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TV에서 신성일 주연의 70년대 영화를 잠깐 본 적이 있는데, 주인공이 영어 하나 잘 한다고 어느 회사의 중역으로 나오는 설정이 되어 있는 영화다. 또한 내가 96년 도에 삼성전자 입사 했을 때, 부장님이 한 분 계셨는데, 당시 나이드신 분 치고 영어를 그렇게 잘하시는 것을 본 것이 신기 했다. 영어 하나 잘 하는 것이 한 개인의 밥벌이가 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아마도 80년대 까지도 그런 경향이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하물며 고려 말, 조선 시대에 청나라 말이나 왜어를 잘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밥줄 놓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바, 이 책의 제목 ’조선 최대 갑부 역관’ 수긍이 간다.

이 책에도 역시 저자 이덕일의 당시 기득권 층에 대한 반감이 곳곳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대부들은 돈을 직접 만진다는 이유로 상업을 천하게 여겼지만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전국 각지에 토지를 갖고 있는 전주였다. 뒤로는 전호 (소작인) 들이 바치는 쌀로 호의호식하면서 상업을 천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도 역관들이 사오는 명나라 물품의 주요 소비계층을 이루었다. 앞에서는 역관들의 국제무역을 비난하면서도 뒤로는 국제무역품을 앞 다투어 사들였던 계층이 바로 사대부였다. 사실 역관들의 국제무역이 사라질 수 없었던 이유도 그 물품들의 최종 수요처가 왕실과 양반 사대부가였기 때문이다. (p.43)

한자 전용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한자의 음은 몰라 웃음거리가 되는 사대부들 세상에서 한자는 물론 한글까지 중시했던 인물들이 역관들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절절매는 중국 사신들을 상대로 협상하며 국익을 챙겼던 이들 역시 역관들이었다. (p.7)

은화가 고갈된 근본 원인은 청일 직접 교역에 있었다. 다시 일본의 은을 유입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에게 매력적인 상품을 개발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은 경제에 너무 어두운 나라답게 역관들의 국제무역을 제한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그 결과 역관들의 국제무역도 쇠퇴했지만 국가 재정도 어려워졌다. (p.144)

흔히들 알고 있는 조공에 관한 잘못 알고 있는 사실도 잡아준다.

조선 초기 명나라는 3년1공, 즉 3년에 1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한 반면, 조선은 거꾸로 1년3공, 즉 1년에 3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했다. 조공의 원칙은 ’조공이 있으면 사여가 있다’는 것이다. 조공국에서 조공을 바치면 사대국에서는 사여를 내리는 것인다,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많은 것 또한 원칙이었다. 이는 상국으로서, 황제국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는 비용이기도 했다. (p.46-47)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오경석에 관한 글이다. 오경석은 간송 전형필의 문화재 수입을 옆에서 지켜보고 수집품에 대한 감식 및 조언을 해준 오세창의 아버지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의 약점을 중국에 있는 인맥을 이용하여 알아낸 뒤, 이를 대원군에게 보고한 인물이 오경석이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개화를 계속 주장하여 대원군에 의해서 내쳐진다. 그의 아들 위창 오세창도 독립선언 33인 중에 하나이고 문화재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애국을 한 간송 전형필의 스승이 되니 아무리 양반이 아닌 역관 집안이라고는 하지만, 아니 오히려 양반 집안이 아니기에 더욱 애국 집안이었다.

역관들은 상업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조선의 외교뿐 아니라 경제에도 지대한 역할을 한 계층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관료들이건 명나라 청나라의 관료들이건 뇌물이라는 것이 횡횡되던 시절에 집권층의 눈치도 봐야 했고 수출 수입품의 선정과 조절 등, 골치아픈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을게다. 하지만 돈이 되면 거기에 따라 목숨도 걸 수 있는 법. 이에따라 그들은 집권층 깊숙히 들어오기도 했고 (장희빈은 역관 집안의 서녀이다) 그들에 의해 참수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조선 말, 집권층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우는 범하지 않았을 듯 싶다.

