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2일 가을전시 2차방문을 끝내고 한방]

간송미술관, 봄에 세 번, 이번 가을에 두 번째 방문하였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등의 그림을 수천점 소장하고 있는 아마도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많은 고서화를 보유한 미술관일게다. 사실 더 많은 작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가다가 많이 소실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간송전형필 선생께선 훈민정흠 해례본을 베개 삼에 비고 자며 고이 간직했다고 한다. 그 해례본은 몇 주전 국립중앙박물관에 대여 전시되어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이번 도석화전은 당췌 다양한 화인들이 등장하여 정신이 없다. 인물 하나에 푹 빠져가면서 그의 하나 하나의 작품을 감상해야 하는데 말이다. 초보가 접근하기에는 좀 어려운 전시회가 아닌가 하다. 오히려 이럴 때는 작품 하나나 둘만 파고 드는 것도 방법일터, 대놓고 첫 방문 때 필갔던 연담 김명국의 ’수노인’만 몇 십분 보고 왔다. (그림1)


(그림1) [김명국, 수로예구, 간송미술관]

첫 방문에서는 몇 주전 용산에서 보았던, 그가 그린 또 다른 작품인 ’달마도’와 머릿 속으로 비교해가며 감상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그림 자체에 푹 빠져보았다.

옷깃을 잘 보자. 한큐다. 한큐에 목 부분에서 가운데로 시원하게 꺾여져 내려져온다. 꺾여지면서 안쪽은 바깥쪽이되고 바깥은 안이 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 처럼. (그림2 / 1번 선) 사실 직접 봐야한다. 상당히 큰 작품이다. 조그만 만화나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릴 적에는 문제가 안되지만 이리 큰 그림에서 일필휘지로 저런 곡선이 나온다는 것은 단순히 연습을 많이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타고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듯 하다.

등 쪽 옷 경계의 곡선을 보자. 이런 선 역시 함부로 못 그어 내려간다, 나와 붓이 한 몸이 되지 않는한. (그림2 / 2번 선) 이러한 필치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고, 이것이 누구도 모방 할 수 없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다. (그림3)


(그림2)


(그림3) [김명국, 비급전관, 간송미술관]
(이것도 상당히 큰 그림이다.)

다시 수노인 그림을 보자. 옷의 왼편은 전반적으로 둥글게 구도가 잡혀있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획선이 극적으로 자주 꺽인다. (그림4) 정중동이라고나 할까. 부드러움 속의 강렬함. 그런식으로라면 옷 속에 감추어진 주인공의 발은, 호수 표면 밑에서 빨빨거리는 오리의 발길질처럼 촐랑 맞게 움직이고 있는 중일까? 그렇진 않을지도 모르겠다. 워낙에 신선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귀신이 쓱 지나가듯 한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바다를 건너는 작품이 많기 때문인데--심지어는 졸면서 바다를 건너는 신선 작품도 있다 (그림5 & 그림6)--글쎄, 이 유머러스한 수노인은 전자의 추측이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지금 그의 표정과 어울린다. 만약 그렇다면 이 수노인은 바다 건너기는 글렀다.


(그림4)


(그림5) [정선, 선인도해, 국립중앙박물관]


(그림6) [김홍도, 좌수도해, 간송미술관]

몇 일전 유흥준씨의 ’화인열전’이란 책에서 김명국에 대한 부분을 읽으니, 그의 작품은 적당히 취기가 올라오는 시점에서 최고의 선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취하지 않은 상태와 너무 취한 상태에서 그린 졸작도 많다고 한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왔을 때 그린 그림. 그것이 그의 명작이다. 그의 이야기는 나중에 '화인열전' 리뷰를 쓰면서 또 한번 정리해 보겠다.

그나저나 오늘 간송미술관 한 번 더 가볼까 하는데.....신종플루라서 사람들이 많이 안 오리라 기대해 볼 수 있을까?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태백산맥-한강"에 이르는  우리 근현대사의 대 서사시를 이제 시작하려한다. 이런 책은 대학생 때 읽었어야 했거늘, 늦게 철이 드는 바람에 이제야 시작한다. 단순히 근현대사에 관한 책을 읽는 것보다,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그 시대를 살아 본 듯한 착각을 해보는 것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법.

굵직한 전라도 사투리가 섞여 있는데, 생각보단 읽기에 힘들지는 않다, 개정판이라서 그런가. 전라도 군산이 주 무대인듯하다. 조선시대 보수세력인 노론벽파는 호남을 그 근거지로 두었다. 비옥한 평야지대가 많은 지역이 당시에는 발전된 지방이리라, 일본의 한국 침략 초기에 이 곳에 눈독 들이는 것이 당연하다. 이 곳의 땅을 비싼 값을 치루며 하나하나 사 들이고 있다. 동학형명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시대상황에서 일본 주재소를 중심으로 갖가지 일이 벌어지려나보다.

서문을 보니 중국, 러시아, 하와이 등을 답사하여 자료를 모으고 이 책을 집필하였다. 그러한 답사의 결과물을 엮어 하나의 대하소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재주이며 인세를 받을 자격이 있다. 기꺼이 그 값을 지불하고 이제야 읽기 시작한다.

진보 세력의 리더격인 조정래 작가. 왜 보수 쪽에서는 이러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관한 굵직한 책이 나오질 않는가? 기꺼이 읽어줄 생각이 있건만.

아리랑을 읽고 태백산맥을 읽은 뒤, 한강을 읽을 예정이다. 이미 한강은 사 두었다. 그리고나서 강준만 교수의 ’한국 근대사 산책’을 읽고, 이미 읽었던 ’한국 현대사 산책’을 다시 읽는 것으로 몇 달이 걸릴지 모를, 아니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장정을 시작하련다.

