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무엇일까? 연구실에서 자판을 치다 모니터 앞으로 불쑥 나타난 모기를 휘휘 내쫓다 들었던 의문이다. 너무 거창한 의문이라 사소한 일을 하던 나는 왠지 모르게 민망해졌다. 어떤 게 인생일까? 자판에서 손을 내려놓고 조금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본다. 그러자 다시 모기가 달려든다. 그렇다면 이 모기에게 인생이란 무엇일까? 연구실 싱크대와 이어진 하수도에 고인 물에서 알 까고 태어나 장구벌레로 물 속을 기어다니며 내가 버렸는지도 모르는 라면 국물을 마시다 4회 탈피를 거쳐 모기로 변태하여 싱크대를 타고 올라와 연구실에 있는 사람들의 더운 피를 쫓다 지금 내 손에 눌려 피떡이 되어 생을 마치는 것이 이 모기에게 인생이라면 인생이었을까. 아니면 본능의 연장일 뿐이었을까.

 

 

  그리고 사람의 일생을 생각해 보았다. 어릴 때부터 경쟁에서 낙오되면 안 된다고 가르침 받으며 일생의 목표를 좋은 대학, 좋은 직장으로 삼고 초등교육 6년, 중고등 교육 6년 후 좋은 대학에 들어가 그리고 대학 교육 4년 받고 나와 좋은 직장을 잡아서 일생의 목표를 이루었다 싶은데 매일 반복되는 업무와 회식 그리고 야근에 지쳐 돌아와 침대에 눕자마자 잠드는 생활의 연속. 그러다 혹시 병이라도 나서 몸져 눕거나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과연 인생이 있었을까? 아니면 그의 일생 역시 본능의 연장일 뿐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그는 기업의 부속품일 뿐이었을까. 주어, 동사, 목적어만 바뀌었을 뿐 앞에서 말한 모기네 삶과 인간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삶 모두 DNA에 각인된 본능이 시키는 대로 먹고 살고자 하는 일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렇게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물론 본능이 충족되면 충족감을 느낄 순 있겠지만 인생이라 보기는 힘들지. DNA의 명령에서 벗어나서, 본능을 거스르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 거기서부터 인생이 시작되지 않나 생각해본다.

 

 

  질문을 바꾸어본다. 일단 좋고 나쁨을 떠나서 어떤 인생들이 있을까. 인류가 시작된 이래 여태 살다간, 그리고 살고 있는 사람만큼의 무수한 인생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고쳐서. 어떤 게 좋은 인생일까?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다. 사람마다 하나씩 품고 있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모두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즘은 비교적 획일화 되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만.)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던지 친절하게도 시중에 좋은 인생을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과 강연들이 존재한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축복이라면 축복이겠다. 하지만 이러한 책과 강연들 역시 결국에는 ‘어떻게 해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내용들이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 같았다. 알면서 침묵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것인지 나는 구분하지 못했다. 사람이 먹고 사는 것만 풍족해지면 행복하냐. 그렇다면 왜 오늘날 불행하다는 사람은 왜 그리 많은 거고, 하루가 멀다 하고 고층 건물에서 몸을 던지는 사람은 늘어만 가는 거냐. 본능의 충족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 같으면서도 이것은 인생이 아니라며 회사를 뛰쳐나오는 직장인들이 턱없이 적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삶들 역시 인생이 아닐까란 생각이 하염없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하루는 최고의 ‘사교육업체’라 불리는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그에게 공부가 성공의 지름길일까 하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취업공부, 고시공부에 목매는 건 두렵기 때문이에요. 경쟁에서 밀리면 끝이다, 안전망이라도 찾자는 거죠. 양극화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일 뿐입니다. 공부해서 취업한들 대기업 부속품밖에 더 됩니까. 얄팍한 인생밖에 더 됩니까. 이제 공부는 구원이 아니라, 기득권층 뒷다리만 잡고 편하게 살자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게 대한민국 최고의 사교육업체의 대표가 할 말인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당부했다. ‘무엇을 할 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 지’에 천착하라고. ‘얄팍한 중독’이 아니라 ‘영혼의 울림’에 몰입하라고. 때로는 ‘깽판’도 쳐가면서 농구공이 골대에 빨려 들어가듯 그렇게 자신을 어딘가에 꽂아 넣어보라고. 그는 더 이상 성공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인생의 본질을 찾는 ‘깽판’을 칠 것을 젊은이들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기성세대가 만든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황야에서 방황하기도 하며 성찰과 가치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자기 자신의 본질에 닿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듯한 청량감이 들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그런 삶을 살아간 사람이 하나 생각나서다.

