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서야 많은 책을 보았는데, 이상하게 소설은 잘 읽히지가 않았다. 이 책은 1년 반 전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 사 놓기만 하고 읽지는 않고 있다가 출근하면서 눈에 보이는 안 본 책 아무거나 집어들고 온 것인데, 나에게 잔잔한 생각할 꺼리들을 주는 책이 되었다. ’책이 책장에 꽂혀 있는것 만으로도 그 책은 충분한 값어치를 한다’는 진리 체험이다. 그 책이 내가 사 놓기만 하고 안 읽게 된 책이 되어도 10년 뒤에 읽을 수도 있고, 내 자식이 우연찮게 읽게 될 수도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때 그 책이 거기 없으면 못 읽게 된다는거다.

큰 불이 날뻔한 이야기.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때의 상황이 잘 기억이 안 난다는 것. 서울수복 후 빨갱이년으로 몰려 갖은 수모를 당한 이야기. 역시나 이상한 것은 그때의 벌레취급 받던 기억이 자세히 나질 않고 뭉뚱그려져 가물가물 난다는 것. 어머니의 돈을 매일 조금씩 훔쳐서 맛있는 것을 사먹었는데, 어느날 그 가게 유리를 깨트리게 되었다. 가게 주인이 가족을 다 이끌고 어머니에게 달려와 변상해 놓으라고 윽박질렀는데, 어머니는 그 가게주인에게 맞서 싸우는데 신경을 쓰느라 그랬는지, 그 돈이 어디서 났길래 그 곳에 그걸 사 먹으로 간거냐고 묻지도 않은 얘기. 이 모든 얘기가 전부 심리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 어제 완독한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의 내용이 여기서 적용되다니.

주인공은 좌익단체에도 속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서울 수복 후에 피난을 안 간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어 수모를 당한 적도 있었다. 1.4후퇴 때 그런 수모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 피난가는 시늉만 하기도 했다. 그녀는 빨갱이일까? 아님 우익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여기저기 빌붙는 박쥐와 같은 존재였나? 아니다. 그녀는 1950년대를 살았던 대한민국의 가장 평범한 시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훈 작가의 수필집 제목이기도 한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풍토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신기하다. 좌익과 우익. 빨갱이와 수구꼴통. 그 중간에 있으면 양쪽으로부터 비난받는다.

저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이토록 선명할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는 이나 글을 쓰는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바로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호기심.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잘 기억이 나는 법이다. 야구를 좋아한다면 각 구단의 주요선수들의 작년 타율이나 방어율은 굳이 기억 안 하려해도 다 기억해낸다. 그렇다. 저자는 기억력이 비상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관심이 있는게다.

어느 한 인간의 솔직한 자기 회고는 감동을 주는 법이다. 위인전의 인물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도 더 생각할 꺼리를 많이 주는 이런 책을 나는 좋아한다.

먼저, 저자의 문체에 놀랐다. 풍부한 유머감각. 이런건 원서로 읽어야 하는데 아...

시골의사라는 필명을 가진 박경철씨는 원서보다는 번역서를 보는데, 그 이유가 나와는 다르다. 그 사람은 원서로 읽었을 때 걸리는 시간이 아무래도 기니깐 시간 절약을 위해 번역서를 선호하고, 나는 번역서가 원서에 비해 싸기 때문에 번역서를 읽는다. 돈이 많으면 시간이 없어 인생을 즐기질 못하고,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어 인생을 즐기질 못하니, 이런 것을 일컬어 ’사면초가’라고 하던가 ’딜레마’라고 하던가. 행복은 돈에서 오는지 즐기는 것에서 오는지 나도 모르겠다.

살아가면서 도움이 되는 행복에 관한 잠언집 정도로 생각하고 이 책을 접하였으나, 읽어 내려가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뇌과학, 심리학 분야의 책이다. 이를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는 격’이라고 하던가. 그러다보니 나의 기쁨은 배가 되었다. 만약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대강이라도 알고 접하였다면 나의 기쁨은 지금과 같을까?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심리적 면역체계’에 관한 얘기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하기보다는 행동하지 않기를, 큰 고통보다는 약간의 짜증을 그리고 빠져나올 수 없는 구속보다는 자유를 선택한다. (p.274)

허허, 이것이 잘못된 선택일 확률이 높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런 선택을 하기 전에 신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얘기한다. 한편으로는 공감이 안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사소한 실수를 하는 이를 보고 마구 구박을 하면서도 그 사람의 큰 실수는 눈감아 주는 경우도 꽤 목격한 것 같으니 말이다. 이 책에 의하면 그런 현상은 사람의 ’심리적 면역체계’라는 컨셉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책을 다 읽은 뒤, 앞서 읽었던 저자의 머릿말 마지막 부분을 다시 보게 된다.

