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선과 악은 늘 싸운다. 둘 중에 선이 이기기 때문에 혹은 이기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류 문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적어도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법)은 정해 놓고, 암묵적인 규칙(도덕)은 지키면서 그렇게 피해 주지 말고 살아보자고 말이다. 그것을 위배했을 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법적인 제재가 들어간다. 

그와는 반대로 선이 이기는 것을 넘어 타인에게 그 영향력이 지대해질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른다. 불안정한 선과 악의 공존은 종교에 귀의하게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선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 일조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교묘하게 자신의 악을 숨기고 선함을 포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평소에는 선한 이웃,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편, 사회적으로 명망 있지만 넘치지 않게 처신을 잘 하는 사람이 사실은 그 내면에 감추인 악을 교묘하게 감춘 채 살아가고 있다면. 

북폴리오에서 사샤 아랑고의 신작 <미스터 하이든>이 나왔다. 하이든이라는 이름에서 뉘앙스가 주듯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생각나게 하는 작품으로 주인공 헨리 하이든의 내면의 심리묘사가 압권인 작품이다. 악을 행할 때조차 자신을 위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도 이유가 성립되고, 그렇지만 뭔가 좀 찌질한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주인공 헨리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가 낸 작품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데 처녀작 <프랭크 엘리스>는 전 세계적으로 천만 부가 팔린 밀레니엄 셀러고, 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연극 무대에도 올려진 그야말로 문학적 가치가 뛰어난 수작이다. 그와 그녀의 부인 마르타 사이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그의 이름으로 출간된 모든 작품은 그가 아닌 그의 아내 마르타가 썼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을 절대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에게 책을 허락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하 창고 한구석에 곰팡내와 함께 섞어갔을 것이다. 그녀의 책을 처음 찾아 읽게 된 날, 그는 몸을 떨었다.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적재적소에 쓰였기에 토시 하나, 불필요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견고한 요새와도 같을 지경이다.

기실 그녀에게는 신비하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모든 글자나 냄새를 색깔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를 오해하게 만들어 어렸을 적 부모님께 말했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슬픈 이력도 갖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색다른 비밀을 침묵하며 색으로 구별되는 언어를 춤추게 만들었고, 어긋나거나 틀린 단어 하나 없이 글을 써 나가 그것을 '완벽한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녀의 작품은 헨리의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그는 아내로 인해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족한 삶을 누리며, 베티라는 편집자와 불륜까지 저지르게 된다. 몇 년간 지속되어 온 불륜으로 베티는 임신하고, 아내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대신 베티를 태운 차를 벼랑에서 밀어버림으로 은폐한다. 적어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집에 술에 절어 찾아온 이는 죽었다고 믿었던 베티였고 실제로 죽은 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단 한 사람, 아내 마르타였다.

헨리는 진실을 가리기 위해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르고, 옌센이라는 형사에게 쫓기지만 자신을 옭아맬 뚜렷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보육원에서 그에게 당한 이력이 있는 파시는 헨리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그를 쫓는다. 그 와중에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헨리는 그를 돕고 더 나아가 병실을 특실로 옮겨주는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여보,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어떻게 끝날지 알겠어?' (p. 111)

사실 이 작품은 인간의 찌질한 이중적인 면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재미있게 그려 읽는 재미가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계단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시작한 것으로 악은 평범하게 시작된다. 헨리를 쫓았던 파시의 기억에 보육원에서 괴물의 복사판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헨리 하이든은 자신의 이기를 위해 당당하게 행동한다. 그가 돈을 훔쳐 보육원을 탈출했을 때,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은 그에 대한 반증일 터다. 그 외에 공식적으로 헨리의 살인이라고 증명될 길은 없지만, 그가 저지른 악행들은 그가 얼마나 사악한 인간인가를 보여준다. 다만 여기서 그의 심리로 드러나는 뻔뻔함과 당연시하는 정당성, 그리고 치밀함은 자신의 비밀을 파헤치려 쫓았던 파시를 도와줬던 것과 더불어 그가 평소 이웃에 사는 생선가게 주인 오브라딘을 뒤에서 돕는 조력자로서 행위와 상당한 간극을 보인다는 점이다. 

