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잭'이라는 만화를 떠올리며 뭔가 그로데스크하면서 설원의 아찔한 장관을 상상했던거같다. 중반까지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는 전개라 밋밋하기도 했고,무엇보다 번역이 재미가 없다. 번역의 묘미를 전혀 살리지 못해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맛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 한마디로 말해 일본식 말투로 번역을 하는통에 우리 정서에는 고개를 갸웃하는 식이라고나 할까. 특히나 스키나 스노보드를 타는 짜릿함이나 박진감을 전혀 살리지 못한 글에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 스포츠를 잘 안다면 더 실감나게 느꼈을테고, 영상으로 본다면  긴장감을 더했겠지만 글로 이런 다이나믹함을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느껴진다. 그동안 익숙한 번역자가 아니어서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실망감이 없지 않다. 역자가 우리나라 글을 일본말로 옮기는 작업도 하시는 분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한국말 보다는 일본어에 더 능통하신 모양이다.

 

스키 시즌을 맞아 신게쓰 고원 스키장은 사람들로 붐빈다. 이런 와중에 스키장에 협박장이 날아든다. 폭탄을 뭍었고,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거나 경찰한테 연락을 한다면 폭탄이 터질 것이라는 것. 스키장 관리자들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경찰에 알려 세상에 알려지면 아무도 스키장에 찾지 않을것이고, 막대한 손실로 결국 스키장을 좋은 값에 매도하려던 운영진은 곤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스키장 매니저인 쿠라타는 손님들의 인명을 담보로 장사를 하는것에 반대의견을 낸다. 하지만 윗 선에서 명령되는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여기까지는 여느 탈취범들과 다르지 않는 행동양식을 보인다. 하지만 이윽고 전달되어온 메일에3천만 엔의 돈을 요구하고, 그것이 전달되곤 폭탄이 뭍히지 않는 장소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엥? 무슨 협박범이 돈을 한번에 요구하는것도 아니고 뭘 위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정보를 제공하지? 좀 남다른 범인들이군 싶었다. 또 계속해서 이어지는 메일이나 스키어에게 돈을 전달하게 하는 방식이나 저러다 잡히는거 아냐? 아직 이야기는 중반도 오지 않았는데? 이거 뭐 이렇게 엉성하지? 싶었다. 그렇게 그런 분위기로 중반까지 이어지는 조금은 지루하고 이해안되는 구성에 긴장감이나 치밀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두번의 생각도 없이 돈만을 전달하려는 스키장 경영자의 논리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간에 스키장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부인과 엄마를 잃은 이리에 부자의 등장과 스키 대회를 염두에 두고 스키장을 찾은 치아키 일행, 패트롤 요원인 네즈,에루 그리고 신입인 키리바야시까지

속속 모습을 보이는 등장 인물들이 이 사건과 어떻게 연관되어질까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었다. 종종 등장하는 스키어나 스노보더들의 활주 장면이나 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스키 활강 모습들은 스키어들이라면 이해가 되어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탈 줄 안다면 전문용어에서 나오는 모습들, 엣지 장면이나 턴 동작들이 상세히 머리 속에 떠오를테니 말이다.히가시노 게이고 자신이 스노 보더라고 하니 더 실감나게 그림들을 그리면서 소설을 써내려갔을 것이라 여겨진다. 영화화되기를 바랬고 영화화되기로 결정나기도 했다고 하니 솔직히 책보다 영화가 더 재미날 것같기도하다. 역동적인 장면들이 군데군데 꽤 많은데도 별로 제대로 전달이 되질 않는다. 스키보다 스노보드의 기술이나 동작들이 낯설기 때문이겠지만 전문용어만으로는 상상이 되질 못하는게 아닌가 싶다. 좀더 세밀한 미사여구가 있었다면 좋치 않았을까싶다. 일본인들은 환성을 자아내는 표현에 열광하는데, 번역서를 읽는 나는 스피드가 느껴지지 않는 전개로 여겨진다면 이건 아닌거같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낯선 스노보더에게 불의에 부인을 잃은 이리에에게 의구심을 품었던 매니저 쿠라타와 패트롤 요원 네즈는 이리에의 알리바이를 확인 하려드는데.... 이리에 부자는 종적을 감춘다.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 하지만 일순 흐름을 바꾸어 반전을 맞는다. 마지막에 모든게 일사천리로 일단락되고 마치 헐리우드 영화처럼 주인공들이 엔딩 키스를 날리며 끝나는 분위기다. 히기시노 답기도 했고, 좀 허탈하기도 하고...., 암튼 책보다는 영화가 더 재미날 것같은 예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나도 좀 어색하다.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거나 누구 하나 다치거나 하는 위험 요소가 너무 안보이는 첩보물이라 긴장감이 떨어지는 전개이니 어쩔 수 없겠다. 그러니 영화라면 모를까 책을 통해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없다보니 중반까지는 늘어진다. 원어로 읽는 이들에게는 이 소설의 스피드가 느껴질까 궁금해진다.

