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발견했을 때가 생각난다. 예쁜 상자에 담겨진 세 권의 책. 그 중의 한 권인 '빨간머리 앤'은 누구나 좋아하는
이야기지만, 나역시 어릴때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접한 이후 가장 좋아하고, 늘 그리워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책을 2003년도에 구입했다. 이 책을 사들고 얼마나 설레어하며 집으로 걸어왔던지! 어떤 아는 분이 내 품에
있는 이 책을 보고는 '나도 읽고 싶다'며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모든 이의 마음에(특히 여자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빨간머리 앤이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느꼈던게 기억이 난다.
예쁜 삽화들과 등장인물소개, 그리고 작가 몽고메리와 앤의 비교 대조표 등은 이 책이 정말 배려심깊은 책임을 느끼게
한다. 어릴때 쓴 메모에 영감을 받아 쓴 이야기라니, 더군다나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어 2년을 묵혀두다가 다시 투고해
빛을 보게 됐다는 사실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하마터면 진짜 이 작품을 못 볼 뻔 했잖아. 그랬다면 애니메이션도 안
나왔을 거고, 내 유년시절의 추억도 존재하지 못할 뻔 했다.
'빨간 머리 앤'은 정말 나에게 정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앤의 상상력은 어릴 적 나와 많이 닮았다. 나도 공상을 참 많이
하는 문학소녀였으니까. 이야기도 곧잘 지어내곤 했었는데, 그 창의력을 잘 살리지 못한 것같아 많이 아쉽다.
나는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매튜아저씨가(여기선 매슈아저씨로 번역됐지만) 너무 좋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초록색
지붕집을 향할 때, 앤이 가로수 길을 '새하얀 환희의 길'이라던가, 매리연못을 '반짝이는 호수'라 지으며 좋아하는 대목
(만화에선 이름이 좀 달랐던 거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마릴라 아주머니가 사내아이가 아닌 앤이 오자 다시
돌려보내려하지만, 꼬장꼬장하고 표독스러워보이는 블루엣부인이 앤을 거두려하자 마음을 고쳐먹고 앤을 키우기로
결심하는 대목은 은근 가슴 뭉클하다.
..빠져나왔던 덫에 다시 붙잡힌 듯한 (앤의)얼굴을 보고 마음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극도로 긴장한'어린 아이를 저런 여자한테 보내다니! 아니, 마릴라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p.69)
앤이 실수로 다이애나에게 포도주를 먹인 바람에 절교를 당하고 크게 절망하지만, 후두염으로 사경을 헤매는 다이애나의
여동생 미니 메이를 밤새 간호해 목숨을 건지는 장면 또한 감동적인 장면이다. 아기의 생명을 구하다니...!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 길버트와 오랜기간 앙숙으로 지낸 것은 정말 안타깝다. 정말 멋진 친구인데...물론 그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더욱 공부에 매진하며 좋은 성장을 이루긴 했지만...
말하려면 끝이 없다. 아름다운 자연, 좋은 사람들과 따뜻한 이야기...이야기 전면에 흐르는 잔잔하면서도 은근한
유머러스함 등등..정말 내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빨간 머리 앤'이다.
(다만 인쇄가 너무 연하게 나와 아쉽다..)
빨간머리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