'거짓말쟁이들은 잘 알겠지만 거짓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으려면 아주 약간의 진실이 들어 있어야 한다. 한 방울만 들어가도 충분할 때가 많지만 중요한 것은 거짓말 속의 진실은 마티니 속의 올리브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p.108)

또한 동의해서 얻었다지만 거짓된 삶이고, 아내의 것(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도둑질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철저히 비밀에 묻힌 채 살아야 했건만 그 자신이 드러날 행동을 과감하게 하거나 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면서 서성인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들, 악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면서 오히려 선을 베풀고 자신의 과오를 완벽하게 처리해가며 철저하게 비밀을 만들면서, 드러나면 안 될 정체를 오히려 드러내고 싶어 하는 어설프고 찌질한 행동들은 인간이 가진 동전의 양면과 같은 심리를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그가 피치 못할(?) 실수로 아내를 죽이고 수없는 가정으로 후회의 나날을 보이면서도, 자신이 마르타를 죽이지 않았다는 거짓된 증명을 보이기 위해 아내를 찾으려 애쓰는 착실한 남편 흉내를 서슴치 않는 모습까지 비춘다. 

그는 선과 악 사이에서 종잡을 수 없는 사이코패스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양심(良心)이란 그의 행동을 타당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마음 상태를 적나라하게 읽어가다 보면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온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그 뻔뻔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된다. 그럼에도 밉지 않은 찌질함이라니. 저자 사샤 아랑고는 헨리의 이런 심리상태를, 거짓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을, 매너 좋은 살인마를 무겁지 않게 끌고 나간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페이지 터너'인가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쓰여있다는 문구로 시작하는 <미스터 하이든>. 치밀하고 빈틈없는 헨리 하이든의 죄는 밝혀질 것인지, 헨리의 머리 꼭대기에 있던 마르타는 과연 죽은 게 맞는지 궁금증과 함께 한 번에 훅 읽히기에 벌써 마지막 장이라며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그의 뒷모습이 여운에 남는다.

책을 읽고 몇몇 리뷰를 쓸 때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들이 책을 통해 나온다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철없던 중고등학교 시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몽상들. 그 나래를 중 하나가 책으로 엮어져 나오면 설레임으로 손에 땀이 차면서 말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기시감이 느껴지는, 소녀의 감성을 관통하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명성은 익히 들어본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의 저자, 미카미 엔의 신작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이다.

다리 하나를 통과하면 에노시마 섬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섬에는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운영한 '니시우라 사진관이' 10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폐암 투병 후 작고하신 외할머니의 유품 정리 겸, 사진관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할 목적으로 소설가로 유명한 엄마와 어렵사리 약속을 잡았다. 혹시나 했지만, 벌써 도착해야 할 엄마는 글을 쓰느라 새벽에 잠들었다는 둥, 중편 마감이 코앞이라는 둥의 이유로 알아서 정리하라며 바삐 전화를 끊는다. 엄마와 전화통화 중 마주친 키가 훤칠한 미남자를 보며, 우리의 주인공 가쓰라기 마유는 마음이 술렁이지만 금세 입맛이 싸해진다. 그녀가 손을 떼기 전 한때 카메라를 끼고 살았으므로. 그 후 4년이 지났다.

사실, 마유가 손에서 카메라를 놓게 된 계기에는 어렸을 때부터 그녀만을 믿고 신뢰한 소꿉친구 루이가 있었다. 비록 성별은 달랐지만, 아무도 믿지 못하던 루이와 외로운 마유는 무엇이든 터놓는 사이가 된다. 특히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적인 문제를 마유는 문제 삼지 않았다. 외할머니의 권유로 카메라에 재미를 알아가던 때였고, 당연하게도 그녀의 필름 속에는 루이가 담겼다. 그러나 마유가 술김에 저지른 치기 어린 실수와 오해가 더해져 루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된다. 그 후 마유는 더 이상 카메라에 손을 대지 않는다.

