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7일, 몽유도원도 전시 마지막 날이다. 지하에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로 매표소로 올라가던 중, 70은 훨씬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대화가 들려왔다. 들을 의도는 없었지만, 엘리베이터 안에 우리들뿐 이라서 안 들을 수가 없었다.
“3시간은 기다려야 된다고 하는데 우리 체력에 보기는 힘들겠죠?”
“오늘이 마지막 전시라는데, 그래도 보고 가야 하는데.”
“아휴, 그래도 어떻게 봐요. 3시간이면…아휴.”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깜짝 놀랐다. 줄이 겹겹이 되어 있는데 4-5시간 걸린단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놀이동산에서의 그 어떤 놀이기구 줄보다도 길다. 장관이다. 우리 것을 일본 대학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정 때문인지 오늘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행렬에 감동적이기까지하다.
그 할머니 할아버지는 보고 가셨을까? 모르겠다. 줄의 길이에 질려버려 ‘한국박물관100주년전’의 두 번째 방문은 포기하고 바로 상설전시관의 겸재전시회로 향했다. 그나마 전시회 첫날 10분만 줄 서 기다리고 몽유도원도 한 번 봤었으니 다행이다. 아쉽기는 하다. 이번에는 책의 사진으로는 잘 안 보이는 도원경 복사꽃들 주변에 있는 둥실 떠 있는 배를 확인하고 박팽년의 글씨와 안평대군의 글씨가 얼마나 유사한지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건만.
겸재전은 네 번째 방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엄청 많다. 몽유도원도를 보고 왔거나 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다 이리로 또 몰려 온 느낌이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일년에 딱 두 번 짧게 전시하는 간송미술관에서의 인파와 같다.
그나마 사람이 바글거리지 않은 옆 방의 이인문 그림 ‘십우도’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열명의 벗에 관한 그림이다. 사람이 아니라 사물 벗도 있다. 이인문의 그림이라고 확인되는 이유는 왼편 상단에 적혀있는 ‘이문욱화(李文郁畵)’라는 글씨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그의 도사(도장)가 없다. 나중에 집에 와서 조사해 보니 서직수가 부탁하여 이인문이 그린 작품이고 이에 그림을 주문 받아 그린이의 신분에 따라 자(字)만을 명기한 것이라 한다.
[이인문, 십우도,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마름모꼴 혹은 평행사변형 구도이다. 앞에 앉아 있는 인물 중 두 명이 다리를 쭉 뻗어, 이러한 마름모 구도에 일조한다. 역시 이인문은 심하게 얘기하면 구도에 편집증 증상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구도광’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니, 어라 이 마름모꼴 구도는 옆에 있는 그림인 ‘설중방우’와 유사하지 않은가.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역시 배운 만큼 보인다. ‘설중방우’는 오주석 선생의 책을 보면 너무 마름모 구도에 집착하여 소나무 가지의 방향마저 지나치게 왜곡된 그의 초기 작품이라고 한다. 배운 만큼 보인다. 문제는 딱 배운 만큼만 보인다는 거다. 하지만 어느 수준이 되면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있겠지 하는 희망도 가져본다.
돌아오는 길에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떤 아주머니들의 대화가 들려 왔다. 어제는 국회의장님이 왔다 가셨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보지도 못하고 가셨다는 이야기이다. ‘지위고하가 소용이 없는가 봐’.
위대한 작품 앞에서는 나이와 지위고하가 소용없단 말인가, 아님 애국심 앞에서는 나이와 지위고하가 소용 없다는 의미인가? 안평대군이 이 그림은 천 년을 갈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하는데, 작품 완성 정확히 천 년 뒤인 2447년, 이 그림, 누구의 손에 있게 될 것인가? 누구의 손에 있게 될지는 예측 할 수 없지만, 누구의 손에 있게 될 지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바로 다음 날, ‘몽유도원도’는 일본으로 다시 건너 갔지만, 다음 전시물로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온다고 하여 또 갔다. 전날과는 다르게 그제서야 평일 오후 한가한 박물관 분위기가 났다. 그래 이래야 제대로 감상하지.
