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TV에서 보게 된 톨스토이의 삶과 문학에 관한 짧은 강의 이후 그와 관련된 모든 글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그의 소설과 자서전을 마음속으로 읽고 또 읽는 요즘, 톨스토이가 몇 번을 소리내어 읽었다는 이 소설! 무엇이 그렇게 그를 사로잡은 것일까 궁금했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에 이런 대사가 있다.

넌 너무 생각이 없어. 게다가 너무 쉬워

생각이 없다는 건 누구나 생각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가령 일하던 동료가 다쳤거나 그랬을 때

그때도 너는 정말 생각이 없다는 거고

쉽다는 건 이 남자와 연애가 끝나고 저 남자와 연애로 넘어갈 때를 말하는데 건데 그게 쉽다고.

이 대사에 등장하는 생각 없고 쉬운 여자는 소설 속 귀여운 여인 올렌카를 떠오르게 한다.

그녀는 생각이나 이성보다는 행동과 감상이 앞서며, 이 사람과 사랑이 끝나고 저 사람과의 사랑으로 넘어가는 것이 정말 확실하고 쉬워 보인다. 

그러나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어느 한순간도 현재의 사랑에 충실하지 않은 적 없었으며 그녀에게서 상대를 빼앗아 간 것은 변심이나 싫증이 아닌 자연재해와도 같은 인간 능력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쉽게 물들고 동화되는 올렌카는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은 상대 그 자체다. 

사랑하는 사람이 말한 대로 말하고 그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했다.

현실적응이 빠른 이 여자, 어제의 사랑에 집착하거나 미련 따위로 힘들어하지 않는다. 현재의 사랑에 그만큼 충실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아오던 허구가 만들어 낸 상식적인 인물들과는 많이 달라 낯설기도 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질질 짜는 순정만화 속 여자 주인공보다, 앞뒤 재며 사랑을 저울질하는 사람보다 솔직하고 순수한 그녀가 당당해 보이고 주체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그녀가 남녀 간의 사랑에만 충실했던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제 자식처럼 보살피는 모성애를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착하고 순수한 본성이 느껴져 그녀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든다.

일견 그녀의 사랑 방식이 무모하고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는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보다 올렌카가 더 똑똑한 진짜 사랑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중-

엄친아가 흙이나 파먹고 놀지 않았으면 다행일 초등학생 소녀에게 건넨 책이다. (내가 가진 책은 1990년 판이다)

정확히 말하면 고등학생인 엄마의 친구 아들이 아무개에게(나에게) 가져다주라며 건넨 책이다. 

초등학생이었던 그때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책은 ’이상한 책’이란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그 엄친아는 내 기억 속에서 한참 동안 이상한 오빠로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 이상한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감탄했다. 문명인이 문명인을 이렇게 날카로운 시각으로 관찰할 수 있는지 이렇게 신선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기억 속의 엄친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유일한 단서인 엄마의 기억. 그러나 20년이란 시간을 그렇게 우습게 볼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는데 엄마의 기억이라고 온전하게 그때 그대로 일리 없었다.

어렴풋이나마 남아 있어도 좋을텐데란 아쉬움으로 책을 이리저리 펼쳐 보지만 읽기 어려웠는지 간간이 보이는 신경질적인 낙서에 미소 지을 뿐이다.

어쨋든 하룻밤의 꿈같은 이 아련한 기억이 영구보존 처리를 마친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이 전하는 메세지와는 상반되는 기분 좋은 떨림, 설렘과 아련함으로 말이다.

저자에 ’투이아비’라는 추장의 이름을 보고 의아하기도 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첫장에 보면 이런 글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남태평양 섬의 투이아비라는 추장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이글은 기획상으로만 그 섬의 원주민 말로 쓰여졌으며 독일어로 다시 번역되었다.

투이아비 추장의 문명인 관찰기 속 빠빠라기(남태평양 원주민 말로는 ’천국의 파괴자’를 뜻하다 이 책에서는 문명인을 가리킨다.) 들은 이중적이고 모순덩어리이다. 수많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옭아매고 필요 이상의 것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복잡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굴절시켜 왜곡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불행하다 생각하기도 한다.

빠빠라기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는 아무 의미도 없고, 자기를 병들게 만드는 일을 하며 산다. 그러면서도 그 일을 칭찬하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아름다운 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는 것이다. p54

작가는 예리하고 섬세하며 따뜻했다.

