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 플루타르코스의 영웅 전기와 비길만한 것으로 동양의 사마천의 <사기>를 꼽는다. 그만큼 고전 전기를 기록한 그의 사료는 믿을만할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관으로 있었던 아버지 영향이 큰듯하다. 아버지가 화병으로 죽고 남긴 유언을 지키고자 대역사서를 완성할 원대한 꿈을 꾸었으니 말이다. 또한 젊은 시절 중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세계관을 넓힌 것 또한 사기를 집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원동력이 된듯하다.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사관직인 태사령을 박탈당한 위험에 처했으나 스스로 궁형을 자처하며 환관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의 염원대로 <사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현대지성에서 만나본 <사마천 사기>는 지난번에 만나본 <십팔사략>을 편역한 소준섭 교수님이 56편으로 추리고 편역한 것으로 본기, 세가, 열전, 서의 등을 수록했다. 원래는 총 130편의 방대한 양이다. 제왕들의 기록인 <본기>편에서 진시황 본기를 처음으로 열고 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젊은 나이에 천하를 평정하고 패권을 거머쥐었지만, 아방궁을 쌓고 폭정을 일삼았다. 제자백가의 책을 모조리 불사르고 불로장생을 위해 꽤나 많이 애썼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수많은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분서갱유를 일으킨 희대의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다음 대인 제2황제는 조고의 위협이 두려워 자살하고, 유방에게 항복해버리므로 나라는 사그러져 버렸다.
 
<본기>가 제왕의 기록인 반면 항우를 무너트린 유방 본기가 나옴직함에도 항우본기가 나왔다. 항우는 유방에게 패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제왕이 아니다. 하지만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일등 공신을 했고, 혼란기에 실질적 통치를 하는 등 절대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자애롭고 부드러운 성품에, 다른 사람을 공경할 줄 알고 지조 있으며 예의 바른 항우는 이런 인간적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모았으나, 스스로를 너무 믿은 나머지 영웅주의에 휩싸여 결국 유방에게 패했다. 그러나 그의 인품으로 민심을 얻고 사후 노공으로 봉해 안장했을 정도다.
 
<세가>편은 제후왕들의 기록서로서 우리들에게 세월을 낚는다는 것으로 유명한 강태공이 80세까지 자신의 시대를 기다리다 주나라가 천하를 평정하는데 일등공신이 된 이야기,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환락의 시간만 가지다가 북진정책을 실시해진, 정, 송나라를 압박한 초장왕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열전>편에서는 왕과 왕후가 아닌 재상이나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내용도 제일 방대하고 인물들도 실로 다양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사기 열전의 제일 앞에 있다는 백이열전은 백이와 숙제가 군주에 대한 도를 다하고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사리를 뜯어먹고 죽었고 공자로 인해 그들의 이름이 재조명 받았다는 이야기, 형가, 섭정, 예양 등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는 강렬한 절의 정신이 날카롭게 그려있는 자객 열전, 이름난 명의였으나 그의 재능을 시기해 죽임을 당한 편작, 역시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역시 같은 이유로 형벌을 받게 된 창공을 이야기하고 있는 편작창공열전편 등 실로 다양한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만날 수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다 보면 '태사공이 말하였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즉, 우리나라 사관처럼 사실에 입각해 역사를 기록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사견은 그가 나름대로 '인(仁)'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기록은 어진 사람들을 주축으로 하는 기록이다. 또한 '여태후 본기' 편이나 '항우본기' 편에서 볼 수 있듯이 이름뿐인 제왕이 아닌 실질적 지배를 이룬 사람들을 <본기>편에 편입함으로 그 중심에 무게를 싣는다. 하지만 패도정치의 쓴 이면을 가감 없이 써 내려가려 노력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궁형을 받아서라도 자신의 평생을 바쳐 사기를 완성하는데 이처럼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암안에게 보낸 서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백아와 종자기의 비유를 들고,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며 '사기' 완성을 천명하였기 때문이다. 염치 불구하고 그의 이런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의 실록 정신이 들어간 역사서를 지금까지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왕과 왕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평민까지 모두 아우르며 역사의 한 알까지 그려나간 사마천 사기를 읽으며 우리는 어느새 동시대의 인물들과 호흡하며 그들의 고민을 같이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감각의 제국>이라는 책을 읽었다. 온몸에 통증을 호소하는 것도 고통이지만, 땀이 나지 않아 열 내리는 것이 힘든 무한증이나, 감각을 느끼지 못한 무통각증 환자들을 보며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땀이란 인체의 온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갔을 경우, 수분을 배출하며 체온을 조절하는데, 무한증이란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통증을 느낌으로 인해서 많이 다칠 가능성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데, 무통증이란 감각의 부재로 다리가 다쳐도 다친 것을 모르다 보니 결국엔 심각한 고장으로 결국 못쓰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번에 읽게 된 <무통>은 그런 감각적 소재를 가지고, 우리 사회의 존속을 유지시켜주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인 법률을 악용하는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범죄 스릴러다.