 

 

  리처드 파인만, 양자전기역학(QED)의 재정립으로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 전 세계 물리학도들에겐 전설적인 빨간책(?)이라 불리는 『Lectures on Physics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의 저자. 또한 그를 잘 아는 이들은 그를 다른 이름으로도 기억하곤 한다. 봉고 드럼 연주자, 화가, 금고 털이범까지.. 리처드 파인만이야 말로 ‘깽판의 대가’, 그야말로 ‘깽판의 화신‘이었다. 그는 권위에 불복종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니, 권위를 조롱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누가 그 노벨상 시상식에서 계단위에서 폴짝거릴 생각이나 했을까? 누가 전시 상황에 편지를 검열하는 군인들을 조롱할 생각을 했을까? ’깽판의 대가‘인 그가 아니면 누구도 못할 일들이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관념에 멍들지 않았다. 권위에 무릎 꿇지도 않았다. 그에게 가치 있는 삶이란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 특히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삶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다.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는 바로 그 삶에 대한 그의 회고록이다. 그의 출생부터 시작하여 어린 시절과 MIT 학부 시절, 프린스턴 대학원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던 시절, 그리고 코넬 대학과 칼텍에서의 교수시절까지 그의 일생 전반에 걸친 재미있는 일화가 담겨 있었다. 이 책과 동시에 나는 그의 자서전 격인 『남이야 뭐라 하건!』도 같이 보았다. 『파인만 씨 농담도 잘 하시네』에서는 그의 일화를 통해 그의 삶의 작은 조각들을 볼 수 있었다면, 『남이야 뭐라 하건!』에서는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그의 가치관을 확인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정말 그가 추구하던 삶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 물리학은 삶 자체였다. 그의 회고록 곳곳에서 자나 깨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나, 심지어 걸어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물리학 수식을 풀어가며 자연이 숨겨놓은 근본적인 법칙에 다가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오죽하면 길을 걷다가도 깊은 생각에 빠져 길 한복판에 가만히 서서는 중얼거리는 일이 많아 경찰까지 오도록 만들었을까. 그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고 하지만 삶을 모두 물리학에 파묻을 정도로 치열했다. 그리고 그 외의 남는 시간은 봉고 드럼을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때로는 금고를 털거나 권위를 조롱하는 데에 썼던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그의 삶은 언제나 유쾌했다. 그는 그의 삶에 대하여 철저하게 본연에 충실했던 것처럼 보인다. 첫 아내가 결핵으로 투병할 때에도 그는 로스앨러모스에서 원자탄 개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그는 다시 연구소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내는 죽었어. 그런데 프로그램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은 놓지 않고 있었다. 『남이야 뭐라 하건!』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데, 아내가 사망한 후 하루는 백화점을 지나가다 쇼윈도에 걸려있는 옷을 보고 아내가 보았더라면 좋아 했을텐데 라는 생각에 견딜 수 없이 슬퍼져 그 자리에 서서 울었다는 내용을 보고 그에게 성급하게 내렸던 비인간적인 평가를 눈물로 씻어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해 언제나 동의할 순 없었다. 거추장스러운 것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그는 가끔 책임에서도 자유롭고자 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는데 바로 원자탄을 개발하고 그 것이 대량 살상에 쓰였음을 뻔히 알면서도 개발을 위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로 그 이후의 책임에서도 자유롭고자 한 것이 바로 그 것이다. 어린 아이 같았다. 목표를 이룩했으니 그 것으로 된 것이라니.. 과학 지식 그 자체는 가치에 대한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고 하지만 과학 지식을 이용하는 과학자는 과학 지식을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사용하기 때문에 과학자 역시 당연히 윤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핵 물리적 지식에서 원자력 발전과 원자폭탄이 나올 수 있는 것을 보라. 하나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반면, 다른 하나는 널리 인간을 해롭게 하지 않는가. 실제로 그는 원자폭탄 개발 그 이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른 과학자들이 반핵, 반전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것에 비해 그는 그것에 대해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의 관심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활자로 만난 그의 삶은 그러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보며 나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바라는 삶 보다는 내가 바라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나만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란 것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사명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만 나의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천문학을 공부하고자 했고 그래서 천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4년이 흘러 이제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단 한 번도 결심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면 물론 거짓말이다. 공부를 해나갈수록 느낌표보다는 물음표만 늘어가는 것을 보며 때로는 ‘나는 여기까지 밖에 안 되는가. 그럼 내가 가는 이 길이 내 길이 아니지 않을까'하며 방황하기도 했다. 때로는 취업을 다짐하며 토익 책을 폈던 적도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천문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내년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주문하고 싶다. 변치 않는 성실함, 한결 같은 꾸준함, 그리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지고 하루하루와 삶을 성찰하며 나 자신에게 진실해지기를. 때로는 ’깽판‘을 치더라도 나 역시 내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처음 접한 토플 리딩 책입니다.

