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 ’다큐멘터리3일: 보수동 헌책방 골목편’을 하나티비로 시청 한 후, 예전 헌책방에 관한 추억이 생각났다. 성문종합영어를 새책으로 사서 거의 보질 않고 1년 뒤 헌책방에 파는데 주인아저씨가 책이 너무 깨끗하여 어디서 훔쳐 온 것 파는 것 아닌지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그곳에서 바둑 묘수풀이 책을 한권 샀던 기억도 난다. 어쨌거나 영어를 거의 공부 안 한 고등학생이 대학에 가서야 취미를 붙히고 그것이 직업이 되어 토플writing강의를 하고 있으니, 인생은 끝까지 살아 봐야 하는가 보다.

6월 어느 무더운 날, 문득 신촌의 헌책방을 뒤졌다. "XX글방", "숨어있는 책", "XX서림’ 등의 왠지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친숙한 이름들이 감성을 건드린다. 각 서점별로 특색이 있어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명찰순례1,2"권을 각 3,000원씩에 사서 읽어보니 10여년 전 절판된 책, 누군가 찾으려해도  찾기 힘든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뿌듯하다. 전국 방방곡곡 사찰에 대해 이리 자세히 설명해 놓은 책을 어디서 구하리.  1권은 책 전체가 좀 휘어져있고, 2권의 겉표지에는 ’강남구청종합자료실’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지만, 그리고 3권까지 있어야 시리즈가 완성이 되는데 그 책은 아직 못찾았지만, 이 책들은 나에게 소중하다. 누군가 1권 앞쪽 몇 페이지에 밑줄을 그어 놨다. 뒤는 그런 표시가 안 되어 있으니 보다 만듯하다.


<절판된 책이라 인터넷에 선명한 사진이 없다>

고2때 읽은 박경우의 '배낭족'이란 책을 찾아 봤는데 없다. 당시 꿈이 배낭여행 세계일주였으니 그 책이 나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리고는 노태우 정권 시절 해외여행 자율화가 되고나서는 오히려 그 꿈이 사라져 갔다. 원하는 책이 다 있는 곳이 헌책방이 아니라 한권 한권 누군가의 손길을 거친 책들이 가지고 있는 사연을 따라가다보면  무언가 번뜩이는 책이 있는 곳이 헌책방이다. 나에게 필요한 책을 찾는 곳이 헌책방이 아니라 나에게 망중한의 여유를 가져다 주는 책을 찾는 곳이 헌책방이다. 그곳에서 MS windows에 관한 책을 구하면 무엇하리 MS window98 밖에 없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헌책방을 가고, 무엇 때문에 헌책방을 오랜만에 가보고 싶어지는가?

언젠가 헌책방 순례를 하다보면 '배낭족' 그 책을 구할 수 있으리. 운이 좋으면 저자인 박경우씨가 지인에게 싸인하여 준 책으로 구할수도 있으리. 꼭 경매에서 수억의 금액으로 팔려나가는 작품만이 골동품인가?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수억의 가치가 있는 골동품이다.

드디어 고 오주석씨의 책을 읽으며 시작된 나의 호기심, 기다리고 기다리던 간송미술관을 관람했다. 오주석씨의 책을 읽다가 단원과 혜원의 그림에 쏙 빠지고, 그러다 보니 최완수씨의 겸재정선의 그림에까지 눈길이 가고, 결국 이 모든 작품이 방대하게 수집된 간송미술관 이야기를 안 접할 수가 없었고, 5월 봄 2주 간의 개관 중 총 3번을 방문하였다. 한번은 친구와, 두 번째는 혼자서, 마지막으로 와이프와 데이트로 갔으니 간송미술관의 오래된 정기적 팬이 된 느낌, 나쁘지 않다.

첫 방문에서는 그의 세밀화에 느낀 바가 컸다. 미술의 기본기가 이리 탄탄한 인물이라는 것. 거의 서양화에서나 보던 사실적 묘사가 대단한 관찰력으로 이뤄낸 그림들에 감동 받았다. 역시 창의력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본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확인했다.


(추일한묘: 가을날 한가로운 고양이. 이 그림은 실제로 봐야한다. 그래야 세밀함이 느껴진다. 사진의 한계이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그나마 그의 초기 작품과 후기 작품이 구분이 되는 듯 했다. 세밀하게 그릴 수록 초기일 확률이 높고 마치 일필휘지로 대충 그려 놓은 듯 하면 할 수록 후기작품이다. 그만큼 경륜이 녹아든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청풍계’가 그의 진경산수시대를 알리는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각 나무들과 바위의 세밀한 부분을 생략하고 그 특징만을 취해 그린 후기의 성향도 있고, 어느 정도의 세밀함도 아직 살아있어, 이 두 가지가 버무려진 그림, 바로 청풍계이다.


(청풍계)

세 번째 방문에서는 무엇을 느꼈을까? 느낀 것 없다. 세 번째 방문은 마치 좋아하는 그림 또 보고  싶어서 갔다고나 할까? 세 번째 방문에서는 무엇을 분석하고 싶어 간다기 보다, 그저 좋은 그림 느끼고 싶었고 그리 했다.

이 책에서 어느 부분이 설명이 잘 되어있고, 어느 부분이 아쉬운지 리뷰를 남기면 무슨 소용이리, 그림의 참 맛을 알지 못하는 이는 어차피 사골국물을 우려 먹지 못할터니이. 또한 저자는 겸재 연구의 대가이시니 나 또한 그 분의 글에 왈가왈부 할 자격이 없다. 일단은 이 책으로 그림의 배경을 익히고 나중에 전시회 또 할 때 가슴으로 느껴 보시기 바란다.

간송미술관 가을전시가 기대된다. 아마도 장승업 차례가 아닌가 하다.

몇 달전 이덕일의 우암 송시열에 관한 책을 읽고 당시 집권 수구 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오로지 세력 유지를 위해서 북벌론을 주장하고 모든 정치적 움직임이 기득권 유지에 촛점을 맞춘 행태가 요즘의 보수세력과 너무도 일치하기에 공감이 크게 갔었다.

그러던 중 뉴스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정조가 노론벽파인 심환지와 밀서를 주고 받은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내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 다 짜고치는 고스톱인가? 지금도 그러한가?

그러나 최근 이 책을 읽고 느낀바가 있으니, 우리나라 고유의 산천을 제대로 그리고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시를 만들기 시작한 ’진경문화’는 당시의 집권보수층에서부터 나온 것이고, 그러한 집권보수를 정면 부정한다면 ’진경문화’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초반엔 저자의 노론에 대한 찬양은 좀 지나치다 싶었지만 계속 읽다보니 이 또한 일리있는 주장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며칠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들렸다.

진보란 무엇이고 보수란 무엇인가? 기득권층은 기득권 유지가 최고의 과제인 것인가? 송나라를 부인하고 명나라를 계승한다는 ’조선성리학’도 기득권 유지의 일환인 것인가? 아니면 소신과 신념의 산물인 것인가? 그럼 결국은 그러한 사상의 유산인 진경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신없이 한 주가 지났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정말 대단한 충격이다. 우리나라 현재의 정치상황과 연계하여 이 책을 읽으니 많은 것을 생각케하고 아직도 많이 혼란스럽다. 정리가 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이 책은 진경시대 당시의 사회상, 정치상 등이 논문의 형식을 빌어 설명되어있다. 많은 것을 생각케 하지만 또한 배경지식을 어느 정도 더 쌓고 나중에 다시 한번 더 봐야 겠다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