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찬거리를 사가지고 오신 어머니의 손에 들린 얇고 누런 포장 우편물을 건네받고 그 자리에서 풀어보니 작고 앙증맞은 책이 배달되어 왔다. 소설가 김원일 씨(65)의 산문집이다.

산문집이라...국문과 출신도 아니고 중고등학교 때 배운 문학의 갈래 같은 것들도 잊은 지 오래라 산문이란 분야가 조금 낯설다. 책띠지를 벗기고 책장을 넘기려다가 유난히 하얗고 너른 깔끔한 표지에 눈길이 갔다. 내방 책꽂이를 대충 둘러보아도 이런 ’디자인을 하지 않은 책표지’를 가진 책은 없는 것 같다. 책표지만 봐서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용에 대해 아무런 짐작도 할 수 없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까?’ 이런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작가가 보거나 겪은 계절·풍경·경험들에 대한 짧은 생각들을,

제2부는 제1부와 마찬가지로 사진집에 덧붙이는 짧은 생각들을,

제3부는 작가 자신의 듬성한 자서전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전체적으로 예순 중턱을 넘은 노작가의 크고 작은 느낌과 생각들이 나름대로 알차게 담겨 있어서 가을 알곡과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다. 특히 작가의 소중한 문학 체험이 단상(斷想)마다에 알알이 담겨 있기 때문에 문학도들에게는 어떠한 안내서의 역할도 할 것 같다. 자신의 작품을 포함해서 추천하는 책, 읽어본 책, 접해본 책 등이 자주 눈에 띄어 나조차 괜스레 솔깃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또한 이 책이 작가에게는 인생의 가을기에 돌아본 ’기억의 풍경들’을 담은 것이라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인생의 가을기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독서의 계절인 가을에 어울릴만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단점을 꼽으라면, 요즘 10대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보기에 약간은 구시대적인 시각이 얼핏 비친다는 점이다. 작가 자신이 몇 군데 글에서 보여주었듯이-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엄한 훈육에 진력이 나서 여자라면 치마도 보기 싫었다 등-여성과 관련된 묘사에서 ’이게 정말 단상(短想)인가’ 싶은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도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 당시는 국어나 문학 교과서에 실린 그 비슷한 류의 글을 교과서 외 다른 곳에서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 책 처음 단상 몇 편을 읽고는 왜 ’그 비슷한 류’를 떠올렸는지. 어쩌면 그래서 졸업 후에 젊은이들이 교과서에서 접해보지 못한 일본 소설이나 돈벌이, 재미 위주의 책만을 즐겨 찾는지도 모르겠다.

위에 굳이 단점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우리 젊은이들이 이해해야할 범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춥고 배고픈 시기를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요즘 유행하는 TV프로(상상플러스-세대공감 OLD&NEW) 에서 말하는 4천만이 하나 되는 그날은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탁재훈 씨가 앞에 여자 아나운서한테 농담으로 묻기를  "언제 하나가 됩니까? 되긴 됩니까?"라고 했을 때 속으로 낄낄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10대·20대의 젊은이들도 많이 읽고 전쟁세대의 아픔을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책을 다 읽고 나서의 일이지만 이 책의 표지는 소설가 김원일 씨만의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캘리그라피(calligraphy)’라고 실제로는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의 앞표지에 흘기듯 씌어진 책제목은 김원일 씨가) 손으로 직접 꾹꾹 눌러 쓴 글씨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쓴 글씨’라고도 한단다. 그리하여 나는 새삼스레 나의 디자인 감각에 대해 꿀밤도 한방 먹이고, 책에 대한 감상도 새로이 느껴보며 침대 머리맡에 이 책을 두었다. 가을이 되면 또 다시 들춰보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차오원쉬엔(조문헌 曹文軒·53)의 작품 중에서 <바다소>를 읽어본 적이 있다. 자세한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 소년·소녀의 사랑이 참으로 애틋하고 아름답게 그려졌기에 마음속에 잔잔하게 남아 있던 작품이다.

휴가철은 다가오고 ’어떤 책을 읽을까?’ 궁리하던 중 원래 계획은 읽다가 흐지부지 손을 놓아버린 책 <로마인 이야기(전 15권)>을 읽는 데까지 읽어보려고 했건만 엄두도 나지 않고 기분도 내고 싶고 해서 오랜만에 분위기에 젖어 보자는 기분으로 <비>라는 작품을 선택했다.

이 책은 지금의 홍콩 어디쯤에 있는 유마지 읍(저자의 고향이라고 함)에서 문화대혁명의 시기(1966~1976)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동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심인물이 되는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애증 섞인 사랑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다채롭게 내리는 ’비(雨)’와 무척이나 닮았다.

비가 얼마나 다양하게 내릴 수 있는지.
사랑은 또 얼마나 다양한 빛깔을 띨 수 있는지.
이 소설은 보여준다. 이에 작가의 섬세한 문체와 아름다움과 추함을 묘사하는 능력은 소설의 재미에 몽롱함마저 더해준다.