지금은 구하기 힘들다. 나도 offline, online 헌책방을 뒤져가며 1, 2, 3권을 다 구했다. 1권은  집에, 2권은 회사에, 3권은 내 차 조수석 옆에 꽂혀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는 것은 무리이고 시간 날 때 마다 하나 하나 가람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면 된다.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가 뭍힌 원찰인 보광사에 관한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하문 근처에서 세검정길로 내려서서 세검정 곁을 지나 구기터널을 넘어서니 바로 녹번동이 나온다. 광화문으로 서대문거쳐 영천 무악재 지나 홍제동으로 해서야 올 수 있었던 녹번동을 이렇게 바로 오게 되다니. 그간 20여 년 동안의 격변에 순응하지 못하고 살아왔었구나 하는 자조의 웃음이 절로 비어져 나온다. 한 선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 이번 길도 고작 삼청터널, 사직터널을 지나 무악재 고개를 넘는 구태의연한 행로를 잡아 많은 시간을 노상에서 허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p. 184-185)’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씌어진 시기다. 당시에 비해 지금은 또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세월이 지나면서 과거의 번거로움이 잊혀지고 신기술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면서, 동시에 과거의 아름다움 또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런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의 혜곡 최순우 선생은 우리 글의 가장 아름다운 단어와 표현을 빌어와 한국의 미를 풀어낸다. ’한국의 미 특강’에서의 오주석 선생의 글은 우리나라 고서화 한점 한점을 몇 주, 몇 달, 혹은 몇 년 간에 걸쳐 관찰하고 연구한 흔적이 뭍어나고, 이 책의 저자인 최완수 선생의 글은 역사, 불교사, 성리학 등을 꿰뚫는 박학다식한 필치로 우리 것을 조명한다. 그 동안 여러 책들을 섭렵한 보람이 있는지, 이제 이 세 분 글의 차이점을 명확히 구분 할 수 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세 분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우리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다. 애정을 가지고 있는 대상을 표현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오감, 지식을 동원해내는 분들이다. 그 중 최순우 선생과 오주석 선생은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최완수 선생님이 있다.

조선시대의 억불숭유라는 것이 통치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일반 선비 집안 여인네들은 전부 당시 열심히 불교를 믿는 상황이었고, 심지어는 왕실의 여인들도 각기 자신이 지원하는 사찰이 하나씩 있었으니 어찌보면 노골적이지는 않았어도 불교가 많이 번창했던 것은 아닌가하다. 특히나 어느 한 사찰이 왕실의 ’원찰’로 지정이 되면 많은 지원은 따논 당상이었다. 서양의 종교이건 동양의 종교이건 사후세계의 불안감에 대한 해소차원에서 나름의 역할을 한다.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당시 성리학만으로는 해결 못해주는 바를 불교가 해결해 주었다.

’부석사’에 내려져 오는 돌맹이가 공중부양 했다는 전설, 각 사찰의 대웅전, 대웅보전 등의 현판 글씨를 누가 썼는지에 대한 지식, 각 건물들이 주변 산세와의 어떤 조화를 추구하면서 지어졌는지에 대한 고찰, 이러한 것들이 저자가 거주하는 간송미술관에서 일행이 같이 모여 어떤 경로로 각 사찰로의 기행을 했는지에 대한 구수한 이야기와 함께 진행된다. 맑은날 오후 나른해진 몸을 일으켜 이 책을 집어 간접기행 한번 해보시길 권한다. 그리고 나중에 그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책의 내용에 비해 현재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도 확인해 보시라.

다양한 사찰에 대한 글을 읽으니 그 절이 그 절 같아 보인다. 틈틈히 그리고 꾸준히 읽어보면 구분이 되겠지.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유는 모르겠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2009년 9월 29일 오늘 한국박물관 100주년 특별전시 개관을 했다. 간송미술관에서 보관중인 ’훈민정음 해례본’, ’진품 천마도’, ’각종 백자, 청자’, 김명관의 ’달마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고 왔다.

말로만 듣던 몽뮤도원도. 평일이지만 그 앞에선 그래도 줄을 서야 관람할 수 있었다. 영화 ’인사동스캔들’에서도 언급이 된 작품인데 세종의 세째 아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경을 당시의 도화서 최고의 화가인 안견이 삼일에 걸쳐 만든 작품이다. 이 그림에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이 제문을 붙히고 시를 읊으니, 시/서/화 (詩/書/畵) 삼위 일체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소중한 고서화가 탄생되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일본 천리대학 소장]

일본의 천리대학이 현재 소장중이고, 그 대학 박물관 직원들 조차 이를 본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힘들게 고이고이 모셔 놓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 한국 전시를 위한 대여에 외교부까지 나설 정도였고, 단 9일간만 전시하면서 그 그림 옆에서 천리대학 관계자가 지켜보고 있다가 9일 뒤 다시 일본으로 가지고 간다고 한다. 그 그림 주변을 둘러 봤는데, 가까이에는 일본인 관계자로 보이는 듯한 사람은 없었다. 분명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게다. ^^

우리나라 고서화는 그림 오른쪽 위에서부터 보는 것이 정석이다. 아래 이인문의 ’송계한담도’를 보자.