투이아비라는 추장을 관찰자로 내세워 현대인들의 모습을 서술함으로써 원시의 순수한 자아와의 거리를 좁히고 하루씩 죽어가고 있지만 알아채지 못하고 더욱 그 속도를 더해가는데 여념이 없는, 자연을 거스르는 유일한 변종에 대한 애정어린 충고와 조언도 잊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면서 그 시대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1920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한 세기가량이 지났음에도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정확한 작가의 관찰력과 통찰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빠빠라기는 다른 사람을 비추기 위해 빛으 들고 있을 뿐 그 자신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있다. 그는 손에다 빛을 쥐고 있기 때문에 입으로는 신을 불러도 그의 마음은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p171

아무리 예쁜 꽃도 꺾지 않는다.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소유보다는 존재가 나에겐 더욱 큰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유욕을 자극하는 경우가 있다. 신상 구두도 한정판 가방도 잘빠진 스포츠카도 아닌 마음을 흔든 단 한 줄을 품은 책. 비 오는 날 우산이 되어 주는 책. 마음을 헤아리고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어주는 책을 만났을 때이다.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대부분 만원 지폐 한 장으로 해결되지만) 손에 넣어야만 만족이 되는 , 읽고 또 읽고 싶어지는 책은 잊고 있던 소유욕을 불러 일으킨다.

'나의 방식으로 세상을 여는 법'... 그저 흔한 자기계발서 이겠거니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 속는 셈치고 이번만 하며 읽게 되는 그런 책일 거라 생각했다.

자기계발서에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고 많은 쉼표를 찍고 읽는 행위를 넘어서 참여하여 하는 행위가 되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 책은 나의 고정관념과 착각을 보기 좋게 비웃어 주었다.

공감대를 형성하고 감동에 눈물을 끌어내는 글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감과 더불어 실제로 적용하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글 이상의 의미를 담은 더불어 눈물의 빛깔을 바꾸는 글을 만나는 것, 더이상 이론이 아닌 현실을 담은 글은 의외로 만나기 쉽지 않다.

그래서 20대의 마지막 쉽지 않은 만남이 이뤄졌기에 더욱 기쁘고 감동의 눈물은 배가 되었던 것 같다.

누구든 스물 아홉 살 12월 31일이 지나기 전에 인생을 온전히 바칠만한 자신만의 방향을 발견한다면 설령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해도 그는 이미 성공한 20대다(P18)

지금껏 접해 온 많은 자기계발서와 뚜렷한 차이점은 무책임 하지 않다는 것이다. 희망을 위한 희망을 노래하지도 이론을 위한 탁상공론도 없으며 감상적이지 않다. 설문을 통해 신뢰감을 높이고 저자의 나침반 프로그램에 참가한 수강생들에게 직접 적용해서 도출된 결과로 실질적이며 이론만으로 국한됨에서 오는 오류도 줄일 수 있었다. 수강생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임상시험을 마친 완제품의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편집자가 누구인지 몇 번을 찾기도 했다.

구성의 편집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들의 이야기, 멋있는 인생 선배(위인,성인...)의 이야기,우리들의 이야기를 적절하게 배치하였고 도입부분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 구성도 탁월해 보였다.

채용 담당자와 구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 큰 차이를 들어내는 설문이 흥미로웠다. 이 설문에서 채용시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들을 과거와 현재에서 분석하고 미래까지 예측해 주는 책임감도 발휘하고 있다.

희망,욕망,재능에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고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문서를 통한 것이지만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도 이 책이 지닌 힘이라 생각한다.

나의 욕망을 적어보고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보고 재능을 찾아보고 중요시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책이지만 저자의 나침반 프로그램에 어느새 참여하게 되었다.

20대의 마지막, 가장 큰 행운은 만남이었다. 책과의 그리고 이로 인해 내가 진정 원하는 것과의 만남.

물론 하루 밥벌이가 아쉬운 사람들에게는 나의 감동과 깨달음도 그저 배부른 투정에 가깝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를 찾고 자기다운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남의 길을 쫓아 들어가고 싶지도 않은 문을 연지 3년. 참을성만 많은 나에게 배달 된 나와 나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나침반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