이번 7월부터 토플 준비를 시작하였는데요. 이 책은 학원 스터디 모임에서 쓰게 된 교재였습니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모두 모여 하루에 2지문씩 풀고 정답의 근거가 되는 내용을 지문 속에서 찾아내는 훈련을 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 동안 이 책을 풀면서 느낀 점들을 조금 써보려고 합니다. 

(처음 본 토플 책이었기에 지문과 문제의 난이도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구요. 강사님 말씀으로는 실제 토플 시험에 거의 근접한 난이도로 보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1. 생소한 지문

먼저 이 책이 다른 책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지문의 생소함입니다. 이 책은 다른 책에서는 보기 힘든 지질학, 생물학 관련 지문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저희 스터디원들은 대부분 문과 계열 전공자들이라 이 부분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해 지문 해석과 문제 풀이에 많이 어려웠다고 하더라구요. 다만 아쉬운 점은 너무 지질학과 생물학에 치우지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지문을 보강하여 다양한 내용을 다루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지질학이나 생물학 분야에 대한 지식이 적은 학생들에겐 매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문과 전공자들에게 강추!!

2. Background Knowledge와 Vocabulary

그리고 이 책은 각 지문이 끝나면 뒷 부분에 Background Knowledge와 Vocabulary라는 파트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혹여나 문제를 풀면서 지문이 이해되지 않았더라도 뒷 부분에서 그 주제에 해당하는 배경지식을 다시 보여줌으로써 학습자들이 단순히 문제를 푸는 것을 넘어 상식도 늘릴 수 있도록 한 점은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단어 역시 문제 풀이 후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부분을 다시 한 번 지적해 줌으로써 단어 공부 역시 소홀히 하지 않을 수 있었구요. 학습자들을 잘 배려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3. 단순한 해설

해설은 매우 단순합니다. 이 책은 깔끔하고 간결한 해설을 제공합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토플을 처음 공부하는 학습자들에겐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 해설 역시 정답의 근거보다는 문제 자체에 대한 해석이 전부니까요. 토플을 처음 공부하는 학습자들과 독학 학습자들에겐 이 책이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스터디를 통해 모르는 문제는 함께 고민해 봄으로써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스터디용으로 알맞은 교재입니다.

네, 이 정도가 제가 이 책을 보며 느낀 점입니다. 추가로 이 책은 처음부터 토플 중, 고급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기에 개인적으로는 Introduction 파트는 제외하거나 좀 더 간결하게 했으면 합니다만 없으면 또 아쉬울 것 같고... 계륵이네요. ^^;

많은 부분에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토플 스터디를 하시는 분들이라면 저는 이 책을 가장 먼저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2005년 7월 7일, 목요일

 

비는 오지 않았다. 아마 견우와 직녀가 만나지 못했나보다. 아니면 우리와 그들의 시간이 다른 것일지도…….

 

새벽이다. 사실 기말고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쳐야 할 시험이 6개나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다. 기말고사를 준비할 것인지, 아니면 대회 준비를 해야 할 것인지. 룸메이트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꼭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알게 된다면 좀 더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천문 올림피아드는 대략 2주, KYPT는 1달 정도 남았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2005년 7월 8일, 금요일

 

이번 달은 시작부터 고달프다. 대회 준비를 위해 친한 후배와의 외출 약속도 거절했다. 나중에 다른 후배에게서 그 후배가 자습시간 내내 울었다는 말을 들었다. 대회 준비로 기말고사는 기말고사대로 망쳤다. 이러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도 된다. 그래도 대회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것도 많은 것 같다. 내 본모습을 알게 된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고.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내가 책임져야지.