'형법 제39조. 심신상실자의 행위는, 이를 벌하지 않는다. 심신박약자의 행위는, 그 형을 경감한다.' (p. 183) 

나다구에서 교사 이사카와 일가족 4명이 처참하게 살해되는 것으로 이 작품은 시작하고 있다. 모두 얼굴의 전두엽이나 후두엽, 측두엽 등을 심하게 난타당했으며 그 살해 현장을 보며, 감정이 결여된 사람이 저질렀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유일한 단서는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s사이즈의 모자와 xl 사이즈의 신발, 그리고 지문이 묻지 않은 젤리 케이스뿐이다. 이리저리 알아보지만 수사는 지지부진 난항에 접하고 결국 미제로 남아 버린다. 시간은 흘러 8개월이 훌쩍 뛰어넘고 사건을 맡은 하야세 형사는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다. 그는 범인이 형법 제39조 덕분에 풀려나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사건에 더욱 집착한다. 

한편 두 명의 천재 의사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는데 다메요리와 시라가미가 그들이다. 다메요리는 낡은 진료소에서 검사 장비도 하나 없이 환자들이 오면 그들을 눈으로 스캔하므로 질병을 알아내고 예후까지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과 '범인증'이라고 범죄를 저지를 것을 알아보는 능력도 있다. 그는 진료를 딱히 받지 않아도 살 환자와 아무리 최첨단 과학의 치료를 받더라도 죽을 환자가 나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회의가 만만찮다. 적어도 본인의 능력을 돈벌이 등 치료 외의 목적으로 악용하는 천재의사 시라가미와 대비되는 인물이다. 다메요리는 우연찮게 지갑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아준 나미코라는 임상병리사를 통해 이사카와 일가족 살인범이라고 자백하는 10대 소녀 사토미를 알게 되고 그녀를 만나 그녀가 '범인증'이 있는 인물인지 파악한다. 나미코 주변에는 그녀를 좋아하는 무통 환자 이바라와 그녀를 스토킹하고 집착하며 조현증으로 위장한 전남편 사다가 있다. 그리고 두 천재의사는 서로를 알아보고 한쪽은 범죄를 막으려 하고, 한쪽은 연구를 목적으로 범인을 보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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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말한 무통,  그것도 선천적 무통각증이란 이처럼 자신이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의 빈도도 높을 뿐만 아니라, 치명적이다. 더하기 자신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추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보다 이 작품에서 형사가 집착하는 형법 39조처럼 심신상실자나 심신박약자로 위장하여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범죄자들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고 이것을 이용하는 사례도 만만찮다. 더불어 알코올로 인해 범죄가 발생하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범죄가 발생했다고 추정해서 감형되고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다. 이 같은 뉴스는 비일비재하고 나오기 때문에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하야세 형사와 같은 의견을 개진해야 하는가, 하면 그 역시 녹록지 않다. 이 작품에서도 나오지만 하야시 형사를 형사로 이끈 니카와 형사의 사촌 동생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으며, 그의 범죄 이력과 사회 속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백 때문이다. 즉 심신상실자로 진단받는 범죄자들의 인권을 무시할 수 있는가,라는 것 또한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이내 무고하게 희생당한 피해자들 입장 또한 숙고해 봐야 하는 문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제로 내세워지는 정신병을 이력으로 내세워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자들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을 어떻게 가려내고 정확한 판단으로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의 숙제로 남는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그것을 악용하는 사례를 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주제도 묵직하고 처음부터 희생당한 일가족들의 처참한 묘사나, 길거리 묻지마 살인, 나미코의 전 남편의 심리묘사, 사실적인 수술 장면,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살인 장면 등은 길기도 길지만 너무 리얼하고 잔인하게 느껴져 속이 니글거린다. 아마도 전직 의사라 그런 것 같지만, 강약이 필요함에도 강으로만 치달은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이 더운 여름에 한방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먹히겠다는 생각이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에서도 다루고 있는 병원의 운영 문제 등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뉴스를 통해서만 들었을 때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의료문제가 한걸음 떨어진 문제가 아닌, 나에게 직접 닥친 문제라는 인식도 강하게 들었다. 즉, 구사카베 요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내놓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가 독자들에게 심각하게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전 이 드라이브를 마음껏 즐기기로 작정했어요. 즐기겠다고 결심만 하면, 대개 언제든지 그렇게 즐길 수가 있어요!" (p. 51)

