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처한 환경에 염증을 느끼며 탈출을 꿈꾸는 여자. 그런 여자를 탐하는 남자 .그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또 다른 남자.

마을 최고의 부자인 신치규와 그의 집 막살이를 하는 방원과 방원의 처. 이들이 앞으로 벌어질 참극의 세 주인공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치규는 오십이 반이 넘어 인생으로 살아올 길을 다 살고서 거의 쇠멸의 구렁텅이를 향해 가는 늙은이고 방원의 처는 나이가 스물두 살, 한창 정열에 타는 가슴으로 가장 행복스러울 나이의 젊은 여자라 한다.
작가의 이런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인물 설정이 신치규를 더욱 탐욕적인 노인으로, 매력적인 젊은 여인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든다.그리고 그의 소유욕에 독자들로 하여금 더욱 큰 경멸감을 느끼게 한다.

남편이 있는 여자이나 그의 종이니 그녀를 탐한다 해도 그에게 문제 될 건 없다. 그녀 또한 그의 제안이 싫지 않은 기색이니 둘의 거래가 성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영감과 계집은 방앗간에서 이삼십 분 후에 다시 나왔다.

그들의 거래가 성립하였음을 작가는 은근하게 표현하고 있다. 상상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상전과 아내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게 된 방원은 신치규를 폭행하고 상해죄로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복역 기간이 끝나고 출옥한 그는 아내를 다시 찾아가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하지만 그녀를 이를 거부한다.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어버린 방원이다.

싫어요. 나는 죽으면 죽었지 가기는 싫어요. 이제 나는 고만 그렇게 구차하고 천한 생활을 다시 하기는 싫어요. 고만 물렸어요.

마지막으로 품었던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 부정과 심판, 원인과 결과가 공존하는 비극의 장소 물레방앗간에서 그의 칼에 그녀도 그도 죽게 된다. 정작 벌 받아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아침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음악이 계속해서 입가를 맴돌았다. 가까이에 있는 동료에게 폐가 될까 의식적으로 흥얼거리는 것을 멈췄다.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노래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일을 하려면 어느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곡명도 모르는 그 노래를 퇴근 무렵까지 흥얼거렸다.
출근길 잠시 잠깐의 경우도 이런 데 하물며 어제까지 무의식으로 해오던 행동을 다음날 바로 억제되거나 차단된다면 공황상태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언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말하고 듣고 써오던 언어를 다음날 부터 강제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면? 오늘이 나의 모국어를 배울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면?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던 아침, 프란츠는 문법 수업을 받을 생각에 벌써부터 싫증이 밀려온다. 늦은 등교 학교의 이상 기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오늘이 프랑스어로 수업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당장 내일부터 독일어를 사용해야만 한다고.
프란츠는 혼란스러웠다. 모국어이지만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았고 배워야 할 게 많은데 마지막이라니. 후회스럽고 슬펐다.

우리들은 프란츠의 심정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치하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한국어 폐지를 강제 당했던 것을 직접 겪은 이도 있을 것이고 배워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강제가 의사소통의 불편함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주체성을 파괴하고 민족의식을 약화시키는 더 큰 문제가 있을 것이다.

프랑스어를 우리들 사이에서 지켜야 하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왜냐하면 한 민족이 노예 신세로 떨어졌을 때 제 나라 말을 잘 간직하고만 있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고.

소중한 것은 왜 잃은 후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일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인데 영어에 미친 한국 사회는 너무 내일을 장담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속에서 나 또한 감각을 잃고 방심하는 별다를 것 없는 구성원 중 하나라는 것이 너무도 부끄러운 지금이다.

 

한한이 그리는 연꽃 위의 유토피아는 어떠한 모습일까?

소설을 읽기 전부터 그를 장식하는 화려한 수식어에 지금 한창 대륙에 불고 있다는 '한한 현상'에 동참한 듯한 느낌이었다.

한한을 통해 본 중국의 모습은 얼마 전 접한 중국작가의 소설 속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혼란스럽고 불안정하며 불안하다.

빠른 경제 성장과 더불어 나타나는 부작용을 무방비 상태에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일확천금의 허황된 꿈을 꾸는 젊은이의 모습과 호텔과 여관의 비유에서 느껴지는 심하게 벌어진 빈부격차,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말이 통용될 법한 사기, 바가지 씌우기 , 부정부패가 줄을 잇고, 해외 명품을 선호하는 여자들, 대형 외국 마트를 찾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난 물질만능주의와사대주의, 전통 명절보다 서양의 근원을 알 수 없는 행사에 더 열광하는 사람들이 한한에 의해 비꼬아지는 그의 블랙 코메디에 씁쓸하지만 시원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컴퓨터 수리센터를 연 나와 젠수는 더 많은 폭리를 취하기 위해 일부러 바이러스 퍼트린다. 이것이 실연당한 한 친구의 폭로에 의해 학교에 알려지고 대학을 졸업할 수 없게 되어 할 일 없이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지내게 된다. 이런 최악의 순간에도 그는 유머를 잊지 않는다. 그러던 중 머릿수만 채우기 위해 패싸움에 가담했다 살인혐의를 뒤집어 쓰고 피신하게 된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것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뿐인다.

복권으로 생활비를 마련하고 여관생활을 전전하며 근근이 생활을 하던 중 다친 젠수를 위해 건축이 되다 만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다. 공무원 집 아들과 한패가 되어 인터넷 사업을 구상하며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린다. 그러던 중 성탄절 시청이 폭발하게 되고 주위 상가를 터는 사람들로 핵폭탄이 터진 직후 같은 혼란 속 무질서와 함께 이 셋도 뿔뿔이 흩어져 명확한 목적지를 찾지 못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런 혼란 속에서 '나'는 순진한 예전 여자친구를 떠올리게 되는데 중국의 방황과 혼란의 질주를 막을 궁극적인 방법이 뿌리는 진흙에 있지만 꽃은 순결하고 깨끗하게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처럼 사람들의 순수함으로의 회기가 아닐까란 생각을 해 보았다.

20대 작가의 문체에서 느껴지는 경쾌함이나 발랄함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번역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특징인지 알 순 없지만 그의 예기치 못한 블랙코메디가 그 모든 것을 상쇄시켰다.

깔깔대며 웃기도 했다. 무미건조한 일상 속 나태한 젊은이들에게 답답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겪는 혼란에 어지럽기도 했다.

작가의 재치 넘치는 언어들의 조합 속에서 등장인물에 몰입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한현상이 그저 말뿐인 허상이 아님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