 

 

 

2005년 7월 9일, 토요일

 

기말고사는 끝이 났다. 애초에 공부는 하지도 않았다만 그래도 성적이 나쁘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특히 일본어는 뭐에 씌인 것 같다. 성적이 왜 이러냐.) 신경 쓰지 말자.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회 준비에 착수하자. 2주 만에 천문 올림피아드 준비라.. 대학생들이 보는 천문학 전공서 3권이 지금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일단 읽어나가자. 모르는 부분은 메모장에 적어놓고 수업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틈틈이 보며 천천히 생각해보자. 시험도 끝났겠다 선생님들께 양해를 드려 대회 준비에만 매진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2주 만에 될까 안 될까를 고민하는 순간, 나는 이미 탈락이다. 시험지를 내는 순간까지 공부에만 집중하자.

 

피곤하다. KYPT도 준비해야 하는데……. 3시 이전에 자본지가 1달도 훨씬 넘은 것 같다.

오늘은 이만 자자.

 

 

 

2005년 7월 10일, 일요일

 

하루 종일 천문학 전공서를 보았다. 특정한 행성계에서의 달력을 만들라는 문제를 계속 고민했다. 저녁시간에 급식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좋은 방법이 생각났고, 바로 기숙사에 올라가서 그 문제를 풀었다. 결국 저녁은 먹지 못했다.

오늘은 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시 손으로 머리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잠시 시계를 보았다. 15초, 다시 일어나 책을 보았다. 그런 행동도 사치였다. 차라리 책을 읽을 땐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오늘은 조금 더 공부했다.

 

 

 

(7월 17일까지의 일기는 쓰지 않음)

 

 

 

그렇게 계속 공부를 해갔다. 주로 전공서를 읽어나가되 모르는 부분은 형광펜으로 밑줄을 치고 플래그로 표시를 한 뒤 수첩에 적어 구보하러 갈 때나 화장실을 갈 때, 급식소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계속 보았다. 그렇게 많은 문제들이 풀려나갔다. 기말고사가 끝난 상황이었기에 선생님께 말씀드려 수업 시간에도 수업을 듣지 않고 대회 준비를 할 수 있었다.

 

KYPT 준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실험이 가장 중요했으나 학교에는 마땅한 장비 하나 없었다. 실험은 불가능 했다. 하는 수 없이 가까운 대학교로 가서 실험 장비를 쓰게 해 달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답답했다.

 

내가 맡은 실험은 수격 작용(Water Hammer, 밸브의 급격한 개폐에 의하여 관내의 유속이 급변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이상 압력으로서, 진동과 높은 충격음을 일으킴)에 대한 실험이었다. 수격작용의 메커니즘과 주요 변수를 분석하라는 문제였는데 어떻게 실험을 구상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일단 물이 세게 흐르다가 갑자기 막히는 장치가 필요한데, 수첩 한 면에 ‘Water Hammer’를 적어놓고 계속 그 것을 보면서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에서였다. 2층 컴퓨터실 옆에 있는 화장실이었다. 그 곳 소변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내가 장담하는데 금오산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보다 훨씬 세다. 방심하고 소변기의 버튼을 누르면 하체에 청량한 기운이 느껴지며 교복이 시원하게 젖어 감을 느낄 수 있다.(물론 그 전에 소리에 놀라 튀어 오른다.) 그 날도 그랬다. 내가 서있는 소변기가 그 소변기인 줄 모르고 버튼을 누르고는 “아~ 썅!” 하면서 물러섰다. 그러다가 소변기에서 들리는 쿵 하는 소리. 그리고 번개같이 지나간 신나는 생각 하나.

 

바로 컴퓨터실로 달려가서 자료조사를 하고 있던 팀원들에게 소리쳤다.

 

“찾았어!! 수격작용 실험 할 수 있어!! 따라와!!”

 

밸브의 급격한 개폐, 빠른 유속, 그리고 진동과 충격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만족하는 미친 수압의 소변기. 이것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수격작용 바로 앞에 있었다. 즉시 녹음을 시작했고, 이를 분석했다. 덤으로 충격음의 주기로부터 밸브와 물탱크 사이의 거리까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 도면을 통해 실제와 일치함을 확인했다. 날아갈 듯 기뻤다.

