연필과 지우개 -

행복이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함이 있다. 행복할 때 느끼는 안도감과 행복 하고 싶을 때 느끼는 위로감에도 모두 말이다. 행복한 삶을 원하고 크지 않더라고 작은 나만의 행복을 원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저 한 가정의 가장이고 싶고, 남편이고 있고, 아빠이고 싶던 이가 원했던 행복은 자신의 가정이 깨지지 않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 원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가정의 붕괴를 볼 때 여자의 시각으로, 아내의 시각, 엄마의 시각으로만 바라봤던 나로서는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새로운 시각이었다. 남자도 여자 못지않은 좌절감과 모멸감과 위기감을 느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여자들이 경제적인 역할보다 가사와 육아를 거의 전담하며 느끼는 힘겨움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여자들이 가사와 육아에서 벗어나 경제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플러스가 되는 것이고 선택하는 것이지만, 남자들은 선택할 수 없었다. 남자들은 경제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가사와 육아만을 담당하는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버림받고, 배신당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언제나 여자의 몫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남자의 시각에서 한 가정이 깨지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는 아내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고, 그의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무기력해진 남자가 한 선택은 오히려 그의 아이들을 더욱더 힘들게 하였다. 자신이 어릴 때 부모님에게 느꼈던 힘겨움보다 더 큰 힘겨움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안겨 주었던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던 그로서는 얼마나 힘든 고통이었을지.

 

행복을 원했던 한 남자의 힘겨운 삶을 보았고, 그 남자의 행복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또한 보았다. 그런 그가 삶을 바라볼 때 기억하는 것은 돈이었다. 5만 달러의 기억, 1프랑의 기억, 내가 가진 구슬 전부의 기억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기억들이 그 돈의 가지만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의 기억들이었지만, 그의 기억은 그렇게 돈의 액수로 기억되어졌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기억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으로 그의 기억에 깊이 세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 기억과 함께 이전의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그가 산 삶은 값을 매길 수도, 구분을 지을 수도, 어디에도 누군가에게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어쩌면 이전의 삶과는 전혀 반대되는 삶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전보다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원했던 가족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 갖게 되었다. 그렇게 가지려 할 땐 가질 수 없었던 것을 모른 것을 버리고 비운 뒤에야 그는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뒤늦은 행복을 위해 그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에게 찾아온 행복이 계속 이어지길 바래본다.

- 연필과 지우개 -

   

    어른을 일깨우는 

  

  아이들의 위대한 질문

      제마 엘윈 해리스  지음 / 값  14,800원

      4월 3일 출간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