마유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코자 사진관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중 '미수령'이라는 글자가 적힌 사진을 발견한다. 그중 총 4장의, 같은 인물이 시대를 각기 달리하면서 다리 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의문을 품고, 섬 초입에서 만난 미남자, 아키타카는 할아버지가 맡겼다는 사진을 찾으러 오면서 의문의 미스터리가 시작된다.

이 외에도 다른 인물, 기념품 가게 외아들인 다치카와 겐지와 그가 직접 만든 결혼반지에 얽힌 이야기까지 들려주면서 글은 총 3가지 사건(?)에 대한 미스터리들을 풀어간다. 할머니가 남긴 유품들 속에는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미수령'인 채로  그대로 놔뒀으면 아픈 채로 영원히 묻혀졌을 텐데 할머니의 배려 속에 차고 차곡 쌓인 물건들을 그들에게 돌려 줌으로 상처에 비로소 연고를 바른 듯 치유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유 자신도 과거의 자신과도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미흡했던 마유, 치기 어렸던 마유,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고 고자세로 사람들을 대했던 그녀였기에 자신으로 상처를 받았을 사람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도리어 마유 자신에게 더 큰 상처가 되었다. 자신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가졌던 루이가 세상을 등지게 만들었으며, 본인조차 사람을 잃고 꿈을 잃게 만들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마유를 과거 속박에서 건져지기를 소망하며 외할머니가 남겨주신 숙제를, 엄마가 방관자의 입장에서 떠밀므로 그녀는 차근차근 훌륭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손에서 놓아버린 카메라를, 이제 다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을 찍을 때는 현재 내가 담기지만, 훗날 나의 기록이 된다. 나의 사랑과 기쁨, 지난 한때의 그리움이 된다. 그 속에는 나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각자의 사연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보며 '추억'하는 것이다. 혹시 추억이 소망과는 다르게 기쁨만을 담지 않았다면, 사진을 보며 마음 한 곳이 아프다면 니시우라 사진관의 '미수령' 사진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듯 이제 우리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과거와 대면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마유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용기를 내어서 말이다.

조용조용, 나붓한 문체 속에서 소소한 미스터리를 잔잔하지만 분명하게 해결한다. 어쩌면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이란 인생의 바로잡아 주는 보물이 아니었을까. 

물건을 매개로 한 로맨스를 상상한 적이 있다. 그것은 이미 영화에서 종종 다루는 매개물이라 그럴 것이다. 가방을 줍고, 궁금함을 담아 조심스레 열어보고, 주인을 찾게 되어 그 주인과 연애가 시작된다, 뭐 그런 식이다. 꼭 가방이 아니더라도 전공서적이라던가 카메라 등은 연애를 시작하는 주요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딴 소리지만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가 지금은 처형된 장성택에게 작업 걸기 위해 선택한 것도 역시 전공서적이었으니 말이다. 즉, 중요도가 있어 보이는 물건은 나와 호감이 있는 사람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주요 수단임은 분명하다. 이번에 읽은 <빨간 수첩의 여자>에 나오는 핸드백이 바로 그 주요 수단이다.
 
택시에서 내린 직후 집 앞에서 노상강도를 당한 로르. 그녀는 핸드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그것이 도리어 며칠간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의 머리 손상을 입게 만들었다. 집에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고양이, 벨페고르가 있기에 기필코 집으로 들어가야 했으나 열쇠도, 휴대폰도, 신용카드나 현금도 모두 핸드백 속에 있어 뭔가 시도할 수가 없다.  알딸딸한 정신으로 겨우겨우 호텔로 들어갔으나 결과는 혼수상태인 채로 호텔 직원에 의해 병원에 실려가는 것이었다.
 
