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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한 결과, 나는 남자보다 여자가 좋았다. 등 뒤에 대한 육감이 남자보다 두 배로 뛰어나면서 겁은 두 배로 많다는 점에서. 혼자 하는 놀이로 그 이상 짜릿한 것도 없었다. '짜릿함'을 상대편 용어로 번역하면, '두려움'일 테지만.' (p. 190)
나는 미스터리 스릴러를 좋아한다. 이유는 많은 사람과 동일할 것이다. 추리해가며 범인을 찾아가는 재미, 손에 땀이 차는 긴장감(스릴), 빠른 템포로 치달아가는 글의 흐름 속에 나를 맡겨 놓으면 몰입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품 속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더하기 요즘 미스터리 소설에는 특히나 사회적 이슈들을 톡톡 건드리고 있으니 가볍게 즐기면서 생각 한번 해보고, 기분 좋게 읽어나갈 수 있다. 단,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했을 때. 그리고 악을 확실하게 징계할 수 있을 때라는 조건이 뒤따른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나를 불편하게 했던 작품들을 꼽아보자면, 첫 번째로 킹 선생님의 <별도 없는 한밤에>, 두 번째로 장강명의 <댓글부대> 였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종의 기원>을 꼽아야겠다. 다른 두 작품들에 비해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했는데 '선'과 '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다. 과연 절대 선과 절대 악이란 존재할까에 대한 의문. 인간은 어디까지 선해야 보통의 인간이라고, 사회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얼마나 악해야 악인이라 부르고 범죄를 저지르는 그(혹은 그녀)를 사회 속에서 분리해야만 하는 것인가 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 궁극에는 인간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고 해야겠다.
'도덕이란, 말이 되는 그림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중략) 나라면 이 부분의 색감을 좀 손볼 거야. 곧이곧대로 표현한다고 다 그림이 되는 게 아니라고.' (p. 144)
26살 로스쿨 합격을 기다리고 있는 유진은 계속되는 피 냄새로 단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뭔가 다른 옷감의 감촉을 느낀다. 부드러워야 할 외피는 딱딱하고 뻣뻣하다. 어젯밤 외출복 그대로의 차림임을 알아차린다. 곧이어 기억하게 된 엄마의 음성. '유진아'.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여지를 주지 않는 음성이다. 해진에게 엄마를 찾는 전화를 받은 후 돌아본 방안은 핏자국과 피 묻은 발자국들의 향연이었다. 그와 동시에 다시 들리게 된 엄마의 비명과도 같은 부름, '유진아'. 자취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니 부엌 입구에서 보게 된 건 발이 먼저였고, 피의 웅덩이 속에 두 눈을 흡뜬 채 조커와도 같은 모습으로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싸늘하게 죽어 있는 엄마였다.
유진은 지난밤 단절되어버린 기억 속 편린들을 찾아 죽은 엄마와 엄마를 죽게 한 그(혹은 그들)이 누구인지 추리해 가지만, 결론은 자신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맞닥트린 기억의 진실. 그리고 조각난 기억 사이에서 비어버린 2시간 30분은 왜 생긴 것일까의 의문. 어제, 지쳐버린 몸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엄마에게 건넨 '내일 이야기해 드릴게요.' 의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자신과 비교되며 사람들과 잘 교류하던 형과, 모든 면에서 특출났던 형과 비교하여 유일하게 앞설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수영이었다. 그 수영마저 포기하게 만든 '개병' 때문이었을까. 비범한 흉통과 안정된 호흡을 가졌건만 단 하나 절실히 원했던 수영을 포기하고 모범생으로 평범하듯 살았다. 그것이 복수라 믿었다. 자신의 숨통을 틀어쥔 엄마와 주치의라 불리는 이모 혜원에게 자신을 맡기면서. 그러나 가끔은 '골이 흔들리고, 귓속에서 마이크가 삑삑거리고, 몸이 병든 닭처럼 무기력해지는 고통을 16년씩 견뎌낸 포상으로, 며칠간의 화창한 휴가 정도는 받고'(p. 144) 싶었기에 혜원 처방한 약을 끊고 자신을 풀어놓았다. 자신에게도, 그 댓가가 있어야 옳지 않겠는가. 죽은 형을 대신해 형의 자리를 차지하며 자신을 지지해준 해진이 옆에 있다 할지라도.