여전히 로맨스 소설을 보고 가슴을 설레고, 어린 시절 혹했던 동화들을 보며 눈을 반짝인다. 그중 열중하면서, 오늘 분량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다음을 기약했던 만화가 있다. <빨강머리 앤>이다. 피터팬처럼, 모래요정 바람돌이처럼, 미래소년 코난처럼 내 어린 시절의 한 영역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던 만화. 끊임없이 조잘대는 앤의 이야기를 알아들으려 귀를 바짝 세우고, 정신없이 흘러가는 말들의 향연 속에서 때론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설렘은 끝날 줄을 몰랐다. 앤 속에는 무한 긍정의 에너지가, 끝도 없는 상상력이, 조수 간만의 차가 급격한 희비극이, 사람을 이해하는 아이들만의 통찰력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백영옥 작가가 좋아하는 동화가 두 권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키다리 아저씨>이고 다른 하나가 <빨강머리 앤>이란다. 소설가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초등학교 때 시작해서, 작가로서의 길이 험난할 때 위로받았던 만화 역시 <빨강머리 앤>이었다고 말이다. 보는 것만으로 괴로운 일상이 살아질진대, 앤이 하는 말을 노트에 적으며 소설을 쓸 수 있었노라고. 그만큼 앤은 자신을 일으켜 세운 기적이었노라고 말이다.

'추억이 기억과 다르다면, 그런 것 때문이리라. 추억 속엔 '나'아닌 '너'도 있다. 추억은 '우리가 함게 만드는 것이다.' (p. 190)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 3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여전히 실종 상태로 처리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침통함을 감추지 못 했다. 여파로 경제 침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한 고등학교의 거의 대부분의 학생을 잃은 사건. 대한민국 국민의 공분을 사기도 했었고, 슬픔 또한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죽은 아이가 내 자식과 비슷한 연령대라서 무척 힘들었다. 연관이 없는 나도 이럴진대,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어떨까. 앤 역시 매튜 아저씨를 먼저 보내드리고, 깊은 슬픔에 침잠한다. 같이 살아가고, 추억의 한 장으로 남겨진 이유. 그렇다. 그 속엔 '나와 너'가 함께 오롯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잃으면 슬픔을 묻으면 안 된다. 묻는다고 없어지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상흔 깊게 패이고, 어쩌면 회복되지 못할 골을 남기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앤이 그랬듯, 마음껏 울고 슬퍼해야만 한다. 눈물로 슬픔을 분출해야 한다. 앤은 말했다. '우는게 그 아픔보다는 덜 괴로워요.'라고. 시간이 약이 될 수 없을지라도, 마음의 상처가 고름으로 썩어 문드러지지 않도록 마음껏 슬퍼할 사간을 가져야 한다.