'르 카이에 루주 서점' 주인 로랑은 아침에 일어나 자주 가는 카페로 길을 나선다. 골목 쓰레기통 뚜껑 위에 얌전하게 놓인 보라색 핸드백을 발견하고 경찰서까지 찾아간다. 그러나 여의치 않은 상황에 다음을 기약하지만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핸드백 속 내용물을 '예의를 갖추어' 대면하게 된다. 그중 빨간색의 몰스킨 수첩 속에는 그녀의 기호를 담은 필체가 우아하면서 유연하게 펼쳐져 있다. 그녀의 기호를 적어 놓거나 일상의 글들을 읽으며 그녀에 대해 알아가다 보니,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가슴 짠하고 관능적이기도 하다. 핸드백 속 소지품에는 흔한(?) 물건들이 줄줄이 나오지만 그녀의 이름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모디아노의 사인이 들어간 책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러나 성까지는 알 수 없어 난감함에도 포기되지 않는다. 현재 사귀고 있는 도미니크의 오해를 사고 헤어지기까지 하는데도 말이다. 로르가 맡긴 원피스를 찾아 세탁소를 찾아 헤매고, 그렇게 만나기 어렵다는 모디아노 작가까지 만나지만 수확은 없다. 기어코 자신이 운영 중인 서점에서 사인회를 갖고 있는 파시에의 도움으로 의외의 수확을 얻어 그녀의 정확한 성을 알고 그녀의 아파트를 찾아갈 수 있었다. 다만, 그곳에 남자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 했다. 덤으로 그녀의 고양이까지 돌봐야 할 상황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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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앙트완 로랭의 책이 열린책들에서 두 권 동시에 출간되었다. <빨간 수첩의 여자>와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가 그것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수첩과 모자는 글을 시작하고 동기를 부여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번에 읽게 된 <빨간 수첩의 여자>가 그랬다. 다만 이 작품은 추리를 곁들인 로맨스 소설이라고 해야 될듯하다는 것이다. 로랑의 나이가 비록 중년에 아내와 이혼하고 만난 지 1년 좀 넘은 도미니크와의 관계도 그녀의 오해로 단번에 차이지만. 또한 핸드백 주인 로르도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남편과 사별한 아픔을 지닌 40대의 여인일지라도 말이다. 
 
로르의 핸드백을 들여다보고 그녀의 '전부'를 깊숙이 알아가는 로랑은 그녀의 인생이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알가는 단계가 로랑에게는 그 핸드백 물건들을 '정중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로랑이 핸드백을 경찰서서 피치 못하게 집으로 가져오게 된 시점부터, 아니 그녀의 향수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책과, 사진들과 특히 수첩 속의 글 속에서 그녀의 마음을 훔쳐보게 된 시점부터 이미 호기심을 넘어 호감으로, 호감을 넘어 가슴 떨리고 그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묵묵하게 그녀의 고양이까지 돌보게 된 것은 아닐까. 그녀가 퇴원한 후 집에 와서 혼란을 겪지 않도록. 아니 어쩌면 더 많이 그녀의 인생에 개입하고 싶어서였을지도.
 
이 작품의 중반까지는 로랑의 로르 찾기 대 모험이라고 할 법하다. 추리를 하고, 직접 행동으로 나서서 찾아 나서는 일련의 과정들이다.  따라서 우리들 역시 로랑이 모든 레이더를 다 동원해 그녀를 찾아가는 과정을 같이 설렘을 가지고 동참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까 같이 궁리한다. 또한 나 자신의 핸드백 속에는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까지 점검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나의 물건을 줍게 되었을 때 내게 돌려줄 수 있는 단서를 남겨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또한 나 역시 누군가의 물건을 주웠을 때, 여기에 나오는 신사 로랑처럼 경찰에게 넘겨 그저 분실물로 처리되지 않도록 애쓸 수 있을 것인가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 쉽게 만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의 나이에서 오는 조심스러움 때문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또한 그들이 겪은 인생(혹은 사랑)의 실패 때문에. 그렇기에 조금은 멋대로 앞서나간 로랑의 행동에 늦지 않게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상황을 유쾌하게 즐길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새롭고 산뜻한 출발을 위한 가능성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말이다.
 
우연과 눈빛만으로 사랑은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소한 물건 하나로도 사랑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