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 같은 소설을 읽은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프랑스 영화 같다’는 표현에는 아마 사람 저마다의 해석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예술적이고 아름다웠다는 의미로 누군가는 로멘틱함으로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의미로. 이 책도 주인공과 얼마나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느냐에 따라 여러 각도로 해석될 듯하다.

소설 속 주인공 타냐와 나는 같은 또래의 책을 진통제 혹은 탈출구로 생각하며 사람들과 더 많은 관계를 맺어나가는 데 회의적이며 결혼 혹은 결혼한 여성에게 느끼는 감정에서 공감할 수 있었으나 그 이외에는 많은 것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아마도 동시대를 살아가며 그 당시의 이해가 불안정한 것처럼 동년배를 이해하는 것은 의외로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학시간에 배운 동위 원소가 떠올랐다. 나와 타냐의 만남은 동위 원소간의 만남과 같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듯 아주 다른...공존하지만 섞일 수 없는

서른을 목전에 둔 일러스트일을 하는 타냐. 평범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특이한 그녀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그녀의 과거와 미래가 담긴 ’가짜 종이꽃가루’란 책을 발견하게된다. 이런 설정은 환타지적인 요소와 기막힌 대반전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지루하고 밋밋한 전개로 아쉬움만을 남겼다. 그 책으로 인해 주인공에게 그다지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지도 더 나은 선택으로 변경을 하지도 않는다. 물론 작가가 ’가짜종이가루’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칼의 말 타냐 나도 당신처럼 책 읽는 즐거움을 알아요.하지만 체험하는 만큼의 기쁨은 아니에요. 진짜 사랑,진짜 두려움,진짜 분노,진짜 기쁨이 아나란 말이에요. 책 읽는 건 구경이에요. (P444) 을 통해 책 속 내용이 아무리 자신의 것과 비슷해도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벗어나 현실로 뛰어들어야만 한다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음을. 그러나 왠지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재료로 만든 밥같은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책에 의지하는 타냐의 모습을 통해 그녀의 수동적이고 불안한 오늘을 엿볼 수 있었다

과거의 첫사랑 마틴에게 집착하고 현재의 연인 리처드의 사랑에 회의를 느끼며 다가오는 사랑 칼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다가오는 이성의 마음이 진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계속해서 맞출 수 없는 문제를 내고 상대방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들 때가 있다. 그런 후에 자신의 생각(그의 마음은 진실이 아니다)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심리가 반영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작가가 그려낸 여성의 심리란 것이 단편적이고 편협된 것이어서 읽는 내내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책의 부제는 타냐의 일상이라 지어주고 싶었다. 그녀의 일상이 지루하고 단조롭게 서술되어 있을 뿐이었다. 책의 이름을 열거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일뿐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책들과의 연관성을 통한 주인공의 심리묘사라던가 사건의 진행이 이루어 졌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 대목이었다.

인내를 참아온 독자들에게 달콤한 열매를 주기 위한 모범적인 결말이 이어진다. 순고한 칼의 사랑으로 책으로 도망쳐 갇혀 지내는 그녀를 체험의 즐거움을 느끼도록 세상 밖으로 끌고 나오려한다는 정형화된 결말은 그 달콤함마져 무뎌지게 만들었다.

나는 타냐와의 거리감을 줄이는 데 실패했다. 이곳과 그곳의 거리감을 줄이는 데도 실패했다. 그러나 나에게도 더 많은 경험이 쌓이고 시간의 경과 속에 다시 그녀와의 만남을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더 많은 공감속에서 그녀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보고 싶어요. 붉은 산이 - 그리고 흰 옷이"

"선생님, 노래를 불러주세요. 마지막 소원 - 노래를 해주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


인간말종에게조차 조국은 그리운 것이고 동포는 지키고 싶은 것이었다.

정익호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삵이라 불렀다. 이곳저곳의 사투리가 섞인 그의 말투에서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투전이며 싸움은 일상이고 심지어 칼부림까지, 동네 사람들이 그를 삵이라 별명 짓고 암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제식민지로 농토를 잃은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하고 작은 집성촌들을 구성하게 된다. 이곳을 의료조사 목적으로 방문한 의사 나에 의해 그때의 실상 그리고 삵의 모습이 서술되는데 소설의 가장 큰 갈등이 되는 사건을 통해 전반적으로 중국에 대한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감정이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의 한 노인이 그해 소출을 싣고 지주가 있는 만주국으로 향하나 돌아올 땐 송장이 되어 돌아온다. 그 이유인즉슨 소출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아 죽은 것이다.
모두가 분노했으나 쉽게 이 일에 나서거나 개입할 수는 없었다. 지주들에게 밉보이면 그나마 지금껏 입에 풀칠을 하던 일도 모두 끝이기 때문이다.
이때 용기를 낸 것은 의외의 인물 삵이었다. 그 대가로 허리가 기역자로 꺾여 죽음에 이르지만 말이다.