화가 이인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림의 제목처럼 팔미터가 넘는 긴 가로 화폭를 따라서 강산은 끝이 없이 펼쳐져 있었다. 눈으로 본 강산과 꿈에 본 강산, 꿈에서도 보지 못한 강산들이 포개지고 잇닿으면서 출렁거렸다. 산들이 잦아지는 골짜기마다 마을이 들어섰고,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들이 펼쳐졌고, 들판 가장자리에서 다시 산맥이 일어섰다. 윤곽선을 풀어헤친 산맥은 연기처럼 엉키고 또 흩어지면서 허공 속을 흘러갔고, 기진해서 소멸해가는 산맥들이 하늘 속으로 빨려드는 잔영 너머에서 바다는 시작되고 있었다. 바다가 뿜어내는 안개가 잔산들의 밑동을 휘감았고, 그 안개 속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의 입자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번창했다.
--- (김훈 강산무진 p. 338)

김훈이 그의 소설 ’강산무진’에서 암에 걸려 이승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주인공의 눈을 통해 본 강산무진도를 이와같이 표현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 책은 고 오주석 선생이 백혈병으로 타계한지 1주기 되는 시점에 나온 첫 유고집이다. 원래 석사학위논문에서 시작한 이 글은 그 뒤 여러번의 수정 보완을 거쳐 완성되었는데, 사실 이 책은 작가가 생각한 완성본은 아니나 그가 쓴 원글에 오주석유고간행위원회에서 필요한 사진 등을 추가하여 만든 책이다.

이인문은 당시의 유행인 진경산수 등에 영향을 받지 않고, 보수적으로 굳굳하게 자신만의 특징을 살려 그림들을 만들어낸다. 그의 기이하게 긴 호인 ’고송유수관도인’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래된 소나무와 흐르는 물’이 그의 단골 소재이다. 단원 김홍도와 동갑내기 친구이면서, 경쟁자이기도 한 그는 단원과의 ’맞수’ 관계였다는 말이 맞을 듯 하다. 하지만 경쟁만 하는 맞수가 아니라  같이 즐기고 일하고 한 맞수.

초반에 이인문의 가계도와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서술되고 중반에는 ’강산무진도’의 이해를 돕기 위한 그의 기년작과 무기년작 다수를 분석한다. 이 부분을 통해 그의 ’구도’에의 집착, 그만의 원근법, 그만의 준법에 있어서의 특징들이 잘 나타난다. 본격적으로 ’강산무진도’를 분석한 후반부에서는 일단 ’강산무진도’의 구도, 준법, 내용, 등에 걸쳐 조목조목 분석에 들어간다. 내용이 세밀하여 이인문 스스로가 무의식 중에서만 인식하고 의식적으로는 생각치 못했던 내용도 고 오주석 선생의 분석에 의하여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이다.

기존에 내가 알고있는 준법의 종류가 ’부벽준’, ’피마준’, ’수직준’ 정도인데 이 그림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준법이 소개되고 설명된다. 강산무진도에 쓰인 것 자체가 이리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중국풍의 복장을 한 사람들과 건물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러한 것에 그만의 색깔을 더해 그만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

2009년 10월 20일. 드디어 벼르고 벼르던 이 작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했다. 김훈 작가의 흉내를 내어, 작품 감상기를 작성해 보았다.

시작에서는 소풍가는 기분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소나무들을 구경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였는데, 이내 산과 들의 주변 환경을 이용한 민초들의 다양한 삶의 행태가 드러나고 어느새 깊은 골짜기, 위험한 산비탈길, 끝없는 폭포, 화폭에 다 넣지 못할 거대한 기암괴석과 산에 다다르니, 그 웅장함에 압도 당한다. 특히나 기암괴석 중에는 중간에 구멍이 난 곳들이 있어, 이를 통해 먼 벌판의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아찔하게 보이기까지하다. 이윽고 화면을 중간 사선으로 과감하게 절단내는 구도에 다다르면 소풍 온 느낌은 잊게되고 나의 마음은 가장 강하게 요동친다. 계속 다시 한참을 진행하다보니 산세가 점점 수그러들면서 일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니 이제서야 숨을 돌리겠다. 마침내 고요한 바다인지 강인지에 다다를 때에 풍광은 가장 아득해지면서 작품은 끝이난다.

이 책 덕분에 중간중간 그의 다른 작품에서 이미 보여준 그의 기법들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즉 산 두 봉우리 중간에 먼산을 그 형체만 그려 넣어 자연스럽게 구도가 이루어지게 하는 기법. 봉우리와 괴석, 소나무 가지의 방향을 일치시켜 구도의 극대화를 꾀하는 기법, 부벽준을 칠적에 위에서 아래로도 치고 아래에서 위로도 치는 기법 등을 발견할 때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8미터가 넘는 작품을 아주 가까이서, 조금 떨어져서, 마지막으로 조금 더 떨어져서, 이렇게 3번을 반복하여 보니 운동이 될 지경이다. 관람객들 중에는 ’이게 김훈 소설 강산무진에서 얘기한 그림 그건가?’ 하는 분도 있고 ’어, 여기도 그림이 있었네? 근데 왜 이렇게 길어?’하면서 왼쪽부터 작품을 감상하는 이도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 왠만하면 그림을 올려 보려고 했으나 전체 작품을 한 번에 보여 주는 제대로 된 사진이 없다. 이 책의 맨 마지막에 부록으로 딸려 있는 웅장한 그림을 참고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