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신데렐라,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과 같은 동화책뿐만 아니라 헨젤과 그레텔, 빨간 구두, 잭과 콩나무, 빨간 모자와 늑대 등 엽기성이 들어간 동화도 좋아했다. 다만 가학적인 내용도 곳곳에 등장하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길을 잃게 되어 동화가 주는 기쁨(혹은 교훈)보다는 두려움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조심해야 된다는 것이다. 공주와 마녀가 나오거나 혹은 서민이 부자가 되는 이야들이 주류를 이루는 북유럽 동화들과는 다르게 이질적인 느낌마저 풍겼던 <아라비안나이트>는 사막과 마법사, 소년 등의 이야기가 버라이어티하게 펼쳐져 있어 재미있고 신나는 모험의 세계였다. 끝에 가선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정신을 쏙 빠지게 만드는 동화는 신선한 자극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느낌 그대로 이번에 만나게 된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아라비안나이트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천일야화라 불리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시작은 이렇다. 고대 페르시아의 사산왕조 연대기에 등장하는 한 왕은 두 아들이 두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기도 했거니와 지혜롭고 사려도 깊은 왕은 페르시아 왕국 법에 따라 그가 죽은 후 왕위는 큰 아들 샤리야르에게 물려받게 된다. 둘 다 사려 깊고 덕망이 높았기에 둘째 아들은 시기하는 마음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형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우애도 깊었는지 샤리야르는 동생을 위해 땅도 주고, 궁전도 지어주어 불편함 없이 살게 한다. 
 
시간이 흘러 동생과 만나려 하는데, 동생은 그 사이에 아내가 적과 내통하는 것을 알게 되어 죽이지만 마음은 괴롭다. 뿐만 아니라 형 샤리야르의 아내인 형수 역시 마찬가지인 것을 알고 형에게 그 사실을 전한다. 샤리야르는 왕비인 아내를 처단하고 다시는 여자를 믿지 못하게 된다. 새로 맞이 하는 신부는 첫날밤을 지내고 다음날 바로 죽이는 가운데, 딸 가진 부모들은 몸을 떨었다. 한편 재상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첫째 셰에라자드는 그녀의 총명함과 아름다움, 용기를 가지고 사자 우리인, 왕에게 시집가기를 자청하고 그녀의 꾀로 시작된 아슬아슬한 1001일 밤간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모험 가득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샤리야르는 왕비를 죽이는 것도 잊고 이야기에 빠져든다.
 
셰에라자드가 샤리야르 황제를 이야기 속으로 처음 빠지게 한 내용은 '상인과 지니요정'이야기다. 부유한 상인이 길을 가다 수는 중에 돌을 던졌는데 그만 실수로 지니 요정의 아들을 죽였다. 화가 난 지니는 상인의 목숨을 취하려고 한다. 상인은 1년의 유예를 갖고 1년 후 요정을 찾아가는데 그러는 중 두 노인을 만나게 된다. 노인들은 각자 가지고 있던 사연을 지니 요정에게 자신들의 기구한 사연을 들려주며 상인을 살렸다는 이야기다.
 

'어부의 이야기'는 못된 지니 요정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어부가 그물을 거뒀는데 그중 하나에서 노란 구리 항아리가 나온다. 뚜껑을 여니 화가 난 지니 요정이 있었고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것에 분개하며, 어부를 죽일 것이라며 어떻게 죽을 것인지만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재치를 발휘하여 지니를 도로 항아리에 들어가게 하였으나 지니의 간청으로 다시 풀어준다. 그에 대한 선물로 호숫가에서 색색깔의 예쁜 물고기들을 잡을 수 있게 하며, 그것을 황제에게 바치면 후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 말한다.
 

이 외에도 널리 알려진 '신밧드의 모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알라딘과 요술램프' 등 총 26편의 이야기들이 삽화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중 이야기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신밧드의 모험'이다. 뱃사람 신밧드가 각종 모험을 떠난다는 것으로 섬으로 알고 내렸더니 (고래로 추정되는) 괴물 등이었다는 둥, 떨어지지 않기 위해 터번으로 기둥같이 생긴 커다란 새(대괴조) 다리에 묶었는데 계곡에는 다이아몬드가 뿌려져 있었다는 둥, 신밧드보다 더 큰 알을 도끼로 깨트려 어린 대괴조를 구워 먹었다는 둥 각양 각색의 이야기들이 펼쳐져 재미있는 모험심을 자극한다.
 