헐레벌떡 ‘몽유도원도’가 있던 자리로 갔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도 워낙 길어서 같은 선반에 전시되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바로 거기로 향한 것이다. 그런데, 어라 왜 아무것도 없지? 워낙에 길기는 한데, 위아래의 폭이 10센티도 안 되는 8센티라서 멀리서 보면 거기 뭐 있는 줄도 모를 만한, 길기는 하지만 작게 둘둘 말아 석가탑에 집어 넣을 수 있는 크기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좌측 극히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난 우리 옛그림 감상하던 대로 오른쪽 끝으로 가서 보기 시작했다. 모르는 한자 투성이다. 서서히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왼쪽으로 끝으로 7-8걸음 가서 보니 거기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라고 써 있다. 그럼 이건 왼쪽부터 봐야 하는 건가? 그렇다. 와우 헷갈린다. 이건 왜 왼쪽부터인가?
왼쪽은 상태가 아주 좋은데 오른쪽으로 갈수록 심하게 훼손이 되어있다. 훼손된 부분의 무늬가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오른쪽으로 진행되고,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점 심하다. 마치 두루마리 휴지에 잘못하여 물을 쏟았는데 그 휴지를 오른쪽에서부터 펼쳐서 왼쪽으로 가져가면 물 묻은 모양이 일정하게 반복되면서 맨 왼쪽은 거의 물 묻은 부분이 안 보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건 글의 시작부분인 맨 왼쪽이 둘둘 말린 내부의 가장 속에 있었던게다.
상당히 선명하다. 천 몇 백년 된 것 같지가 않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 당시 통일신라의 인쇄술의 수준이 정말 놀랍다. 오히려 1960-70년대 나온 책이 더 조잡하게 색이 바래고 교열이 삐뚤빼뚤로 보일 정도이다. 삼국이 통일되면서 말 그대로 문화가 얼마나 찬란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현재의 우리나라도 조만간 남북이 통일이 된다면 초창기의 혼란이 지나고 난 뒤 분명히 찬란한 문화가 다시 일어설 것이다. 천 년 뒤에 후손이 역사공부 하다가 놀랄 문화적 성장이 이룩될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당장은 통일 직후의 혼란기가 많이 우려되기는 하다. 그렇다고 이를 일부러 늦출 수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거쳐야 할 과도기라면.
여러 유물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국보’라는 타이틀이 주어진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몽유도원도’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어느 것이 더 소중할까? 스스로 우문을 던져보고 현답을 생각해 봤다.
모르겠다.
자리를 옮겨 겸재전으로 갔다. 이 전시는 총 다섯 번째 방문이다. 네 번째는 거의 감상하질 못했다. 이번에는 어느 작품에 필이 꽂힐까 내 스스로 궁금해하며 둘러 보았는데, ‘산수도’ 일명 ‘하경산수도’라는 커다란 작품 앞에서 걸음이 안 옮겨졌다.
[정선, 산수도, 국립중앙박물관]
요즘 이인문의 구도에 대한 공부를 했더니, 이 그림, 구도가 눈 앞에 확 들어온다. 보이는가, 위부터 여러 개의 사선이 그어지는데 밑으로 갈수록 그 사선들이 완만해지는 것을. 허허 이번이 다섯 번째 방문인데 신기하게도 이 그림은 이제서야 내 눈에 들어오다니.
그림 밑의 해설을 보지 않고 몇 분이고 감상했다. 초기작품일까 후기작품일까? ‘비로봉도’ 나 ‘선인도해’와 같은 70대의 그림은 절대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화면이 꽉 차 보이고 주역이나 음양의 원리도 보이지 않고 절벽을 표현하는 부벽준에도 ’청풍계’에서 보여주던 대담함과 호방함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신묘년풍악도첩’의 그림처럼 30대의 작품 또한 아니다. 그러기에는 구도에 빈틈이 없고 안개 쌓인 표현에도 완숙함이 보이며 중간에 있는 나무 하나하나 봉우리 하나하나가 조화가 잘 되어있다. 도저히 애매해서 설명을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중간인 40대의 작품이다. 그림 왼편 위에 강세황이 극찬을 한 제문이 있다. 하지만 겸재가 70대에 그린 작품들을 본다면 40대의 이 그림에 대한 극찬은 취소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 작품을 절대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노년 작품이 문자 그대로 ‘경지’에 도달한 것들이라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