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가, 정이현 작가가 돌아왔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달콤한 나의 도시>로 이 시대의 평범한 여성들의 감성을 어루만졌던 정이현 작가가 1년만에 장편소설<안녕, 내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특별한 안부를 전했다.
이번 소설은 김일성이 죽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1990년대 강남 반포에서 함께 고교시절을 보내는 세 친구들의 성장 스토리이다.
부모가 이혼하고 부유한 할머니 댁에 얹혀사는 세미.
통제할 수 없이 반복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뚜렛 증후군에 시달리는 준모.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은 절대 잊지않는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 지혜.
그들이 함께 보내는 십대의 마지막, 세미의 할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세 친구는 엄청난 비밀을 공유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들의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그들이 나누는 한 시절의 우정과 사랑, 성장의 과정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정이현 작가의 기억 속 1990년대를 만나보자.
Q 작년 <사랑의 기초> 이후 1년 만에 새 장편소설을 출간했는데 무척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부지런한 편은 아니에요. <사랑의 기초> 출간과 동시에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연재를 시작했거든요. 어떻게 보면 쉬지 않고 바로 나온 셈이죠. 사실 작년에 개인적으로 다짐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썼던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은 스스로 뭔가를 열심히 했다는 그 시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해요.
Q 전보다 분위기가 밝아진 것 같은데 소설의 영향인가요?
아무래도 영향이 있어요. 더구나 <사랑의 기초>때는차분한 이야기였고, 이번에는 독자분들에게 재미있게 읽혀졌으면 하는 성장소설이라서 더 기대감이 커요. 아마 그런 기대감이 표정에 드러나는 것 같아요.
Q 소설은 김일성이 죽은 1994년의 이야기를 김정일이 죽은 2011년에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소설의 배경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요?
IMF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90년대는 냉전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패러다임이 변했다고 믿었던 시대예요. 그 당시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같은 사건사고는멀쩡한 집에 바퀴벌레가 나타나거나 금이 가듯이 불길한 징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주변인들의 성장 이야기를 맞물려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Q 작가에게 1990년대는 어떤 의미인가요?
90년대는 제가 열아홉 살, 91학번이었어요. 제 인생의 8~90%가 형성됐던 시기였죠. 그래서 전 늘 스스로 ’90년대 아이’라고 생각해요. 세시봉 아저씨들이 70년대를 이야기하듯.(웃음)
지금 10년이라는 시공간적 거리가 생기면서 비로소 소설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소설 속에 열여덟 살의 세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이 중 작가와 가장 가까운 인물은 누군가요?
제가 습작을 시작한 건 2000년대인데, 90년대까지만 해도 제가 소설가가 될지는 상상도 못했어요. 하지만 전 무언가 기록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데, 소설 속 비범한 기억력을 지닌 지혜를 보면 그때의 저와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누군가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90년대에 대한 자료조사를 했냐고 물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저도 몰랐던 제 과거의 트렁크 속에 겹겹이 쌓여 있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 차곡차곡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Q 소설 도입부에서 세미, 준모, 지혜가 함께 시험이 끝나고 하교를 하는 풍경은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 시절 추억을 호출하기에 충분했는데요.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생으로 매일 밤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을 꾸역꾸역 버텼던 기억, 더운 여름 교정 반바지 차림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돌아다닌 기억, 자율학습 시작 전 떡볶이를 먹던 기억... 모두 시시하지만 그 평범한 추억들이 우리의 소중한 10대 시기를 구성했던 것 같아요.
Q 90년대는 한 마디로 소비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압구정으로 대표되는 강남문화는 한국 자본주의의 상징이기도 했는데요. 반포라는 특정 지역을 등장시킨 이유가 있나요?
전 소설이 또 하나의 강남 이야기이라기보다 ’아파트 키드’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주인공들이 강남의 중산층 자녀라는 공통 요소는 있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건 강남이라는 지리적 공간보다는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파트 키드로의 감성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회색 콘크리트 건물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까지도 회색인 건 아니잖아요. 90년대 평범한 아이들의 사랑과 우정이 우리 시대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요
Q 후반부에 세미, 준모, 지혜가 겪은 커다란 사건은 공통의 비밀을 만들었는데요.
어른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개인적인 비밀을 마음 속에 묻고 살아가잖아요. 세 친구에게 ’구덩이’란 공통의 비밀이자 각자의 치부인 거죠. 구덩이는 기성세대의 가치와 결별을 의미합니다. 할아버지 세대는 묻어버리고, 부모님 세대와는 불화를 겪고, 그렇게 통과의례처럼 어른이 되죠. 더 중요한 것은 그 상처와 비밀을 ’덮고’ 사는 것이 아니라 ’간직’한 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Q 중심인물인 세미와 그녀의 속물가족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인가요?
독자들은 각자 자신이 세미라는 입장에서 읽으실텐데요, 현재 풍문 속에서나 등장하는 세미를 통해 ‘세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말 잘 살고 있는 걸까?’라고 반문하며 보셨으면 좋겠어요.
세미도, 독자들도 각자 나름의 힘든 시기를 겪고 지금 현재를 살아 가고 있잖아요. 세미를 통해서 내가 지나온 그 시간을 한 번쯤 생각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소설 속 세 친구의 성장 이야기와 동시에 ‘속물가족’으로 상징되는 세미 가족을 통해 90년대 자본주의시대의 몰락이 함께 보여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Q 세미가 준모에게 덴마크어로 ’안녕’이 뭐냐고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소설 제목의 ’안녕’은 무슨 뜻을 담고 있나요?
한국어의 ’안녕’은 다른 언어와 달리 ’만남’과 ’헤어짐’의 의미로 함께 쓰이잖아요. 여기서 안녕이란 소중한 내 모든 것에 대한 헤어짐일 수도 있고, 그 시절에 대한 안부 인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둘 어느 쪽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웃음).
Q 최근에 카카오페이지에서 에세이를 연재중인데요. 모바일연재는 지면과 다른 점이 있나요?
읽는다는 행위는 동일한 것 같아요. 단지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독자를 끌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독자를 만날 기회가 더 생기는 건데, 모바일이라고 해서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연재 중인 소설은 도시 여행 픽션 에세이인데,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보는 이유는 현실과 잠깐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여행이라는 컨셉과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유료 컨텐츠가 한국에선 아직 시기상조인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 시도 자체가 좋고 재밌게 쓰고 있습니다.
Q 앞으로 독자들에게 어떤 작가로 남고 싶은가요.
항상 젊은 작가로 남고 싶어요. 항상 지금 이 시대를 나만의 안경으로 새롭게 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젊은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원로 선생님이 아니라 항상 현역작가였으면 좋겠어요(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