'열려라 참깨', '닫혀라 참깨'의 주문이 들어 있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은 형 카심과 달리 착한 심성의 알리바바가 기지로 돈을 취하고 대대로 부를 누린다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동화 '흥부와 놀부'를 떠올리게 한다. 착한 지니를 만날 수 있는 '알라딘과 요술램프' 를 읽으면 월트 디즈니에서 영화로 제작했던 캐릭터가 떠오르며 귀엽고 깜찍한 지니가 상상되기도 했다.
 
마지막 편에 수록된 '아부 하산 또는 자면서 깨어 있는 자에 관한 이야기'는 흥청망청 사는 아부 하산이 거지가 되기도 하지만, 나그네를 섬기며 선한 마음과 재치를 가졌기에 왕에게 눈에 띄어 아름다운 부인도 얻게 된다. 역시나 또 시작된 사치로 거지가 되지만 그의 재치로 왕과 왕비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식의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성경의 일부분과 닮은 듯도 한 이야기였는데, 결국 코란이나 성경이나 그 뿌리는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설핏 들기도 했다. (코란에서는 아랍인들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식이라고 나온다고 하니까.)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면 이야기 속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어 자치하면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셰에라자드가 이야기를 100일 동안 하는 것이다가 주요 골자인데,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나 조연들은 다른 비유를 들어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어쩔 때에는 이야기가 삼중 구조로 층층이 쌓이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니 복잡해진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근거를 대면서 비유 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모험담을 늘어놓으며 이야기들을 펼쳐간다. '액자 소설'처럼 다중 구조로 첩첩이 쌓여있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황제 샤리야르는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더욱 빠져들 수밖에 없었나 보다. 궁금하게 이야기들이 이어지다가 색다른 것들이 톡 튀어나오니,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에 취하고 또한 1001일 동안 이야기들에 흠뻑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길고 긴 모험담은 결국 냉혹한 황제 샤리야르의 마음을 녹일 수 있었다. 그는 셰에라자드의 용기에 탄복하고 가혹했던 그의 맹세는 누그러졌다. "당신은 나의 분노의 희생자가 되었을 무수한 처녀들의 구원자로 길이 기억될 것이오. 나의 그러한 처사가 얼마나 부당한 것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소." (p. 335)라고 고백하며 그 둘 부부는 행복하게 Ever after를 했다며 유종의 미를 자랑한다.
 
이번에 읽은 현대지성에서 나온 삽화(일러스트)가 삽입된 <아라비안나이트 어렸을 때 읽었던 그 느낌 그대로를 선사하면서 이야기들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어렸을 때 추억에 잠기게 만든다. 르네 불의 삽화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렸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느낌과 익살스러움을 동시에 맞볼 수 있다. 여러모로 만족감을 느끼면서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잠시 동아리 활동으로 미술반에 활동을 한 경험이 있다. 공부에 지친 심신을 달랠 목적으로 들었던 동아리는 의외의 좋은 선생님과 아이들을 만나는 소득을 얻었는데, 그와 더불어 방과 후에 잠깐의 짬을 내서 유화를 그리며 팽팽하게 당겼던 신경줄을 느슨하게 만들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림을 통해 나를 표현하고, 몰입하게 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 놓기도 해, 내 안의 것을 토해내는 과정들은 색다른 경험이었고 결과적으로 내게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미술에 재능이 없었기에 미술시간이 지루하기만 했던 내게는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되었고 그 때부터 유화를 찾아 보는 시간이 늘었고 또한 유화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 또한 늘게 되었다. 지루하기만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단순 암기식으로 접했던 서양 미술사에서 그림 자체를 바라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산초당에서 <내 생에 마지막 그림>이 나왔다. 이 책을 읽으며 첫번 째 드는 생각은 참 잘 나왔다는 것이다. 내가 미술반에서 활동하기 전 유화작품들을 보며 지루하고 고루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그림을 그리며 바뀐 것처럼 이 책에서 화가들의 이야기들을 읽고, 그림들을 가까이 보면서 생각의 전환점이 될 수 있겠다라는 판단에서이다. 즉 그림의 문외한이 '호기심'을 얻게 되리라는 생각 말이다. 호기심은 모든 것의 시작점이므로.
 

 

나와 나이 차이나는 대학 동기 오빠가 있다. 말도 잘 통하고, 재미있고 무엇보다 인생을 화통하게 산다는 점에서 부러운 사람이다. 1년에 네 차례 정도는 국내, 해외를 가리지 않고 여행을 다니는데 그중에 매년 빠지지 않는 나라가 스페인이다. 유창한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그는 언제 한번 스페인이나 혹은 유럽 어느 나라에 같이 가면 자신이 가이드 해주겠노라고 뻐꾸기도 날려주시는 예의 바른 어른이시다. 그의 최종 목표는 스페인 순례길에서 즉 '카미노 데 산티아고' 중에 죽는 것이며, 자신이 남긴 쪽지에는 길 어느 한 곳에 묻어달라는 내용이 쓰여있을 것이라고 이해 못 할 이상향까지 설파하면서 스페인 순례길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낸다.
 
