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의 마음속에 한 명쯤은 살고 있을 소녀 혹은 소년.
아련하고 심장 한쪽이 아릿한 이루어지는 법이 없는 그래서 더욱 애틋한 첫사랑.
소설 ’소나기’는 언제나 변함없이 시간이 멈춰버린 가장 순수했던 그때, 그곳으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만든다.

징검다리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 비켜달라는 말을 못해 쭈뼛쭈뼛하는 시골소년과 그런 소년과 친구가 되고 싶은 새침데기 서울 소녀.자신을 맘을 알아주지 못하는 소년을 향해 조약돌을 던지며 소리쳤던 " 이 바보"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에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장면이다. 작은 것에 들뜨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던 사소한 것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던 동심은 마지막 결말이 더욱 안타까울 정도로 예쁘고 따뜻하다.

분홍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팔과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순수와는 동떨어진 나이가, 어른이 되었다 해도 소설 ’소나기’가 있어 언제든 순수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
소녀를 업고 도랑을 건너는 소년의 모습, 수숫단 속에서 비를 피하는 소년 소녀의 모습, 소녀에게 줄 호두를 따기 위해 애쓰던 소년의 모습, 밑이 덜 든 무를 먹으며 소녀의 행동을 따라 하던 소년... 이 모든 것이 그때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징검다리 다리가 되어 준다.

결말을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닌데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소녀의 죽음,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슬픔이라기보다는 남겨진 소년에게는 너무 가혹한 결말이란 생각에서였다. 소녀의 분홍 스웨터에 남은 얼룩처럼 소년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결코 추억이 될 수 없는 잔혹한 동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든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고

 

얼마 전 신문에서 한 고등학생이 순결선행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실소를 한 적이 있는데 이 소설 역시 제목에서부터 코웃음을 치게 한다. ’정조’ 라니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단어이다. 하긴 21세기에도 순결 서약식이란 시대착오적인,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1930년대 쓰여진 소설임을 감안해 본다면 귀여운 애교 정도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의 여성관이 드러나는 문장에서 이 책 읽기가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자란 흔히 아름다우면 음기를 풍기기 쉬운 것이다. 그렇지 않고 처절하게 어여쁘다면 독기를 품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부드러우면서도 기품이 드러나고 어여쁘면서도 결곡하기는 가장 드문 일이다. 억지로 우리가 구해 본다면 성스러운 관음보살의 얼굴에서나 적이 이 고결한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백제 서울안에서 제일가는 미인을 아내로 두었지만 이것을 불안해하며 자격지심을 느끼는 도미, 권력으로 남편있는 아내를 탐하는 개루왕... 도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포용할 수 있는 담대함이 없었고 개루왕은 왕으로서의 덕과 인망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정말 못난 사내들이다.

"이거 봐. 이 목수 도미의 아내가 되기에는 당신이 너무 이쁘단 말야. 저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의 재상의 아내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장잣집 맏며느리가 되든지 해야 할 감이란 말야. 이 목수 놈 도미의 아내가 되기는 너무 아깝단 말야."

죽음을 무릅쓰고 정조를 지키며 끝까지 남편에게 도망쳐간 아랑...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일편단심이라고도 의리라고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일부종사를 강요하는, 여성의 정조가 목숨과도 같은 시대의 강요당한 희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 남자만을 섬기는 것이 여성 최고 미덕이며 절개이며 순결이라고 열녀를 강요하는 이 소설이 나는 마뜩잖다. 더더욱이 이 소설을 통해 어떠한 교훈을 얻고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면 그건 분명 억압이며 억지일 것이다.

원작소설을 뛰어넘는 영화를 보기 어렵듯 설화는 그냥 설화로 남아 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정을 향해 가는 시간, 우연히 보게된 단만극에 마음을 빼앗긴 듯 하다. 부제로는 '삼순이의 유리구두'가 될 법한 드라마다.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이런 저런 상상으로 행복했다.

 

어릴 적 향기 나는 수첩에서 나던 그 향기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책을 대체하는 매체들이 아무리 등장한다 해도 책을 뛰어 넘을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향기가 담고 있는 추억과 함께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니말이다.

 

 

 

서른 살, 실연 후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실직을 하고 만 구두 디자이너 효주의 일상이 진부하지만 공감되고 지루할 틈 없이 재밌게 전개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구두의 상표명은 낯선 것이 많았지만 이야기는 나와 비슷한 주변 누군가의 혹은 친구의 사생활을 엿보는 듯 친근했다.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 비슷한 그러나 최근 읽은 칙릿소설 중에선 가장 마음으로 함께 웃고 울고 할 수 있었다.

 

 

 

사회에선 자신의 자리를 잃었고 가정에선 동생의 결혼을 가로막고 있는 고철 자동차가 된 효주. 그러나 소설과 드라마 속 그녀들은 항상 그러하듯 당당하고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전진하며 새로운 인연과의 티격태격하는 사랑싸움의 불문율을 지켜준다.

 

그녀의 스쳐가는 인연...클럽에서의 모델같은 연하남과의 에피소드에서는 씁쓸한 웃음을 짓게 했다. 여기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아마도 술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다면 절~대 명품을 몸에 걸치지 말 것 정도?

 

 

 

그동안의 카드 결제액으로 잔액이 0이 되어도 100만원대의 구두를 지르고 마는 효주의 모습은 슈어홀릭과는 무관한 나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마음의 공허함과 허기짐을 채우는 방법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그 모습이 어떠하든 애처롭기는 마찬가진 것 같다.

 

 

 

두 시간 그리고 조금 동안 깊게 빠져 읽은 소설은 하이힐로 고장 난 허리와 무릎을 치료하기 위해 찾은 한의원의 한의사와의 알콩달콩한 사랑싸움과 자신의 이름을 단 구두를 만들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결말은 역시나 멋있는 왕자님과의 해피엔딩의 통속적인, 어제도 보았고 내일도 볼 듯한 것이었으나 가볍게 책장을 덮으며 웃음 지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소설이었다.

 

 

 

내일 신을 나의 구두는 어떠한 인연을 향해 나를 인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