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내겠다던 ’김형욱 회고록’의 완결편, 왜 저자 김경재 (필명 박사월)는 이를 30년 만에 썼는가? 예전에 써 놓고 출간을 안 해 놓은 글이 아니다. 책의 권말에 30년 만에 집필을 다시 하는 감회가 적혀 있으니 말이다.

30년이 지난 세월 동안 김형욱에 대한 평가가 많이 달라져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김형욱이 중정 부장으로 재임 중에 벌였던 부도덕한 정치 공작들과 미국 망명 뒤 벌였던 박정희 반대운동을 싸잡아서 한 묶음으로 매도해오던 국내 언론들은 시대가 전두환, 노태우를 거쳐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까지 이르자 슬그머니 비판의 각도를 바꾸기 시작한다.' (p.268)

이 씨리즈의 마지막은 김형욱의 증언 없이 저자 김경재가 그의 죽음과 당시의 정세에 관한 이야기, 덧붙혀 박정희의 마지막 순간도 추가하여 낸 책이다. 저자가 김형욱과 함께 집필했던 기간의 이야기도 있다. 인세는 김경재가 다 가지고 간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하니, 하긴 김형욱이 뭐가 돈이 아쉬워서 인세를 탐하겠는가.

김형욱 납치, 살인을 전후한 청와대 상황은 급박 그 자체였다. 그 해 10.26과 12.12가 일어난 것은 물론이고 부마항쟁으로 인한 정권의 위기, 김재규와 차지철의 일촉즉발의 상황, 물론 발화가 되었던 일촉즉발이다. 아마도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어느 사찰의 석상이 79년 많은 땀을 흘리지 않았을까한다.

차지철이 박정희의 눈과 귀를 막고 강경주장을 계속 해 왔다는데, 사실 박정희가 그 때 즈음하여 독재자의 극한을 치 닫고 있을 시기라서 결국은 그가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하는 것만 원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차지철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중용하여 그의 말만을 들었을 것이다. 무식한 차지철을 왜 비난하는가? 단지 주인에게 충성한 개의 역할을 했을 뿐이고 그것으로 행복했던것 뿐인데 말이다. 그런 개를 좋아하고 중용한 박정희가 문제인 것이다.

저자가 후반부에 이야기를 하듯이, 권력의 심장은 건드리지 못하고 그 주변 사람들만 비난하는 언론과 주변인들의 행태가 문제이다. 사실 그런 작태가 지금도 벌어지고 있으니, 차기 대권을 노리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경우 그 후환이 두려워서인가? 그런 기회주의자들은 권력 이동의 향배에 대한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 특히나 정보를 다루는 기관 사람들, 그리고 언론계 인물들 말이다.

이 책을 읽으니, 그래도 3선 개헌 이전에는 박정희에게는 어느 정도 이성과 냉철함이 있었다고 본다. 그의 잘못된 권력욕은 이후 서서히 커져갔다는 느낌이다.

한 나라를 군림하는 절대권력의, 조선시대에도 일찌기 없었던 그런 왕이 되고자 했던  박정희 말년의 망령이 현재 정치판에 아직도 남아있지 않나하다. 단순히 상징적인 망령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그의 망령'이.

김형욱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몇 년간은 독서에 몰입하였다고 한다. 예전의 혁명동지로의 경험, 중정 부장 6-7년의 경험이 이론적으로 다져지는 시간이 아니었나싶다. 이러한 그의 사상의 체계는 77년 6월의 '미국회증언록', 동년 7월의 '내외국민에게 드리는 특명성명서', 79년 4월에 작성된 '민족통일에 대한 나의 견해'에 잘 드러난다. 특히나 이 책의 맨 후반부에 나오는 '박정희의 통치수법과 독재자의 말로'에서는 김형욱이 세계사를 어우르는 통찰을 보여주니, 그도 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필명 '박사월'을 쓰던 김경재씨가 84년에 권말에 남긴 글을 보면 "언젠가 김씨의 실종 후부터 박정희씨의 운명의 20일을 제4부로 꾸며 여러분께 선보이면서 보다 자세하게 인사드리려한다"라고 했는데 그 언젠가가 이제인가. 내 앞에는 인터넷 헌책방에서 구한 80년대 나온 '김형욱회고록3부작'이 있고 엊그제 신간으로 나온 '혁명과 우상 5권'이 있다. 이제 남은 건 그 5권이다.

김형욱이 회고록을 작성한 70년대 말, 난 10살이 채 되지도 않은 나이였다. 박정희대통령이 서거 했다는 얘기를 아침 뉴스를 통해 그리고 부모님을 통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럼 누가 대통령하지?'

김대중이 대통령 당선이 되었을 때, 지금은 돌아가신 내 할머니가 아침에 뉴스를 보시면서 내게 한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우리나라 큰일났다. 김대중 빨갱이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 때는 내가 대학생이었던 관계로 할머니의 말이 왜 그리 나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건 할머니의 생각이 잘 못된 것이 아니라, 할머니가 그리 생각하도록 만든 그 동안의 정권과 언론이 책임이라는 사실을.

밤이 깊었는데 마지막 권을 읽고 잘까 나중에 다시 읽을까 고민이다.

63년의 대선에서 미국의 밀가루 원조와 일본 미쯔비시사와의 내통을 통한 밀가루 수입을 대선에서 풀어 대통령이 된 박정희, 드디어 지역색이 드러나서 그는 63년의 ’밀가루 대통령’에 이어 97년엔 ’경상도 대통령’이 된다. 김형욱도 이 투표 결과에 적쟎이 놀랐고 남북으로 갈린 상황에서 그 남쪽은 다시 동서로 갈리니 삼국시대로 회귀하는구나라고 하면서 한탄했다고 한다. 그 한탄을 만든 주체세력의 중심이면서 이를 안타깝게 여긴다니 앞뒤 말이 안 맞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대국을 훑어보는 안목이 있기는 한가 보다.

김신조 청와대습격 작전, 이수근간첩사건, 서귀포 간첩선 사건 등이 숨가쁘게 진행된다. 중앙정보부 부장으로써 나름의 자부심을 가진 것이 이러한 간첩들의 활약을 막은 것이라, 이 책에서 상당히 상세히 기술되어있다. 나중에 3선 개헌을 위한 활약에서는 절대지존이신 박정희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수족으로의 활동을 한 것이라면, 이와 대비되는 이러한 간첩을 막은 활동 등은 그 노고가 분명 있다. 결국 박정희도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김형욱이고, 또한 간첩 잡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김형욱이라 그를 6년이 넘게 중앙정보부 부장을 안 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김종필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이끌어 가면서 김종필과 박정희 사이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3선개헌의 국회 통과 직후, 자리를 내어 줘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준비를 한다. 물러날 때를 아는 인물이다.

특이한 것은 김형욱 자신은 그러지 못함에도, 지조를 지키고 기회주의적이지 않으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한다는 부분인데, 당시 동아일보 주필과 기자들, 쥐락펴락하는 연설을 잘하는 김대중, 월남에 있던 이대용 육군소령 등에대한 존경심을 드러내니 아이러니하다.

김형욱이 몇 번에 걸쳐 김종필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문장에선 너무 웃겨 혼자 소리내어 웃었다.

"김종필이는 정치적 역경을 인간적 고뇌와 예술적 슬픔으로 연기(演技)해내는 흔치않은 재간을 가진 사람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