이번에 읽게 된 <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라는 책은 오노 미유키가 취직 후 3년에 갑작스레 찾아온 공황장애를 진단받고 '자아 찾기'라는 이름을 걸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카미노를  떠난 여행기였다.  열차와 버스를 타고 내려 프랑스 남부, 생장 피드 포르에서 800km 대장정이라는 순례길이 시작되는데 가는 곳곳이 이제는 너무도 유명해져 버렸기에 같이 동행했던 마르코스는 "여기는 세계의 축소판" (p. 104)라고 말할 정도로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

미유키는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800km 대장정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거의 없다. 오히려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엄청난 크기의 배낭을 보며 코치하는 사람, 처음 만났던 일행들을 쫓아가기 위해 잰걸음을 하는 미유키에게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말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찾으라 코치하는 사람, "포르 케 카미노스 투(왜 이 길을 걷고 있니)" 물으며 도망치는 삶도 괜찮다고 다독이거나 매일매일 토요일이나 휴일과 같은 직업을 가지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때로는 텐트에서 자기도 하지만 주로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인 알베르게에서 잠시 하룻밤을 쉬어갈 수 있다. 순례길을 알려주는 노란색 화살표를 살짝 놓치기도 하지만 금방 자신과 닮은 꼴을 만날 수도 있어 안심이다. 미유키는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36일간 어우러지며 대장정을 성공할 수 있었고, 자신이 버려야 할 것을 버리며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종내에는 그녀가 애초에 원했던 자아 찾기를 할 수 있었다.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더 웨이>라는 영화에서도 톰이 자식의 유해를 화장하고 그것을 수습해 산티아고 대장정길에 오른다. 자식이 못다 이룬 대장정을 아버지인 톰이 마무리 지으며, 그는 자식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게 되기도 하고 자식의 죽음으로 가득한 분노를 하나둘 놓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미유키도 처음 산티아고를 추천받았던 한국 배재대 김양주 박사의 말대로 "필요없는 짐을 점점 버리고 나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남는 것만이 그 사람 자신인 것입니다. 걷는 것, 그 길을 걷는 것은 '어떻게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을 알기 위한 과정입니다." (p. 7)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유키가 만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과 사별한 후 자신만의 가방을 마련하고 싶다는 조안나도, 절망을 경험하며 순례의 길을 다시 걷고 있는 리타도, 제2의 커리어를 찾고 싶다는 마르코스 그리고 지적 장애를 가진 형을 대신해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은 마크까지, 모두 카미노를 통해서 웃음이나 여유를 되찾고 버려야 되는 것들은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유명세만큼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예전과 다르게 복작복작하다. 혼자 떠나는 여행을 기대했으나 거기선 여럿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의아해할지도 모른다.(미유키도 위의 그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었지 않나.)  그리고 같은 고민의 흔적들과 버릴 수 없어 끌어앉고 버터야만 했던 수많은 밤들을 소유한 동류의 사람들을 만나, 서로 이해하고 터놓으면서 십 년 지기보다 더 오래된 마음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는 움켜쥔 주먹을 펼 수 있노라고,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노라고 순례자들과 흉금 없이 터놓고 이야기하게 될지도.

"성지 순례라는 행위는 마구잡이로 부서진 자아를 치료해 시원하게 쭉 뻗은 등뼈로 되돌려주는 과정입니다." (p. 92)

마음의 뼈마디가 부서졌다면, 내 자신이 미로 속에 갇힌 것처럼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면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계획해 보는 것이 어떨까. 야고보가 잠들어 있는 성지 산티아고 성당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보는 건 어떨까. 

이런 거창한 것이 싫다면, 숙박비가 거의 들지 않는 해외여행을 생각한다거나, 아니 그보다 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쪽으로 말해서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을 만나고 어학연수까지 겸하고 싶다 해도, 그와 동시에 맛있고 다양한 음식까지 모두 맛볼 수 있다면 바로 출발할 수 있지 않나. 

가우디의 나라 스페인, 플라멩코의 나라 스페인, 거칠게 달려드는 소를 향한 투우사의 힘찬 몸짓이 생각나는 스페인이 아닌, 먹고 마시며 걷는 36일간의 자유를 느끼고 이제는 나 자신을 오롯이 찾아가는 과정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나라 스페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