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주인공에게서 허영기 많은 나의 모습이 보여 움찔움찔하며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세상에! 마지막 반전에선 맥이 탁 풀렸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아마도 자기 분에 못 이겨 급사해버리는 밴댕이 꼴이 되었을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환상 속의 그대’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다.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가사 속 환상 속의 그대. 그녀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인정할 수가 없다. 초라한 집도 궁상스런 벽들과 닳아 해진 의자들, 더러운 옷들그리고 남편이 하급관리인 것도. 상상 속 그것들과 너무도 다른 모든 것이 그녀를 괴롭히고 화나게 했다. 

그녀는 언제나 분에 넘치는 것을 바라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허영심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느 날 초대 받은 만찬, 아내가 좋아할 거라는 생각과 달리 그녀는 불만에 차 있다. 초대된 이들과 견주어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현실은 입고 갈 옷을 겨우 마련한 정도다. 이때 떠오른 그녀의 부자 친구. 

그녀에게서 고급 목걸이를 빌려 참석한 연회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에 있던 목걸이가 없어졌다는 것.

목걸이의 분실 사실을 솔직히 친구에게 말했더라면 잃어버린 모조품 목걸이의 100배에 달하는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갚기 위해 10년을 고생하며 모든 것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녀에겐 그럴 용기가 없었다.

언제나 부자연스러운 것은 화를 부른다. 지금 그만큼의 자신을 인정하고 만족할 수 있었다면, 자연스러움을 거스르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목걸이가 그녀의 목에서 빛나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지팡이를 짚고 기우뚱 앞서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팔뚝이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가 느릿느릿 따라가는 것이다. 손에 매달린 고등어가 대고 달랑달랑 춤을 춘다.

소설 속 이 장면에서 슬프면서도 웃기고 웃음이 나면서도 눈물이 난다. 웃음과 눈물의 끝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웃고 울다 보면 가슴을 짓누르던 응어리가 어느 정도 풀리면서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살아야만 하는.

이래 가지고 나 우째 살까 싶습니다.

우째 살긴 뭘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기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 봐라 팔뚝이 하나 없어도 잘만 안 사나. 남 봄에 좀 덜 좋아서 그렇지, 살기사 와 못 살아.

일제치하 강제 징용을 나갔다가 팔 한쪽을 잃은 아버지, 6.25전쟁에서 다리 한쪽을 잃은 아들. 2대에 걸친 전쟁의 희생자들이다.

표면적으로는 슬프고 비극적인 상황이지만 작가는 이야기를 궁상맞게 풀어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메마르던 한탄이 섞여 있던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래서 더욱 슬프다. 햇살 맑은 날의 이별처럼 말이다.

징용에 갔던 아버지도 전쟁에 참전했던 아들도 목숨만은 잃지 않고 돌아온 것으로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희망이 남아있고, 살아가야 할 의무도 생긴다. 이래 가지고 어찌 살까라는 탄식에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남겨진 한쪽 다리 한쪽 팔이지만 개울을 건널 때는 아버지가 아들의 다리가 되어주고 때로는 아들이 아버지의 팔이 되어 서로를 의지하면 그렇게 하면 살아갈 수 있다고.

전쟁을 겪지 않았어도, 만도와 진수가 내 가족 내 지인이 아니더라도 한민족이기에 느껴지는 한과 슬픔이 있다. 또한 누구라도 그러하듯 전쟁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참상이고 비극이다. 소수의 이기적인 이들의 짧은 생각으로 제2의 만도와 진수를 만들어 내질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공금횡령 죄로 복역하면서 딸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비용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한 작가는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오 헨리라는 필명을 썼다고 한다. 딸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이나 그의 소설은 예쁘고 따뜻하다. 그리고 인정미가 넘친다. 매 작품 예외 없이 그래 왔다.

가난한 화가촌 폐렴에 걸린 젊은 예술가. 그녀에겐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날 우연히 발견한 창문 밖 담쟁이덤굴 잎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며 하루하루 죽어간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 같은 잎 하나가 애처롭게 가지에 매달려 있다. 비바람이 분 다음 날 당연히 떨어졌을 거라 생각했던 마지막 잎이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매달려 있다. 며칠이 지나도 그자리 그 모습으로. 소녀는 마지막 잎에서 희망을 얻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회복하게 된다.

얼마후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마지막 잎은 그림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그린 사람이 오랜 기간 이렇다 할 작품 없이 술에 취해 허풍만 떨던 늙은 화가라는 것, 그리고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이야기의 단순한 구조에 비해 감동은 크고 깊게 오랫동안 잔잔히 남는다. 이것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늙은 화가의 희생 정신이 그리 쉽거나 간단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요즘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은 언젠가 하교 중인 학생을 언덕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버스로부터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기사분의 이야기를 접한 직후였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분명 가공의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에는 지금이 있고 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