 

 

그리고 다시 천문 올림피아드. 계속 책을 읽어나가며 내용을 정리하고, 문제를 풀어나갔다. 읽을 때 중요한 부분과 모르는 부분을 밑줄치고, 한 단원이 끝나면 밑줄을 보고 내용을 정리하고, 모르는 부분은 수첩에 적어 오고가며 생각했다. 일기 쓰는 시간도 아까워 이 기간 동안에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아니 하루의 전부를 천문학에 빠져 살았으니 내용을 정리한 노트가 일기라면 일기일 것이다. 2주 만에 책을 전부 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초조했지만, 계속 공부를 해 나가면서 오히려 그 초조함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던 것 같다.

 

 

 

2005년 7월 17일, 일요일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지도 모르는 이번 주가 지나가고 있다.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하루였다. 잡생각에, 헛된 욕심에, 이유 없는 초조함에……. 아니, 이유는 있다. 마음 한 편으로는 내신과 수능을 걱정하고 있다. 그 관점에서 보면 분명 내가 하는 행동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공부의 목표가 꼭 좋은 대학 진학이여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아실현과 인격 완성.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렇다. 나는 내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갔음을 증명하자. 지난 1년간의 방황이 헛된 게 아니었음을 밝히자. 그리고 떳떳해지자. 누가 뭐라 하든.

 

...이제 1주일 남았다.

 

 

 

2005년 7월 20일, 수요일.

 

11시 자습을 마치고 나올 때였다. 1권을 다 보았다. 그냥.. 나오면서 느낌이 좋았다. 마치 새로운 내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았다. 내가 꿈꿔오던 모습을……. 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이렇게만 살 수 있으면 정말 더할 나위가 없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기분을 뭐라 형용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래도 2권까지는 끝내야겠지. 2권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있을지 너무 궁금하다. 나는 내 집중력을 믿겠다.

 

 

 

 

 

그렇게 2005년 7월 24일, 일요일. 서울대학교에서 개최된 천문 올림피아드를 치르고 돌아왔다. 그리고 보름 뒤 성균관 대학교에서 열린 제5회 KYPT 역시 치르고 왔다. 나의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은 이렇게 지나갔다. 대회보다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기억이었기에, 6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해 대학교에서도 천문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것이 내 인생을 바꾼 몰입 체험이다. (위 내용은 그 당시 일기를 그 당시 상황이 잘 드러나게 고쳐서 올린 것이다.)

 

몰입이라는 책은 대학교에 입학 후 스승의 날에 고등학교를 찾아갔을 때 뵈었던 화학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신 책이었다. 그 당시 내 적성에 대한 회의로 인해 진로를 바꿀까 고민하고 있던 차, 선생님께서 꼭 보라고 추천해 주신 이 책은 예전의 경험과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기에 내가 다시 마음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나의 전부를 쏟아 부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몰입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그래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부를 내던지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자신의 한계를 넘을 수 있겠는가. 그 정도로 절실해야 한다. 그리고 초조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끝이 보이지 않아도, 도저히 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도, 자신감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문제를 계속 생각해 가다보면, 어느 순간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닐 때가 오고, 신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타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원하는 답이 있다. 그 답이야 말로 오직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낸 진주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보다 더 소중해 보일 수 있고, 이를 위해선 자신의 자존심, 가치관도 버릴 수 있다. 그 만큼 소중하니까. 그렇게 답을 찾아냈을 때의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다. 만약 답을 찾는 일에 실패해도 최선을 다 했기에 후회스럽지도 아쉽지도 않다(정말 그랬다). 이렇게 몰입은 자신의 인생의 가치관마저 변하게 할 수 있다. 내가 몰입이란 책을 보면서 느낀, 그리고 내가 경험했던 몰입은 다음과 같았다.

 

 

 

2005년 당시의 몰입 경험은 굉장히 매혹적이었지만, 그 만큼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소홀해지는 계기도 되었다. 내가 얻은 성과에 비례해서 주변 사람들의 눈물도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사실 요즘에는 예전처럼 몰입하기가 꺼려지기도 한다. 몰입에 앞서, 그리고 몰입 도중에도 주변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