'부모는 종종 자기 불안을 아이에게 투사하고, 자신이 풀지 못한 인생의 숙제를 아이가 반드시 풀어주길 바란다고, 그래서 아이에게 자신이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의도치 않게 넘겨준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조건 없는 사랑처럼 보이는 부모의 사랑조차 폭력이 될 수도 있다.' (p. 109)

좋은 이모는 되는 건 쉬워도 좋은 엄마가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다. 나는 멋진 이모였다고 생각한다. 언니가 낳은 내 조카들을 보며 마음껏 사랑했었다. 아낌없이 놀아주고, 무조건적 관용을 베풀었다. 의무감보다 사랑으로, 전폭적인 지지로, 자애로움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정작 내 자녀에게 쏟아부어야 할 사랑과 관용과 지지는 '교육' 보다 한수 아래로 내려갔다. 자녀를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랑보다는 책임감의 무게가 더 크게 작용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그 일면에는 내가 해내지 못 했던 것들이 두려워서,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두려워 조카에게 했던 조언들과는 다르게 내 아이를 몰아세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으로 포장해서 내 두려움을 감추고, 나의 숙제를 떠넘기며 무언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근 1년간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하겠다.

'우리가 무엇인가 할 때, 망설이는 이유는 그 결정으로 지불해야 하는 몫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의 우리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몫이다. 소설가 김훈이 말했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을 물지 않고 낚싯밥을 먹을 수는 없다."
모든 선택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이 선택의 본질이다. 샤르트르의 말처럼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p. 171, 172)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사소한 하나라도 그것을 선택할 때, 심장이 쿵쿵댄다. 이 선택이 최선인가. 나와 내 가족과 앞으로 향해 나아갈 때 바른 선택인가 고민되는 요즘이다. 내가 선택하므로 얼마나 많은 리스크가 따라오는가. 과연 감당할 수 있는, 값어치가 있는 선택인가. 과감히 바늘을 물고 내 선택대로 걸어가질 주저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마음과 머리는 따로 놀 때가 많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열심히 보던 <빨강머리 앤>을 결혼하고 남편이 구해주어 열심히 봤더랬다. 중학교 때는 20권짜리를 한 권씩 사 모으기도 했고, 10권짜리를 도서관에서 구해 읽기도 했다. 실수투성이 앤이 자라서 대학도 다니고, 선생도 하고, 길버트와 결혼 후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장성한 이야기들까지 말이다. 이번에 백영옥 작가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읽으며 앤과 마릴라 아주머니, 매튜 아저씨가 하는 말들을 글로 읽는데도 마치 음성이 자체 지원되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요즘처럼 감정의 등락폭이 컸던 때에, 앤이 하는 말을 읽으니 다시 가슴이 설렌다. 단호한 듯 사실은 정이 깊은 마릴라와 언제나 앤의 편인 매튜 아저씨는 여전히 울컥하게 만든다. 그 속에서 사유했던 백영옥 작가의 이야기들이 왜 이다지도 모든 글들이 마음을 찌르는지 모르겠다. 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들뜬 마음이 작가의 이야기로 나를 다독인다. 이름으로 고민하고 소설가가 되기 위해 걸어갔던 험난한 여정, 친구들에 대해, 때로는 자녀에 대해, 첫사랑을 보내고 남자친구가 남편으로 같이 살아가는 허심탄회한 작가의 이야기들이 말이다.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던 앤. 그리고 그녀를 보며 위안을 얻고, 기적을 체험한 백영옥 작가처럼 나 또한 작은 기적을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