 

 흠 뭐랄까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기분' 내지는 영 어색한 누군가와 마주 앉아 있는 불편함,....암튼지간 참 복잡하고 신경 쓰이는 소설이다. 정말이지 제목처럼 폭풍 속을 한 개의 바람막이 없이 걷고있는 거칠고 건조한 느낌을 받는다. 숨 한번 훅 들이키면 먼지바람이 바로 코 속을 쑤셔와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고, 풀 한 포기 편하게 움트지 않는 척박한 밭고랑을 맨발로 헤매이는 그런 분위기....'  -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몸부림이나 지나간 사랑에 대한 처절한 자기연민, 강렬한 애증의 드라마가  아닐까 상상했었던 거같다. 하지만 이것은 다만, 꿈틀대는 광기와 한 영혼의 두 사람이 어쩌지 못해 갈등하며 산화하는듯 하다. 안타깝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굉장히 불.편.한. 그런 거 ... 이런걸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싶기도하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할퀴고 아프게 하는것. 그 상처를 사랑으로 보듬는다는 느낌보다는 - 니가 날 상처를 줘? 하지만 이것도 사랑이야. 넌 나이니깐. 우린 같은 영혼이니깐!!?

널 이해해. 니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던지....널 사랑할 수밖에 없어.' - 라는 식.

 

거센 바람이 부는 언덕위의 워더링 하이츠'에 초대받지 않은 검은 아이 히스클리프가 들어온다. 아버지의 자비로 데려온 히스클리프의 존재는 캐서린에게는 연민과 혈육이상의 정, 영혼 이전의 어떠한 힘에 의해 엮여진 상대였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오빠 힌들리'에게는 아버지의 사랑과 염려를 빼앗은 불길한 존재였을뿐이다.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은 그대로 힌들리의 질투와 학대로 이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무언의 상대: 피할 수 없는 불같은 화합으로 묶여있다. <폭풍의 언덕>의 화자이며 이야기를 이어주고 인물들의 면면을 밝히 보여주는 집안의 유모같은 엘렌'의 목소리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객관적인 전달이기보다는 엘렌의 성격도 은근히 드러내며 주관적인 견해- 그러니깐 이것이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 주요 인물 4명의 사정과 관계를 교묘히 설명해주는 식이다. 히스클리프의 미래를 위해 부유한 린튼 가문의 애드거와 결혼하기로 결정 내리는 캐서린의 이기심은 자신을 위해, 혹은 히스클리프의 안전한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지만 불안한 전조를 보인다.

 「 이 세상에서 내게 큰 불행은 히스클리프의 불행이었어. 그리고 처음부터 나도 각자의 불행을 보고 느꼈어.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보다도 생각한 것은 히스클리프 자신이었단 말이야.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나는 그 일부분으로 생각되지도 않을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거야.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그러니 다시는 우리가 헤어진다는 말은 하지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

대를 이어 계속되는 질긴 운명의 굴레'라고 할까. 린튼과 결혼하는 캐서린과 린튼의 여동생과 결혼하게되는 히스클리프. 이 무슨 장난같은 관계인지. 서로의 자식들에게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는 운명의 힘'이란,....

죽은 혼령이라도 내 곁에 붙들고 싶은 캐서린에 대한 열망은 히스클리프를 점점 광인이 되게하는데.... -

 

<제인 에어>를 쓴 샬럿 브론테의 언니  에밀리 브론테의 단 하나의 소설이라고 한다. 30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기 까지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된 허허로운 곳에서 이 작품을 탄생시켰던 에밀리 브론테. 동생의 소설은 나오자 마자 호평을 받은데 비해 이 소설은 처음에는 거친 표현에 좋은 평은 받지 못했단다. 어찌보면 <제인 에어>의 어둡고 침착한 분위기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시종 신경을 건드리는 히스테릭한 주인공들의 모습들은 당시에 별로 호감을 받지 못한 것이 이해가 되기도한다. <제인에어>가 가녀린 여성이 불굴의 의지와 결단, 어두운 환경 속에서도 뚝심있게 나아가는 긍정적인 모습인데 반해 <폭풍의 언덕> 속 캐서린은 열정적이지만 왠지 이기적인 구석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몰아넣은게  아니었나 싶기도하다. 히스클리프의 굴곡진 인생에서 한줄기 빛과 같았던 캐서린과의 사랑은 어찌보면 연인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영혼의 굴레에 얽혀있는 관계같이 느껴진다.

운명의 강력한 바람이 언덕위에 분다. 북풍으로 비껴서있는 가시나무에로...