[이인문 송계한담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박물관 100주년전은 ’특별전시관’에서 열리고 있고, 이 그림은 상설전시관 2층 ’겸재서거250주년전’ 바로 옆 방에 다량의 이인문 그림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이다.

전반적인 구도를 보면 오른쪽 위에서 시작한 사선이 왼쪽 아래로 뻗어나간다. 바위의 깎아지는 듯한 벽을 표현하기 위한 부벽준도 그 방향이고, 소나무 다섯 그루의 가지 방향도 그리로 나있다. 또한 물줄기도 우상->좌하의 방향을 취하니 전형적인 우리 옛 그림의 구도이다.

허나 몽유도원도는 난해하다. 원칙대로 그림 오른쪽부터 보게되면 파격적으로 안평대군의 꿈 속 장면부터 봐야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왼쪽 부터 봐야 할 것이다. 왼편에는 일단 현실경이 먼저나오고 산을 굽이돌아 굴을 지나 (세부도1) 폭포를 거치면 무릉도원에서 보는 분홍색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달린 몇 그루의 나무가 보이니 (세부도2) 드디어 꿈 속 도원의 입구인 것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 무릉도원의 온전한 모습이 보인다 (세부도3). 그것 참 기이하다.





[세부도1]


[세부도2]


[세부도3]

하지만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보면 아무리 그래도 오른쪽 위부터 감상하는 원칙을 지킨다. 어쨌거나 이것이 안견의 의도였으니깐 말이다. 안평대군이 꿈 속 세계로 들어가는 장면이 아니라, 파격적으로 꿈의 절정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깨어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왼쪽 위 기이한 봉우리는 무엇인가? 현실경은 아닐진데 말이다. 그건 안평대군이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의 잔상이다. 오오, 그럼 말이 된다. 이 그림, 왼쪽부터 보면 그 잔상으로 남은 봉우리가 말이  안되니 말이다. (오주석, 솔출판사,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참고)

이 전시회를 보고나서 바로 상설전시장 2층 고서화 코너를 가서 이번에는 예전부터 봐오던 복사본 몽유도원도를 봤다. 차이를 모르겠다. 오히려 복사본에 켜진 조명이 더 밝아서 그런지 그림이 더 선명히 보인다. 아, 아직 나의 눈은 그 정도의 감식능력은 없는가보다.

이번에는 김명국의 ’달마도’이다.


[김명국의 달마도,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을 본 첫 느낌은 돌돌 말은 부분때문에 좀 손상이 갔다는 것 그리고 몇번의 붓터치 만으로 이 정도의 균형적이면서 힘이 있는 그림의 그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통달이 필요한가에 대한 생각이다. 달마도를 집안에 걸어 놓으면 행운이 온다는 믿음이 생길만도하다. 이 그림은 사람을 끈다.

그 밖의 여러 전시물들을 살펴보면,

-. 미국에서 대여해 온 ’수월관음도’: 섬세하다. 불교미술에 대한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다.
-. ’천마도’: 부서질까 아슬하슬하다. 신라시대 쪽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다.
-. ’리움미술관에서 대여한 이암의 ’화조구자도’: 강아지가 귀엽다. 이암에 관한 공부의 필요성.
-.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대여한 ’백자철화포도문호’: 진품명품 좀 봐야겠다.

최근에야 고서화에 대한 관심이 생긴 입장에서 이 전시회를 안 갈수 없었는데, 사실 이를 통해 고서화 뿐 아니라 다른 우리나라의 훌륭한 보물들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 성과라면 성과이다.

10월 말 같은 장소에서 이인문의 ’강산무진도’가 전시된다. ’몽유도원도’ 전시를 위해 마련한 기다란 선반을 누군가 보고 이 그림이 9일 밖에 전시 안 되니 이참에 이 싸이즈에 맞는 ’강산무진도’도 전시하기로 한 듯 한데, 어쨌거나 내 평생 이인문의 그 그림을 볼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을 가졌던 사람으로써 당연히 환영이다.

공부해야지. 생각해 보니, 고3때도 이리 공부 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