'나는 토끼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돌연, 모든 게 시시해져서 토끼를 덤불에 던져버렸다. (중략) 토끼와 여자. 그제 밤과 16년 전 밤. 두 상황은 완벽한 닮은꼴이었다. 대상에게서 피 냄새를 맡았다는 점에서, 야밤에 겁먹은 것을 쫓아다녔다는 점에서, 결국 주검이 내 손에 남았다는 점에서, 투약이 중단된 시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그젯밤을 꽃이라 부른다면, 16년 전 밤은 미래의 씨앗이었다.' (p. 242)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오르듯, 병이 시작되기 전의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가 최강의 컨디션을 유지한다. '발작전구증세'가 나타나 약을 먹기 전까지. 그리고 이것은 16년 전 수영부 여름캠프 중에, 피 흘리며 도망가는 토끼의 피 냄새를 쫓아가던 그 상황과, 어젯밤 망각에서 되찾은 2시간 30분이란 시간 동안 저지르게 만들었던 원인과 오버랩된다. 자신을 무서워하며 도망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쉽게 흥분되지도 않고, 집중할 일이 있으면 오히려 호흡이나 맥박의 속도가 떨어지는 유진이다. 남자라면 당연히 여자와의 잠자리에서 반응하게 되어있지만, 흥분의 역치가 보통 사람보다 높아 자신은 살생부 리스트를 만들고 꿈속에서는 리스트에 오른 그들을 불려 들여 목을 따고 몽정을 하게 된다. 이모 혜원의 표현대로 하면 '포식포르노'쯤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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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유진의 심장이 뛰려면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혜원은 그것 무엇일지 몰라 겁이 난다고 했다. (중략) 혜원은 선언하듯 말해버렸다.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p. 259)
이 작품은 시종일관 유진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작품이다. 따라서 독자인 나는 유진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도 유망한 한 청년인 유진이 비상식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비윤리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감정들. 때론 억울하며, 화도 나고, 답답했고 무엇보다, 슬펐다. 독자인 나 또한 유진이 되어야 했으나 유진이 죽어 있는 엄마를 보며 사건을 복기하는 과정에서는 내 안의 선이 분리되어 나와 격렬하게 저항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토기가 나왔다. 그리고 나도 유진처럼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 이모인 혜원은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그런 굴레를 꼭 씌워줘야 했는가, 하는 물음.
혜원은 유진이 일곱 살이었을 적에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진단을 내렸다. 같은 미술학원에 다니는, 우산을 같이 쓰고 나오던 여자애 그림을 보고. 그 그림에는 여자의 머리에 활짝 핀 우산이 꼭지가 꽂혀 있었으며 이것으로 사이코패스 중에서 최고 레벨에 속하는 포식자의 단계인 '프레데터'라고 말이다.
혜원은 유진 엄마와는 자랄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월등한 실력임에도 언니인 유진의 엄마에게 돌아가는 몫의 칭찬은 못 견뎌했으며, 엄마 것에 오히려 여봐란듯이 자기 이름을 써 놓는 등 이기의 극치를 달렸다. 그런 성격으로 결혼하지 않고 의사의 길로 접어들어 지금까지 왔고, 당연하게도 유진 엄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유진 엄마에게 묻고 싶다. 이런 기질의 동생에게 아들을 맡기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었는지.
유진의 그림을 보고 내리는 진단과 그를 대하는 눈빛, 상담하는 태도 등 그 모든 것이 의사와 환자 관계에서 느끼지 못하는 긴장감을 가진다. 심지어 혜원과 유진은 진료 중에 힘겨루기 양상까지 보인다. 고압적인 태도와 환자(유진)를 자신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하려는 태도는, 엄마가 남긴 일기장 속에서 그리고 연락되지 않는 유진 엄마를 찾아 방문한 집에서 극에 달하는 모습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유진 엄마 때문에도 역시 괴로웠다. 어쩌면 유진에게 그렇게 냉담한 반응을 유지할 수 있는지. 끝까지 몰아세워야 했는지, 자신의 뱃속에서 잉태되어 세상에 태어났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거둘 생각을 했는지. 나조차도 밉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메모인지 일기인지 모호한 글 속에서 자식의 애원을 외면해야 했던 가슴 아픈 기록들과 자식에 대한 염려로 '무해하고 무탈한 평범한 인간'이기를 염원하며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엄격한 규율(약 복용)을 적용해야 했던 이유를, 자식에 대한 염려와 미움이 상충되더라도 이 길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번 어긋나 버리면, 그것이 두 번이 되고, 계속이 되어 버리니까.
미웠던 마음이, 아픔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식의 목숨, 본인 것마저 좌지우지하려는 엄마의 만행은 사회의 위신과 체면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속에 감추려는 의도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굽힐 줄 모르는 자존심으로 본인만이 옳고, 자신만이 최고라 느끼는 의사 동생인 혜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또 탄도라 불리는 그 섬에서, 종탑이 있던 절벽에서의 진실은 무엇일까.
유민을 향해 주먹을 날리던 유진일까, 그도 아니면 과묵한 유진이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서바이벌 게임의 '새총' 일까. 기억은 감정과 더해져 왜곡된다. 설령 진실이랄 것도 없는 우연이거나, 유진 말대로 사건이 아닌 사고였다고 하더라도 발화될(예정인) 악은 그것이 어떤 계기로든 발화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그렇다면 저자의 말대로 악은 무엇으로 점화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누르고 눌렀건만 한 번씩 자신에게 주는 포상이 이처럼 반인륜적, 반사회적, 비도덕적 결과를 낳는다면, 그리고 한번 발화된 악은 소멸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정을 이루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느 부분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어느 지점에서 포기해야 되는지 허탈해진다.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모든 사람이 유진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같은 죄를 짓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사회는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노라고, 이 작품을 쓰면서 철저히 악인이 되어야 했었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이 절절히 이해된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유진이 되어 악의 모습을 써나가야 했던 작가의 고통이 느껴지고 안쓰러움이 들어 설핏 눈물이 나왔다.
타자기를 옆에서 치는 듯 빠른 템포와 그 소리를 듣고 있는듯, 딱 그만큼 거슬림을 가지고 읽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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