줄거리 - 삼십 년만에 처음으로 엄청난 물난리가 나던 날 두원조의 옻칠한 관이 비둘기 떼와 함께 유마지 마을사람들 앞에 떠내려온다(이야기의 처음이자 끝으로 우리네 지하철에서 순환하는 열차를 타고 가는 것처럼 순환하는 이야기열차에 탔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큰 물난리로 어머니의 관을 타고 유마지 읍에 흘러든 두소암 두원조 부자는 유마지의 지주인 정요전의 집에서 일하게 된다. 어린 두원조는 이곳에서 정요전의 딸 채근을 만나고 다시 물난리가 났을 때 나무 아래에서 채근과 아름다운 사랑놀이를 경험한다. 한편 유마지 읍의 둘째가는 부자 구반촌의 아들 구자동도 채근을 쫓아다니며 두원조를 경계하고 미워한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구반촌은 사업실패로 몰락하고 혁명은 정요전의 재산을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분배당하고 지주를 가난뱅이로 만들어버린다.
이후 두원조는 말더듬이에서 유마지의 지도자로 애융, 채근을 사랑하는 남자로, 구자동은 야망을 꿈꾸지만 패배자로 전락하고, 채근은 시골처녀로 자라다가 시집을 간 후 남편을 일찍 여의고 어린시절의 사랑을 꿈꾸다가...

대하소설 토지의 등장인물과 비교한다면 채근은 서희, 두원조는 길상이다.

사실 나는 작가의 서문을 읽고는 약간 실망 아닌 실망을 했었다. 분위기에 젖어보자던 나의 휴가철 독서계획과는 어긋나는 작품이란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비(천표天瓢ㆍ하늘 표주박)>는 기본적으로는 이처럼 내가 견지해온 미학 배경을 갖추고 있지만, 내 이전의 작품들과 다른 부분들을 갖고 있는데, 추악함마저도 아름다움의 날개 아래 흘러가도록 처리한 점이다. 과거에는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묘사했으나, 이번 집필에 이르러 비로소 아름다움과 추악함이 뒤엉켜 하나를 이루도록 써나감으로써 아름다움으로 하여금 일종의 깊은 심도를 갖게 했다. - 2007년 4월 2일 북경에서 차오원쉬엔 서문 중에서

글쎄 나는 아직 (현세의 나이로 보나 정신적으로나) 어려서 세상의 더러움, 죽음, 추악함까지 포용해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능력까지는 안되나보다. 괜시리 첫사랑과 사귀었던 때의 재미나고 슬픈 추억담 몇 가지가 떠오르긴 했다.
비디오방에서 지금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영화를 보던 중 미국 남자애들이 ’물건’이란 말을 자주 하기에, 나는 옆에 있던 남자친구한테 물었다.

"오빠, 물건이 뭐야?"

"응...그건 남자들 거기를..."

또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는 몇 번을 비를 맞으면서 추잡하게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는 확실히 사랑과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소설 속 비가 자주 내리는 유마지 읍에는 유독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정말? ^^

개인적으로 저자 차오원쉬엔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누가 뭐라든 다시 소설속에서 아름다움을 그리는 작가가 되어주시길 바란다. 저자의 말대로 추악함은 오히려 쓰기 싶지만 아름다움은 아무나 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으니 말이다. 삶에 찌들어 지칠 때면 아름다움을 그린 책을 만나고 싶다. <바다소>에서 보았던 시골풍경과 아이들의 모습이 나는 이 소설 속 미추(아름다움과 추함)보다 더욱 그리워질 것만 같다.

처음 이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계기는 텔레비전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섹시한 한고은 씨의 매력에 반해 즐겨 보시는 드라마가 ’경성 스캔들’인지라 얼결에 ’한고은 씨의 매력 = 럭키경성’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이 책은 내 손에 들어왔다. 만약 재미있고 어머니가 읽으실 만하다고 생각되면 기꺼이 대여해드릴 마음도 가지며 첫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하기 전, 그러니까 1945년 이전의 시기에 일상을 살아가는 조선인들이 돈을 둘러싸고 벌이는 다양한 시도들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내용은 정밀한 고증을 거친 실화이며 일부는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을 인용한 부분도 많다.

역사를 암기로 이해한 세대의 폐해 중 하나인데 우리는 흔히 1945년 이전의 조선시대라고 하면 일제강점기여서 무척 암울한 시기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음이 있으면 반드시 양이 있는 법. 어둡기만 한 줄 알았던 시절에도 의외의 시끌벅적 활기찬 조선인의 모습이 있었더랜다. 이러한 근대 조선의 시기는 놀랍게도 오늘날의 돈시장에서 벌어지는 모습과 무척 흡사했다.

오를 만한 땅을 물색하러 돌아다니고 개발이 예상되는 지역의 땅을 과감하게 투기해서 하루 아침에 일확천금 부자가 되느냐, 걸인이 되느냐 하는 하나의 꿈 같은 이야기들은 오늘날 로또게임을 생각나게 했다.

특히 내게 가장 인문학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민족학교를 세우신 남강 이승훈 선생님에 대한 일화들이다. 교육학이나 역사책에서 이 분은 오로지 ’민족학교를 세우신 위대한 분’ 이라고만 알려주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거부감까지는 아니어도 별 감흥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만나는 인간 이승일(안창호를 만나고 개명하기 전 이름)은 위인 이전에 하나의 인간이었고 인간이 그러한 일들을 꾸려나갔기에 더욱 위대해 보여 나도 모르게 보수상의 숱한 걸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이승일은 부친에게 세 가지 유산을 상속받았다. 첫째가 ’업신여김’이었고, 둘째가 ’가난’이었으며, 셋째가 ’무식’이었다. (190쪽) (사진 못 올림)

▶ 보부상. 10대 청년 이승훈은 500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그는 ’똑바로 걷는’ 장사꾼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이런 점을 몰래 음미했다.

’책이란 대중서가 아니고 아직(은)도 아는 사람만 펼쳐볼 수 있는 비밀문서’라고.

저자의 인문학적 역사 연구에 박수를 보내고 싶고 이런 책을 앞으로도 자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