삵의 복수 그리고 죽음은 민족의 응어리와 한을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의 마지막은 승무의 춤사위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하얀 천의 이미지를 남기며 나라를 잃고 핍박 속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일본의 이간질 속에 서로를 적대시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안타까움이 한 인물의 반전과도 같은 모습으로 극대화된다.

 

인연(因緣)을 알아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지 않다. 300페이지 가량을 백만 스물한 번의 폭소와 감동으로 마무리 하기 한참 전에... 끝을 알리는 이야기가 아쉬워 마지막 장 의미 없는 숫자에까지 눈이 가기 전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작품을 사랑하게 될 것이란 걸, 그녀의 웃음코드가 완전히 나의 그것과 일치할 것이란 걸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수집하기에 수고를 아끼질 않을 것이란 걸

올해 들어 가장 많은 웃음을 준 책이다. 자잘한 미소에서 배를 움켜잡으며 폭소를 터트리기도 했다.감동과 주제의식도 잊고 있지 않았다. 이사카코타로의 소설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의 소설이었다.

인연의 만남이 언제나 행복한 것만은 아닌듯 하다.

지금은 6년 차 간호사가 된 친구가 학생 시절 정신병동으로 실습 나갔을 때 그리도 꿈에 그리던 왕자님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물론 환자였다. 그는 그 병동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평범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가 아침운동 시간 모두 국민체조 동작을 하고 있을 때 혼자 ’컴백홈’ 춤을 열심히 추기전까지는.. 그의 두서없는 대화 속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친구는 자신의 왕자님과의 인연의 장소가 정신병동 이란 것에 한번 안타까워 했고 그의 히스토리에 한 번 더 안타까워 했다.

그 친구를 통해 정신병동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다. S대 수의과를 나와 한 번도 강아지를 고쳐본 적 없다는 할아버지, 조증으로 병동을 붕붕 날아다니던 아저씨, 울증으로 당장에라도 땅으로 기어들어 갈 듯한 아줌마...

소설 속 병원과 인물들은 그 친구에게서 들어온 이야기와 비슷했고 낯설지 않았다. 단 한 가지 탈출을 꿈꾸는 덤앤더머만 빼고 말이다.

정신병원 폐쇄병동을 무대로 어이없게 시작된 덤앤더머의 탈출기는 프리즌브레이크의 감동과 긴박감을 넘어선 것이었고 개성 넘치는 코믹한 등장인물들의 우정과 의리에 눈시울과 가슴이 뜨거워지는 작품이었다. 세상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나를 격려했고 정신지체 여성의 집단성폭행, 일상적인 폭력의 자행은 그들의 인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자기 안으로 도망쳤던 수명, 재벌가 왕자의 난의 희생양 승민. 그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언제나 함께 하는 승민의 별책 부록 만식씨, 십운산도사, 거리의악사 우용재, 소식통 김용, 멀티플레이어 우울한 수험생이 만들어내는 폭소와 감동이 생동적이고 지루할 틈 없이 전개된다.

자폐증과 공황장애 판명을 받은 수명은 세상으로 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부터 도망쳐 자신 속에 숨어 지금의 상황에 안주하려 한다. 이와 반대로 자유를 갈망하고 정신병원 탈출을 시도하는 승민이 대비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비적인 인물을 통해 작가의 의도는 더욱 뚜렷해졌다. 서로 물과 기름처럼 겉돌던 그들에게 우정이란 감정이 싹트고 승민의 시야에 세상을 담을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그때, 마지막 비행을 위해 그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결과는 잠정적 성공이었다.

승민은 적극적 탈출 의지로 마지막 비행속에서 자유를 얻었고 자기 안에 갇혀 있던 수명은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과 마주하며 자신의 인생을 상대하러 나섰다.

날고 있는 동안 나는 온전히 나야 어쩌다 태어난 누구누구의 혼외자도 아니고 불의 충동에 시달리는 미치광이도 아닌, 그냥 나.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존재 바로 나(P286)

승민은 손을 내밀었다. 머뭇머뭇 맞잡았다. 손을 떼자 손바닥에 승민의 시계가 놓여 있었다.

이제 빼앗기지마

네 시간은 네 거야 (P327)

어떤 책은 지겨운 문장들을 참고 이겨낸 후의 기막힌 마지막 반전에 재밌었다 할 수도 있고 어떤 책은 흥미로운 전개에 미치지 못하는 맥빠지는 결말에 재미없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끝임없는 그녀의 유머와 매끄러운 진행,흥미로운 인물구성, 거기에 전하려는 메세지도 뚜렷했다.산 좋고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곳,,, 그것이 정유정의 작품이다.

책을 읽으며 가장 황홀한 시간은 문자가 영상으로 흘러가는 때이다. 상상하려 하지 않아도, 영상으로 출력하려 하지 않아도 머릿속이 온통 스크린으로 도배되고 영사기는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황홀을 선물한 그녀의 작품이 곧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은 마지막 페이지를 아쉬워하며 넘긴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대로 전해질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