어쩌면 이 책을 다 읽을 무렵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당신’은 별다른 만족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사한 사실 하나는 터득할 것이다. 최소한 미래의 당신이 이 책에 대해 큰 만족을 느낄 거라고 현재의 당신이 왜 오판했는지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19)

사실 이 부분은 저자의 유머감각 있는 문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부분이고, 이 책의 내용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부분이면서, 왜 이 책이 누가 읽어도 만족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지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이 책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경험이 우리의 미래의 감정을 예측하는 데 손쉬우면서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우리가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믿을 만한 방법을 거부하고 대신, 흠도 많고 오류도 많은 우리의 상상에 의존하게 된다고 한다. (p.332)

그러니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판단하는 데에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의 리뷰가 가장 훌륭한 잣대가 된다. 오류를 범하지 마시기 바란다.

"삥땅" 과 사회상황

저자는 과거 시내버스 운전자로 일했을 때 겪었던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풀어낸다. 자신의 모든 치부와 투쟁, 가족, 주변 동료들 이야기도 술술 써내려간다. 특히나 버스기사가 과거 승객들의 요금을 어떻게 "삥땅"쳤는지에 대한 글을 접할 때는 그 솔직함에 적잖이 놀랐다. 마치 예전에 50원 넣고 한 판씩 하던 오락실에서 동전에 줄을 묶어서 집어 넣고 다시 줄을 당기고 또 넣고 하면서 무한정 오락을 한다는 무용담을 다시 듣는 느낌이었다.

기가막힌 것은 삥땅을 치던 기사들이 다른 비슷한 노선을 가진 버스들과 경쟁하면서 승객을 태웠는데, 회사에서 운전석 바로 뒤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한 이후로 기사들이 다른 노선 버스들과 경쟁을 안 하니 오히려 삥땅으로 줄어든 실적보다 더 저조한 요금이 걷혀 카메라를 다시 드러냈다는 이야기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 이럴 때 쓰라고 하는 표현이다. 왜 운전기사들이 그러는지, 그리고 그런줄 알면서도 회사에서는 왜 묵인 하는지. 무언가 잘못 되었던 과도기적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과거에 운전기사를 폭행하는 승객들이 CCTV에 잡혀 9시 뉴스에 자주 나왔던 적이 있는데, 사실 그 카메라가 기사들이 치는 삥땅을 막기 위함이었다니.

더욱 놀라운 것은  운수회사 측에서 정부가 주는 지원금에 대한 "삥땅" 이야기이다. 회사는 법적인 맹점을 이용하여 합법이건 불법이건 합법인지 불법인지 모호한 방식이건 지능적으로 "삥땅"을 친다는 것이고, 버스기사와 같은 노동자들은 그리 지능적이지 못하게 "삥땅"을 친다는 것이다.

운전기사의 부정 행위를 회사에서 적발을 하면 경찰서에 고소를 안 하겠다는 조건으로 각종 급여상의 혜택을 포기하게 만든다. 고소해봤자 20만원의 과태료를 내면 되지만 고소를 안 하는 조건으로 급여, 퇴직금 상의 교묘한 불이익을 주게되면 수백에서 수천만원까지 그 권리를 포기하게 만든다. 무식이 죄다. 아니다, 무식이 죄인 사회가 죄인거다.

최근 나는 드라마 ’추노’를 다시보기로 보고 있다. 노비의 때국물 묻은 얼굴과, 다 헤어진 옷차림, 얼굴과 몸에 새겨진 ’奴’자. 예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2차대전 당시의 전쟁 상황을 리얼하게 보여 줬다면, 드라마 ’추노’에서는 노비의 상황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실제"는 종종 "생각"보다 비참하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태어나서부터 정해진 신분이 과거에 존재했었다면, 요즘은 돈이 바로 신분이다. 그나마 그 과도기적인 시절에서는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면 이러한 자신의 신분을 역전시켰지만, 이제는 그러한 과도기가 지나면서 돈이 있어야 공부도 잘하게 되는 신분세습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생각을 해 봐라. 공부를 열심히 하여 변호사가 되고 의사가 되면 다들 잘 사는가? 그건 과도기 시절 얘기이다.

돈이 있어야 공부도 하고 졸업 후 자리를 잡는다. 그리되면 그는 기득권이 될 수 있다. 기득권이 된 뒤에는 비기득권 층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그 돈을 계속 벌어간다. 운수회사가 회장이 운전사들 등쳐먹는것처럼. 이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바로 직전의 조선말 사회상황이기도 하지만 이제 우리가 가고 있는 상황이기도하다. 어떠한 방식으로건 몇 년 뒤건, 몇 십년 뒤이건, 통일이 된다면 이제 이런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래서 더욱 두렵다.

책 감상문을 쓰면서, 삥땅에서 시작하여 무거운 주제로 넘어갔다. 사회 기득권이건 비기득권이건 지능적이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런 것이 횡횡하면 절대 그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